【박란희의 TalkTalk】국내 ESG 공시 제도화, 유럽에서 배우는 3가지 교훈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드디어 2월 말이면 국내 ESG 공시 의무화 로드맵 초안이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현장에서 만나는 많은 기업 담당자들은 이제 불확실성이 해소되나 보다”는 안도감과 함께, 제도의 최종 틀이 어떻게 짜일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해외 미디어인 ‘리스판서블 인베스터(RI)’는 이미 한국의 공시 시점을 ‘2029년’으로 못박아 보도하기도 했더군요.
마치 대학만 입학하면 입시가 끝난다고 믿는 수험생처럼, 어쩌면 지금 우리는 ‘공시 의무화’라는 당장의 파도에만 시선을 뺏겨 그 이후에 닥쳐올 변화의 본질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공시 의무화라는 문턱을 넘은 뒤, 우리 기업들이 마주하게 될 진짜 변화는 무엇일지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ESG팀 조직 내 위상 달라지고, ESG 데이터 중요성 커져
우선 ESG팀의 기업 조직 내 위상이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전 칼럼에도 언급한 적이 있는데, 팀 모힌 전 GRI 회장이 쓴 책에서 엘리베이터에서 회사 다른 팀원을 만났을 때, 지속가능성 부서의 역할과 중요성에 대해 피튀기듯 강조하지 말라”는 게 있습니다. 그래봤자 큰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사실 재무팀이나 인사팀이 사내에서 자기들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며 다니지는 않지 않습니까? 중대재해처벌법 이후 안전관리팀이 경영의 필수값이 되었듯, 법적ㆍ제도적 강제성이 부여되는 순간 ESG 업무는 조직의 기본 운영 체제로 편입됩니다.
물론 ESG라는 영역을 2020년부터 접했던 국내 대기업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ESG 공시가 생소하다는 투덜거림이 나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의무화 과정은 지난 20여 년에 걸쳐 정교하게 쌓아올린 거대한 제도화의 결과물입니다. 2014년 유럽의 비재무정보 공개지침(NFRD)을 거쳐 2025년 기업지속가능성보고지침(CSRD) 시행에 이르기까지, 자율공시에서 의무공시로, 또 책자형 보고서에서 디지털 XBRL 공시로, 재무정보와 비재무정보의 통합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논의와 시행착오가 반복되어온 자본시장의 긴 역사가 존재합니다.
2012년 조선일보 더나은미래 편집장 시절부터 유럽연합의 무수한 논의들을 지켜봐 왔지만, 당시 국내에서는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사회공헌으로 여기던 분위기였기에 지금처럼 정교한 데이터 전쟁으로 수렴될 줄은 저도 예상치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ESG는 명확한 ‘데이터’의 영역으로 들어왔습니다. 기계(머신러닝)가 읽을 수 있는 디지털 태깅과 표준화된 숫자, 맥락이 있는 설명으로 기업의 실력을 증명해야 하는 데이터 전쟁이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국내 기업들은 3가지 관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수치적 꼼수, 더이상 안돼
우선, 기업의 성과를 좋게 보이게 하기 위해 데이터를 유리한 쪽으로 가공하거나 교묘하게 활용하는 수치적 꼼수 는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국내 대표 반도체기업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보면, 인적자본관리 데이터 기준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삼성전자는 퇴직률 10.1%를 공시했는데, 이는 자발적 이직뿐만 아니라 정년퇴직, 계약 만료, 해고 등 해당 회계연도의 모든 인력 감소분을 평균 임직원 수로 나눈 수치입니다. 즉, 전체 임직원 약 26만 명 중 10% 수준인 2만 6000명 정도가 매년 교체되고 있다는 뜻으로, 정년퇴직 등 자연 감소분 속에 핵심 인재의 유출 리스크가 희석되어 보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반면, SK하이닉스는 자발적 이직률(0.9%)과 비자발적 이직률(0.3%)을 명확히 합산해 전체 이직률 1.3%를 공시했습니다. 특히 이 수치는 2021년 3.8%에서 지속적으로 하락해왔으며, 기업이 핵심 인력의 유출을 매우 낮은 수준으로 투명하게 통제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표준인 ESRS와 GRI 등에서는 자발적 이직과 비자발적 이직을 구분하여 공시하도록 엄격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ESG의 S(사회) 부문에서 인적자본관리는 이제 가장 핵심적인 영역입니다. PwC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 분석 대상 기업의 100%가 인적자본 관련 지표를 주요 공시 항목으로 채택했을 정도입니다. 이는 인적 자원의 이탈이나 숙련도 저하가 곧 기업의 재무적 리스크와 직결된다는 사실을 자본 시장이 명확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분 최적화 그린워싱 위험해
둘째, 지속가능성 성과를 홍보할 때는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최근 SK텔레콤이 글로벌 독립 평가기관인 ‘월드벤치마킹얼라이언스(WBA)’의 디지털 포용 벤치마크(DIB)에서 글로벌 200개 기업 중 6위, 아시아 1위를 기록했다는 소식이 많은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쪽에선 개인정보 유출 사고에 따른 소비자원의 집단분쟁 조정안을 거부했다는 개인정보 침해 관련 리스크 보도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인터넷 검색 시대, 기업 사내 홍보커뮤니케이션팀의 핵심 역할 중 하나는 리스크 보도가 터졌을 때 이른바 ‘밀어내기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었습니다. 부정적인 기사가 포털 상단에 노출되지 않도록 다른 기사들로 덮어버리는 방식인데, 이때 가장 흔하게 활용되었던 도구가 바로 ‘사회공헌’ 기사였습니다.
하지만 ESG 관점에서 이는 전형적인 그린워싱 유형 중 하나인 ‘부분 최적화(Hidden Trade-off)’에 해당합니다. 일부 성과만 떼어내 강조하면서, 그 이면에 존재하는 중대한 리스크에는 침묵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이런 ‘선택적 홍보’는 정보 비대칭성을 이용한 눈속임으로 비쳐지며, 글로벌 투자자들에게 매우 부정적인 신호를 줍니다.
과거 대규모 뇌물 스캔들로 창사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았던 지멘스는 사고발생 후 조사과정을 가감 없이 공개하고, 업계 최고 수준의 컴플라이언스 시스템 을 전격 도입해 반부패지수 최상위권을 탈환했습니다. 이처럼 리스크 발생 후에 이에 대한 공시를 투명하게하고 재발방지 체계를 잘 구축하는 것으로 커뮤니케이션해야 합니다. 투자자들은 파편화된 숫자와 데이터가 아니라, ‘완결된 이야기’로서 기업을 바라보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종합적, 맥락을 갖춘 ESG 성과 커뮤니케이션 필요
셋째, 기업의 ESG 커뮤니케이션은 종합적으로, 맥락을 갖춰서 설명해야 합니다. 제3자를 통해 기업의 좋은 성과가 드러나면 더할 나위 없습니다. CDP의 모범사례에 등장한 오스테드 사례를 볼까요. 오스테드는 이미 2015년에 ESG 공시 책임을 재무 부서으로 전격 이전했습니다. ESG 데이터를 일반 재무제표와 동일한 수준의 엄격한 프로세스와 마감 일정, 관리 도구 내에서 다루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현재는 재무 부서의 ESG 보고팀이 주도권을 쥐고, 인사(HR), 지속가능성 부서, 규제 대응팀이 협력하는 체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6년 연속 CDP 최고 등급(A 리스트)을 달성할 수 있었던 비결 역시, 재무적 관점에서 온실가스 배출 체계를 지속적으로 개선해 온 데이터 관리의 힘에 있었습니다.
슈나이더 일렉트릭의 커뮤니케이션 자료는 ESG가 어떻게 실질적인 데이터로 증명될 수 있는지 잘 보여줍니다. 슈나이더 일렉트릭은 상위 1000개 협력사의 운영 탄소 배출을 48% 감축하는압도적인 성과를 거뒀습니다. 특히 자사의 ESG 목표 달성 정도를 외부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수치화한 자체 성과 대시보드인 ‘슈나이더 지속가능성 영향(SSI) 점수’는 10점 만점에 8.06점을 기록하며 목표를 향해 순항 중입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타임지와 스타티스타로부터 2년 연속 세계에서 가장 지속 가능한 기업 으로 선정, 가트너 공급망 1위와 최고의 ESG 정보 상 수상 등이 이어진 것입니다.
이제 국내 기업들도 글로벌 공시 의무화 대열에 나란히 섰습니다. 투명한 ESG 정보 공개는 이제 선택이 아닌 시장의 기본 문법이며, 이 문법을 가장 먼저 숙달하는 기업이 다가올 저탄소 경제의 패권을 쥐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데이터의 무게’입니다. 숫자는 결코 지어낼 수 없습니다. 오직 축적된 실력만이 정직한 숫자를 만들어냅니다. ESG 데이터는 단기간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거래소 공시까지 3~4년, 이후 법정 공시 의무화까지 많은 시간이 남았을지 모르지만, 경영 시스템에 ESG를 진짜 접목시키는 작업은 지금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박란희 대표 &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