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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이라면 역사의 선두에 서서 저항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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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해방신학연구소장 저항하지 않는 사람은 지식인도, 종교인도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편드는 사람은 누구나 지식인이다”라고 브라질의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는 말했다. 글자를 못읽고 못쓰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가난한 사람들을 편드는 사람은 지식인이라는 말이다. 보프 신부의 선친은 실제로 글자를 읽지도 쓰지도 못했다. 보프 말에 동의하면서도, 나는 조금 다르게 표현하고 싶다. 악의 세력에 저항하는 사람은 누구나 지식인이요 종교인이다. 글자를 못읽고 못쓰는 사람이라도, 학력에 관계없이, 악의 세력에 저항하는 사람은 누구나 지식인이다. 부처 예수 이름도 모르고, 스님 목사 신부로 살지 않고, 절 교회 성당에 다니지 않는다 하더라도, 종교가 없는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악의 세력에 저항하는 사람은 누구나 참된 종교인이다. 지식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교수 언론인으로 산다 할지라도, 악의 세력에 저항하지 않는 사람은 문맹에 불과하다. 종교를 갖고 있고, 스님 목사 신부로 산다 할지라도, 절 교회 성당에 발바닥이 닳도록 드나든다 할지라도, 악의 세력에 저항하지 않는 사람은 종교인이 아니다. 악의 세력에 저항하지 않는 스님 목사 신부는 스님 목사 신부로서 그럭저럭 살 수 있다 하더라도, 부처님 제자나 예수 제자는 아니다. 성찰만 하다가 무덤에 갈 참인가 저항과 성찰 중에 저항을 택할까 성찰을 택할까. 그런 선택 자체를 반박하는 의견도 있을 수 있다. 성찰은 또 다른 방식의 저항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저항은 성찰이고, 성찰은 저항이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래도 저항과 성찰 중에 하나만 택하라면 어떻게 될까. 대부분 지식인과 종교인은 저항보다 성찰을 택할지 모르겠다. 성찰하는 지식인과 종교인은 사람들에게 존경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찰을 강조하는 지식인 종교인, 악의 세력에 저항하지 않는 지식인 종교인을 박해할 멍청한 정치권력이나 재벌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저항없는 성찰은 공허하고, 성찰 없는 저항은 맹목적이라는 식의 칸트 스타일로 나는 말하고 싶진 않다. 지금까지 지식인 종교인은 주로 성찰하고 해석만 해왔지만, 이제는 저항과 변혁에 앞장서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지식인 종교인은 역사의 꽁무니에 서지 말고 선두에 서라고 요청하고 싶다. 성찰도 중요하고 저항도 중요하다면 둘 중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느냐고 묻고 싶다. 성찰부터 한다면, 평생 성찰만 하다가 무덤에 들어갈 지도 모른다. 성찰 노래를 부르고 부르다가 저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 성찰이 저항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고, 저항을 한평생 회피할 수도 있다. 자아실현이라는 고상한 표어 아래, 저항을 외면하고 무책임을 합리화하는 우아한 알리바이로서 성찰은 세련되게 악용될 수 있다. 저항으로 고난 자초한 예수, 성찰만 하는 영악한 제자들 저항부터 먼저 한다면 어떻게 될까? 저항하는 순간부터 성찰은 동시에 시작된다. 성찰하기 싫어도, 성찰을 원하지 않아도, 저항하는 사람은 저항하는 순간부터, 저절로 성찰하게 된다. 성찰만 하는 사람은 저항을 피할 수 있지만, 저항하는 사람은 성찰을 피할 도리가 없다. 그래서 저항과 성찰이라는 순서가 중요하다. 저항이 먼저다. 예수는 성찰도 했고 저항도 했지만, 예수에게 성찰보다 저항이 더 중요했다. 예수가 성찰만 하고 저항하지 않았다면, 예수는 정치범으로 십자가에서 처형되었을 리 없었다. 예수는 정말로 앞뒤 잴 줄도 모르고, 주류와 여론 주도층에게 잘 보일 줄도 모르고, 자기 검열 할 줄도 몰랐다. 예수의 원죄는 악의 세력에게 저항한 것이다. 예수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했더라면, 사회 지배층과 어울리며 안락하게 살았을 것이다. 사회 비판을 하지 않고 종교적인 인간으로만 살았더라면, 종교 지배층에게 온갖 칭송을 받았을 것이다. 엄중히 지켜보기만 하고,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며, 정무적 판단을 했더라면, 종교 지배층과 정치권력에게 영원히 후원받고 사랑받았을 것이다. 예수가 저항하지 않고, 그저 성찰 노래만 불렀다면 제자, 후원자, 추종자들에 둘러싸여 편안히 살며 장수하다가 여생을 마쳤을지 모른다. 광복절 다음날부터 독립운동에 나서지 그랬을까. 때를 모르고 주제 파악을 못한 예수는 멍청해도 너무나 멍청한 인간이었다. 그런데 요즘 한국 지식인 종교인들은 너무나 영리하고 너무나 영악하다. 지금 한국에 성찰하는 지식인 종교인은 많고, 저항하는 지식인 종교인은 적다. 성찰 지옥, 혹은 정신병원 아닌가 누가복음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 (누가 10,29-37)를 우리 역사 현실에 비추어 보자. ‘윤석열 검찰독재 일당이 한국 민주주의를 폭행하여 반쯤 죽여놓고 길가에 버려두고 갔다. 사경을 헤매는 한국 민주주의를 보면서도 지식인들은 모른 체 하고 지나쳐 버렸다. 종교인들도 상처받은 한국 민주주의를 외면하고 도망쳐 버렸다. 촛불 시민들과 민주 시민들이 쓰러진 한국 민주주의를 치료하고 간호하고 윤석열 일당을 체포하여 탄핵시켰다.’   박재동 촛불시민들 (부분) 윤석열 검찰독재 일당에게 강도당한 한국 민주주의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일까. 구경하고, 관찰하고, 평론하고, 채점하고, 분석하는 지식인인가. 절 교회 성당에 숨어 기도만 하는 종교인인가. 추운 겨울에 아스팔트에 앉아 밤새 저항한 촛불 시민들과 민주 시민들인가. 쓰러진 민주주의를 못본 체하고 나 혼자 극락에 천국 가겠다고 기도하는 사람은 프란치스코 교황 말씀을 들어야 한다. 불의를 외면한 채, 나 혼자 천국 가겠다고 기도하는 사람은 정신병원에 가야 합니다. 윤석열 검찰독재에게 강도당한 민주주의를 지나쳐버린 지식인과 종교인은 정신병원에 어서 들러야 한다. 부처님도 하느님도 우리에게 묻는지 모른다. 민주주의가 죽을 지경에 있었을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 하느님의 최후 심판에서 우리 모두는 이 질문을 들을지 모른다. 민주주의가 강도 당했을 때, 너는 성찰만 했느냐. 저항을 했느냐.” 예수 천국 불신 지옥 아니라, 저항 천국 성찰 지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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