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패권의 시대는 저무는가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조성렬 경남대학교 초빙교수
경주 APEC을 계기로 10월 30일에 열린 트럼프-시진핑 미·중 정상회담은 이번에도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끝났다. 트럼프 1기 행정부가 중국의 불공정 무역관행을 시정하겠다며 촉발한 미·중 무역전쟁은 2020년 1월 ‘1단계 무역합의’로 잠정 봉합됐다. 바이든 행정부에 들어와 미국은 미·중 관계를 ‘경쟁’ 관계로 정의하면서 그 경쟁이 충돌로 이어지는 것을 막는 ‘경쟁 관리’를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대중 고율관세를 부과했고, 중국 역시 희토류 수출통제 강화 등 보복조치로 맞서는 등 ‘관세전쟁’이 벌어졌다. 결국 이번 미·중 정상회담에서 미국은 대중 상호관세 부과를 1년 유예했고, 신종 마약인 중국산 펜타닐과 관련된 관세율을 10% 인하했다. 중국도 미국산 대두 등 농산물 수입을 재개하고 희토류 설비·기술 수출통제 강화조치를 1년간 유예했다. 중국은 트럼프 1기 때보다 대등한 위치에서 협상했으며, 이번 회담으로 미국의 글로벌 패권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30일 부산 김해공군기지 의전실 나래마루에서 미중 정상회담을 마친 뒤 회담장을 나서며 인사하고 있다. 2025.10.30. 연합뉴스
미국 패권의 성립과 ‘40% 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정세를 가리켜 미국 패권의 시대라고 부른다. 국제관계 분야에서 특정국가가 패권국(Hegemon)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거나 상실하는 기준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40% 룰’이 있다. 이 룰에 따르면, 한 국가가 세계총생산(GWP)에서 40% 안팎의 비중을 차지할 때 패권국 지위에 있다고 본다. 이는 단순한 경제적 우위를 넘어, 그 국가가 국제질서의 규칙을 설정하고 유지할 수 있는 압도적인 물질적 역량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미국이 ‘40% 룰’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다른 주요 산업국들이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을 때 미국은 전 세계 GDP의 약 50%를 차지했다. 이 압도적인 경제력은 미국이 브레턴우즈 체제와 같은 전후 국제경제질서를 설계하고 주도할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이 되었다. 1950년경에는 전 세계 제조업생산의 약 60%가 미국에서 나왔다. 막강한 생산능력은 미국 제품이 세계 시장을 지배하고, 다른 나라들에게 미국의 경제적 표준을 따르게 만들었다.
이 시기에 미국은 달러 중심의 국제결제시스템(SWIFT)을 통해 전 세계의 금융 흐름을 관리하고, 국제연합(UN)과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IMF) 등 브레튼우즈 체제라고 부르는 주요 국제제도를 창설하고 운영을 주도했다. 또한 1956년 수에즈운하 사건을 계기로 영국과 프랑스의 무릎을 꿇려 부동의 패권국 지위를 굳혔다. 미국은 1960년대까지 GWP의 35~40%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뒤에도 1985년 플라자합의를 강제해 일본의 공동패권(Bigemony) 꿈도 깨버렸고, 엄청난 군비경쟁 등을 통해 마침내 1989년 소연방의 해체를 이끌어내 패권도전을 좌절시켜 버렸다.
흔들리는 미국, 그리고 중국의 도전
하지만 미국의 패권 체제는 ‘나머지의 부상’으로 인해 서서히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미국의 정책 실패가 덧붙여지면서 그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국제분쟁에 대한 잦은 군사적 개입도 베트남전쟁에서 큰 시련을 맛보았고, 금융정책의 실패가 더해져 1971년 닉슨 대통령은 달러의 금 태환을 중단한다는 일방적인 선언으로 브레튼우즈 체제가 크게 흔들렸다. 이 시기 미국의 경제력은 GWP의 25~30%로 ‘40% 룰’이 무너졌다. 하지만 금본위 달러체제는 붕괴했으나, 미국은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 안전보장을 조건으로 석유대금을 달러로만 결제하도록 한 페트로달러로 갈아타며 달러 패권을 이어갔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와 4대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 파산에 따른 글로벌 금융위기(2007~2008), 코로나-19 사태(2020.1.~2023.5)에 따른 소비위축, 대량 실업, 기업매출 감소에 따른 경제적 타격 등으로 미국의 글로벌 패권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중국의 급성장으로 미·중 국력격차가 급속히 좁혀졌다. 중국은 세계무역기구 가입(2001.12) 이후 고도성장을 계속해 마침내 2010년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도약했다. 2011년 중국은 GWP 10%를 처음으로 넘어섰고, 2024년 현재 GWP 16.8%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미국의 68% 수준이다.
‘퍼거슨 법칙’과 미국 패권 몰락의 징후
영국의 경제사학자 니얼 퍼거슨은 최신 논문 「퍼거슨 법칙: 국가부채, 군사비 그리고 강대국의 재정 한계」(2024년)에서 역사적 사례분석을 통해 국가부채 이자지출액이 국방비 지출액보다 많은 강대국은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잃을 위험에 처한다”는 유명한 ‘퍼거슨 법칙’을 내놓았다. 이 법칙에 따르면, 국가부채의 이자지출이 국방비를 초과하는 지점을 ‘퍼거슨 한계’라고 부르고, 이 지점을 넘게 되면 강대국의 국방력이 약화되어 지정학적 지배력이 해체되어 마침내 패권 상실로 이어지는 경향을 보인다고 밝혔다.
퍼거슨은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임계점을 넘어서는 제국이나 국가들은 재정 건전성의 악화로 인해 국방역량 유지 및 확대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이는 결국 패권의 쇠퇴로 이어지는 ‘실패의 경로’를 걷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사례연구를 통해 역사적 제국들이 이 한계를 넘어선 후 쇠퇴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는 16세기 스페인 합스부르크 제국과 18세기 프랑스 부르봉 왕조, 20세기 오스만 제국과 대영제국의 몰락을 사례로 제시하고 있다.
퍼거슨은 미국의 국가부채 이자액이 국방비 지출을 초과할 것이라고 예측했고, 이 지점을 미국 패권 쇠퇴의 기점으로 보았다. 실제로 미 의회예산처(CBO) 보고서에 따르면, 2024회계연도 연방정부의 국가부채 상환 이자액이 약 8700억 달러로 국방예산 8500억 달러를 처음으로 앞질렀다. 2025회계연도에는 격차가 더 벌어져 이자액 1조 290억 달러, 국방비 8950억 달러를 기록했다.
국가부채의 이자 비용이 국방비를 초과하게 되면, 미국이 더 이상 패권 유지를 위한 군사적 투자와 혁신에 충분한 자원을 배분하기 어렵게 된다. 특히 중국과의 전략 경쟁이 심화되는 현 상황에서 이는 미국의 장기적인 군사 우위를 위협할 수 있다. 또한 막대한 이자 부담은 예산의 경직성을 높여 복지, 인프라, 교육 등 다른 필수 분야의 투자를 제약하고, 위기 발생 시 신속하고 대규모의 재정 대응능력을 떨어뜨린다. 또한 지속적인 재정 악화는 국제적으로 미국 달러와 국채에 대한 신뢰도에 의문을 제기해 달러 패권의 근간을 흔들 위험이 있다.
2024년 10월 현재 미국의 국가부채는 38조 달러를 넘어섰으며, 연방예산위원회(CRFB)는 미국의 2025회계연도 재정적자를 GDP의 5.6%인 1조 7천억 달러로 전망하고 있다. 이처럼 미국의 국가부채는 2024년 8월 37조 달러를 돌파한 뒤 두 달만에 1조 달러가 늘어나는 등 증가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재정적자 역시 2001년 이후 매년 급증하고 있으며 코로나-19 기간 동안 증가폭이 커졌고, 최근 연간 이자비용이 급증해 재정건전성에 대한 위기가 심화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스테이블코인 암호화폐에 대한 규제 프레임워크를 개발하고 산업 감독을 확대하는 내용의 지니어스법에 서명한 후, 빌 해저티 상원의원과 함께 법안을 들고 있다. 2025.7.17 로이터 연합뉴스
스테이블코인 기반 새로운 달러 패권전략
미국의 국가부채와 재정건성 악화에 따른 위기감이 트럼프 대통령의 MAGA주의를 불러냈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퍼거슨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국방비 지출을 늘리는 동시에 환경, 복지, 교육, 해외원조 등 재정지출을 줄이는 전략을 세웠다. 또한 관세정책으로 중국 등 주요 교역국에 고율관세를 부과해 무역적자를 줄이고 제조업을 부흥시켜 재정수입을 늘리려 하고 있다. 이를 위해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내세워 국방력 강화와 함께 재정 효율화, 금리 인하 등 재정·통화 정책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전후 미국의 패권은 압도적인 군사력과 신용(달러 체제)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국은 군사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중거리핵전력조약(INF)」 등 기존 군축조약에서 탈퇴하며 중국·러시아를 견제하고, 핵실험 재개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핵전력의 현대화 및 증강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나토 및 한국, 일본 등 동맹국들에게 국방비 지출을 GDP 대비 3.5~5% 증액할 것을 압박하고, 특히 한국과 일본에는 방위비분담금 대폭 인상을 요구하고 있다.
이와 함께 미국은 달러 패권 체제를 유지하면서 ‘퍼거슨 한계’를 낮추기 위해 스테이블코인(Stablecoin)에 주목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가치저장 수단이 될 수 있지만 변동성이 큰 비트코인의 단점을 보완한 것으로, 미국 달러 등 특정자산에 가치가 고정되도록 설계된 암호화폐다. 기존의 페트로달러 체제는 2024년 6월 미-사우디 협정의 종료로 막을 내렸다. 스테이블코인 기반의 새로운 달러 체제는 △달러 영향력 확대(국경간 결제, 무역결제 등), △미국 국채에 대한 해외수요 증가, △기존 SWIFT 대체 및 새로운 결제인프라 주도 등 달러의 디지털 영역 확장을 통해 ‘금본위 달러 체제’ → ‘석유 기반의 달러(페트로 달러) 체제’ → ‘스테이블코인 기반의 달러 체제’로 전환해 국제금융시장의 장악력을 유지하고자 한다.
미 행정부는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해 국채 수요를 창출하고 조달비용을 낮춰 ‘퍼거슨 한계’를 극복하려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강력한 지지 아래 스테이블코인의 발행을 합법화하는 「스테이블코인 규제법」(GENIUS Act)이 금년 7월에 미 상원에서 통과되었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사가 코인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 달러나 단기 국채 등 유동자산으로 100% 준비금을 보유하도록 의무화했다. 이를 통해 발행사들은 장기적으로 최대 2조 달러까지 미국 국채를 보유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테더(USDT)가 1350억 달러, 서클(USDC)이 210억 달러 등 주요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는 이미 한국의 1258억 달러보다 더 많은 미국 국채를 보유하고 있다.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성장은 미국 국채에 대한 수요를 구조적으로 증가시켜 미 행정부의 국채 관리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스테이블코인 기반 국채 수요의 확대는 93일 미만의 단기국채 수요증가를 통해 국채 이자율을 낮추고 조달 비용을 줄이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국가부채 규모 자체를 줄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속가능한 재정 건전성 확보와 국방비 최적화, 생산성 향상 없이 ‘퍼거슨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또한 이는 통화 창출(유동성 공급)의 권한이 민간으로 이전됨을 의미해 ‘또다른 달러’의 통용으로 미 연방은행의 통제범위를 넘게 되어 금융 안정성에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전쟁인플레이션: 국가부채 해소의 대안인가, 패권 종말의 위험인가
만약 트럼프 행정부의 스테이블코인 정책에도 불구하고 국가부채 관리에 실패하게 되면, 미국에게 어떠한 대안이 있을까? 공개적으로 논의되고 있진 않지만, 전쟁인플레이션(Warflation)으로 인한 미국 국가부채 감소방안이 대안으로 검토될 가능성이 있다. 역사적으로 전쟁은 높은 인플레이션을 유발해 화폐가치를 떨어뜨림으로써 기존의 국가부채를 실질적으로 줄이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재정지출, 전후 수요폭발, 통화량 증가 등으로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전쟁 직전인 1941년에 41%이었으나, 전쟁 직후인 1946년 119%까지 급등했다가 1950년대 후반에 50% 미만, 1974년에는 23%까지 급락하면서 안정을 되찾았다. 이 기간에 명목이자율(2.5%)이 인플레이션(6.5%)보다 낮았기 때문에 실질 이자율은 마이너스가 되어 미 정부의 국가부채 부담은 크게 줄었다. 이처럼 전쟁인플레이션 효과로 국가부채의 실질 부담을 낮춘 것이다.
2024년 말 현재 미국의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124%이다. 전쟁은 국가부채 부담 감소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현대의 전쟁은 지정학적 리스크와 경제 불확실성을 증대시키며, 고물가와 금리인상으로 오히려 재정 부담을 가중시킬 수 있다. 미국은 베트남전쟁 때 세금인상 없이 막대한 전쟁비용을 지출하면서 높은 인플레이션에 시달렸고 그로 인해 미국의 국가부채 증가와 국제수지 악화를 초래해 금본위 달러체제의 붕괴라는 쓰라린 경험을 안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전쟁인플레이션으로 미국의 국가부채를 축소하려는 도박을 감행하지는 않을 것으로 믿는다. 실제로 퍼거슨 교수도 전쟁-인플레이션-부채의 악순환을 경고하며, 전쟁은 ‘퍼거슨 한계’를 가속화할 수 있는 위험한 선택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전쟁인플레이션은 국가부채를 줄일 최후수단이 아니라 미국 패권의 종말을 가져올 위험요소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세계평화의 수호자에서 세계평화의 근심거리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한반도 평화를 위해 진영논리를 넘어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를 한층 강화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