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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부고가 불러온 참회와 속죄, 알프레드 노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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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 세상 떠났는데 내 부고가 실리다니 1888년 어느 날 아침, 스웨덴 출신의 발명가 알프레드 노벨(Alfred Nobel, 1833~1896)은 프랑스 신문을 펼쳤다가 기겁을 했다. 신문에는 죽음의 상인, 사망하다 라는 제목의 부고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런데 정작 죽은 사람은 노벨 자신이 아니라 그의 형 루드비그 노벨(Ludvig Nobel, 1831~1888)이었다. 신문사가 형제를 혼동한 것이다. 자신의 가짜 부고를 읽은 노벨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아, 세상이 나를 이렇게 보는구나. 폭약을 만들어 전쟁에 팔아 부를 축적한 인물로 역사에 남겨지리라는 사실을 그는 그 아침에 비로소 직감했다. 인간은 대체로 남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에 무감각하지만, 자신의 부고를 먼저 읽는 기이한 행운, 혹은 불운을 얻은 노벨은 달랐다. 그로부터 8년 뒤, 그는 유언장 한 장으로 세상을 또 한 번 뒤집어 놓는다.   1896년 노벨.(위키피디아) 폭약을 만든 자, 폭약에 치이다 노벨은 1833년 10월 21일 스톡홀름에서 발명가 임마누엘 노벨(Immanuel Nobel, 1801~1872)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기뢰(機雷) 제조로 러시아 군부와 거래하던 인물이었으니, 말하자면 노벨 가문은 대대로 터지는 것 과 연을 맺어 왔다. 노벨은 어린 시절 몸이 약했으나 머리는 비상했다. 다섯 개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화학·물리학·문학을 두루 공부했다. 특히 그는 니트로글리세린(질소 글리세린)의 가능성에 꽂혔다. 당시 니트로글리세린은 조금만 건드려도 폭발하는 위험천만한 물질이었다. 1864년, 그 위험함은 현실이 되었다. 스톡홀름 외곽의 실험실이 폭발해 노벨의 동생 에밀 오스카르 노벨(Emil Oskar Nobel, 1843~1864)을 포함한 다섯 명이 목숨을 잃었다. 동생을 잃은 충격에도 노벨은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1867년, 그는 규조토(硅藻土)라는 흙과 니트로글리세린을 섞으면 충격에 안정적이면서도 강력한 폭발물이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다이너마이트가 탄생했다. 노벨은 순진하게도 이 발명품이 전쟁을 억제할 것이라 믿었다. 너무 강력해서 아무도 감히 쓰지 못할 무기가 생기면 전쟁이 사라질 것이다 라고 그는 주장했다. 이른바 공포의 균형론이다. 핵무기가 등장하고도 전쟁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20세기의 경험이 그의 낙관론이 얼마나 순진했는지 입증하지만, 당시 그는 진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과는 알다시피 참담했다. 다이너마이트는 광산과 터널 공사에도 쓰였지만, 전쟁터에서 더욱 맹활약했다. 노벨의 발명품은 수많은 사람을 땅속에 묻었고, 노벨은 그 대가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평생 355개의 특허를 보유했고, 죽을 때 오늘날 가치로 약 2000억 원에 달하는 재산을 남겼다.   1950년 미국 미네소타주 로체스터에 있는 메이요 클리닉의 연구원들에게 수여된 노벨 생리학 또는 의학상 메달의 앞면.(위키피디아) 유언장 한 장이 만들어낸 기적 1895년 11월 27일, 이탈리아 산레모에서 노벨은 유언장에 서명했다. 내용은 간단했다. 재산 대부분을 기금으로 삼아, 매년 물리학·화학·생리학 또는 의학·문학·평화 분야에서 인류에게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에게 상을 주라는 것이었다. 이듬해 12월 10일, 노벨은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족들은 경악했다. 가문의 부가 혈연이 아닌 인류 에게 돌아간다니. 변호사들은 유언장의 법적 허점을 파고들었고, 스웨덴 왕실도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노벨의 뜻은 결국 관철됐다. 1901년부터 노벨상 시상이 시작되었다. 노벨은 생전에 사랑도, 가정도,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평생 독신으로 지냈고, 오스트리아 출신 평화운동가 베르타 폰 주트너(Bertha von Suttner, 1843~1914)와 교류하며 정신적 위안을 찾았다. 주트너는 1905년 노벨 평화상을 받는다. 죽고 나서도 사랑하는 이에게 선물을 전하는 셈이 된 것이다.   스톡홀름 노를란스가탄에 있는 알프레드 노벨의 생가.(위키피디아) 노벨상이라는 아이러니의 박물관 노벨상은 이후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이 되었다. 그런데 들여다보면 볼수록 아이러니가 넘친다. 평화상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1961~)는 취임한 지 채 1년도 안 된 2009년에 평화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 뒤로 임기 내내 드론 폭격을 승인했다. 다이너마이트 발명가가 만든 평화상을 폭격 명령권자가 받는 장면은, 노벨이 무덤에서 씁쓸히 웃을 만한 풍경이다. 경제학상은 아예 노벨이 만들지도 않았다. 1968년 스웨덴 중앙은행이 창립 300주년을 기념해 자체적으로 만든 상인데, 노벨 경제학상 이라는 이름을 달고 노벨상 시상식에 끼어들었다. 노벨 가문은 지금도 이 상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고 전해진다. 또한 노벨상은 철저히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준다는 원칙이 있다. 덕분에 간혹 황당한 일이 벌어진다. 2011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랠프 스타인먼(Ralph Steinman, 1943~2011)은 수상 발표가 나기 사흘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위원회는 몰랐다 는 이유로 수상을 그대로 인정했다. 규칙보다 현실이 앞서는 순간이었다.   1850년대 젊은 시절의 알프레드 노벨.(위키피디아) 한국에서 노벨을 읽는 법 자, 이제 한반도로 눈을 돌려 보자. 대한민국은 노벨 과학상 수상자가 단 한 명도 없는 나라다. 노벨 평화상은 2000년 김대중(1924~2009) 전 대통령이 수상했다. 남북화해와 햇볕정책의 공로였다. 그런데 그 뒤로 25년이 지났다. 그사이 남북관계는 악화와 개선을 반복하다 지금은 다시 꽁꽁 얼어붙었다. 화해의 상징이 박물관 유리 너머의 유물이 된 느낌이다. 과학 분야는 더 뼈아프다. 해마다 노벨과학상 시즌이 되면 한국언론은 올해는 한국인 후보가? 라는 기사를 쏟아내고, 어김없이 허탕을 친다. 정부는 수십 년째 기초과학 투자를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예산 심의철만 되면 기초과학 연구비가 가장 먼저 칼을 맞는다.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것은 그가 실용적 필요에 응답했기 때문이지만, 그 바탕에는 수십 년의 기초화학 연구가 깔려 있었다. 그는 니트로글리세린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동생을 잃고도 실험실로 돌아갔다. 한국사회가 기초과학 연구자에게 그만한 시간과 신뢰를 줘본 적이 있는가. 두 번째로 곱씹을 대목은 유산의 사용법이다. 노벨은 막대한 재산을 가족이 아닌 공익에 썼다. 오늘날 한국의 재벌 총수들이 세상을 떠날 때 그 재산이 어디로 가는지를 우리는 너무 잘 안다. 상속세를 줄이기 위해 수십 년째 법 개정을 로비하고, 편법증여로 부를 대물림한다. 노벨이 그 장면을 봤다면 다이너마이트를 어디에 쓰고 싶었을지 모를 일이다. 세 번째는 참회와 전환의 가능성이다. 노벨은 자신의 발명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스스로 인정하고, 남은 생을 그 되갚음에 바쳤다. 완전한 속죄였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외면하지는 않았다. 한국에서 권력을 가졌던 이들, 군부독재의 수혜자들, 불법자금으로 성장한 기업들, 언론탄압에 앞장섰던 이들이 노벨처럼 스스로 과오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공익적 전환을 선언한 사례가 얼마나 있었던가. 손에 꼽기도 쉽지 않다.   노벨 초상화.(위키피디아) 폭발은 두 가지다 다이너마이트는 파괴한다. 그러나 때로는 막힌 길을 뚫는다. 노벨은 그 양면을 온몸으로 살다 간 인물이다. 그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냥 시대의 인물이었다. 그리고 죽기 직전, 자신이 만든 폭발의 반대 방향으로 남은 힘을 던졌다. 지금 한국사회에도 두 종류의 폭발이 공존한다. 광장을 가득 채운 촛불과 태극기, 서로를 향해 으르렁대는 정치 진영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숨죽이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 어떤 폭발이 길을 뚫고, 어떤 폭발이 그냥 파괴로 끝날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노벨의 이야기는 이것 하나만은 알려준다. 자신의 부고를 스스로 읽을 용기가 있다면, 아직 늦지 않았다는 것을.   칼스코가에 있는 비요르크본 저택은 알프레드 노벨이 스웨덴에서 마지막으로 거주했던 곳.(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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