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가에 캘리포니아 탄소시장 후퇴...무상배출권 5조5000억 풀어 [환경] 휘발유값을 잡으려다 탄소 시장이 흔들리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가 13년간 유지해온 탄소배출권거래제를 대폭 손질했다.
캘리포니아 대기자원위원회(CARB)는 30일(현지시각) 정유업체와 시멘트 제조업체 등 주요 배출기업에 최대 40억달러(약 5조5000억원) 규모의 무상 배출권을 제공하는 내용을 포함한 탄소시장 개편안을 승인했다. 표면적으로는 휘발유 가격 급등과 산업계 부담을 완화하기 위한 조치지만, 환경단체와 일부 경제학자들은 사실상 기후정책 후퇴이자 석유업계에 대한 대규모 양보라고 비판하고 있다.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캘리포니아 주지사실
누가 받나… 정유사·시멘트·식품가공업체
이번 조치의 배경에는 휘발유 가격 이 있다. 최근 1년 사이 캘리포니아에서는 대형 정유소 2곳이 잇따라 문을 닫았고, 이란 전쟁과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인해, 지난 4월말 휘발유 평균 가격이 갤런당 6.01달러를 기록하며 사상 처음으로 미국에서 갤런당 6달러를 넘은 주가 됐다.
이러한 흐름은 정책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애초에 위원회는 2030년 감축목표 달성을 위해 시장에서 1억1830만개의 배출권을 추가로 제거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이는 정유업체들이 배출량을 더 줄이거나 배출권 구매 비용을 더 지불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정유업계와 산업계는 강하게 반발했다. 이에 위원회에는 수정안을 통해 1억1830만개 배출권을 영구 소각하는 대신, 캘리포니아 비축 계정(Build Up California Reserve) 으로 옮겨 두는 방안을 택했다. 신규 무상배출권을 발행한 셈이나 마찬가지다.
이는 탈탄소화 투자를 약속한 정유사·시멘트·식품가공업체 등이 새로 만들어진 제조 탈탄소화 인센티브 펀드(MDI, Manufacturing Decarbonization Incentive Fund) 를 통해 무상으로 받을 수 있게 한다. 또한 소비자 부담 완화를 명분으로 8억달러(약 1조1000억원) 규모의 추가 지원 프로그램도 포함됐다.
환경방어기금(EDF)은 이를 두고 프로그램의 한쪽에서 1억1830만개의 배출권을 빼고 다른 쪽에서 같은 수를 새로 만드는 것은 사실상 오염을 세탁(laundering pollution)하는 것 이라고 비판했다.
진짜 손실은 어디서… 연 40억 달러 → 20억 달러 반토막
반발도 거세다. 환경단체들은 이번 개편안을 대형 석유회사(Big Oil)에 대한 특혜 라고 비판했다.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시정부도 공개적으로 반대 입장을 밝혔다. 탄소시장 수익 감소가 대중교통 투자와 저소득층 지원 사업, 대기오염 개선 사업 등에 직접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캘리포니아의 탄소시장은 단순한 배출권 거래제도가 아니다. 배출권 경매를 통해 발생한 수익은 고속철도 건설, 대중교통 확대, 산불 대응, 주택 공급, 안전한 식수 사업 등 다양한 공공정책 재원으로 사용된다.
실제로 지난해 제정된 법에 따라 매년 약 10억달러(약 1조4000억원)는 캘리포니아 고속철도 사업에 투입되고 있다. 캘리포니아 주의회 산하 입법분석관실(LAO)은 이번 개편으로 연간 배출권 경매 수입이 현재 약 40억달러 수준에서 20억달러 수준으로 절반 가까이 감소할 수 있다 고 분석했다.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캠퍼스의 경제학자 메러디스 포울리(Meredith Fowlie)는 자격을 갖춘 정유 시설은 온실가스 배출량을 훨씬 초과하는 무상 배출권을 받을 수 있다 며 이것이 결국 배출량 증가와 탄소 가격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고 지적했다.
기후정책도 결국 물가와 정치
이번 논란은 최근 미국 민주당 주정부들이 직면한 공통된 딜레마를 보여준다.
캘리포니아는 오랫동안 미국 기후정책의 선도주자로 평가받아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인플레이션과 생활비 상승 압력이 커지면서 기후정책도 경제성과 정치적 수용성을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뉴욕과 매사추세츠 등 다른 민주당 주정부들도 최근 일부 기후정책의 시행 시기를 늦추거나 목표를 조정하고 있다.
미 캘리포니아 대기자원위원회 의장 로렌 산체스(Loren Sanchez)는 회의에서 기후정책은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며 경제적 부담에 대한 우려에 대응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고 말했다.
한국의 배출권거래제(K-ETS) 4차 계획기간(2026~2030년) 역시 비슷한 접근을 택한 바 있다. 기후에너지환경부가 지난해 확정한 제4차 할당계획에 따르면 발전 부문의 유상할당 비율은 계획기간 말까지 50% 수준으로 단계적으로 확대되지만, 산업부문 배출량의 약 95%를 차지하는 철강·석유화학·시멘트 등 탄소누출 우려 업종은 국제 경쟁력을 이유로 100% 무상할당을 유지한다. 나머지 비탄소누출 업종도 유상할당 비율을 현행 10%에서 15%로만 높이는 데 그쳤다.
캘리포니아 사례는 탈탄소화 비용을 누가 부담할 것인가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이 본격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