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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하늘이 내 지붕, 이 들판이 내 교회당 존 웨슬리

하늘이 내 지붕, 이 들판이 내 교회당 존 웨슬리
[사람들]
당신 교회에서 설교할 수 없습니다 1739년 봄, 영국 브리스틀 인근 탄광지대. 얼굴에 검댕을 잔뜩 묻힌 광부 수백 명이 들판에 모여 있었다. 설교자는 정식 교회강단을 잃었다. 영국 국교회 성직자들이 문을 걸어 잠근 것이다. 우리 교회에서는 설교할 수 없습니다. 설교자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외쳤다. 그렇다면 하늘이 내 지붕이요, 이 들판이 내 교회당이다.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 그의 평생이 그렇게 시작됐다. 영국 링컨셔 주 엡워스(Epworth)의 교구 목사 새뮤얼 웨슬리(Samuel Wesley, 1662~1735)의 집은 언제나 북적거렸다. 아이가 열아홉이나 됐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존은 그 중 열다섯째였다. 어머니 수재너 웨슬리(Susanna Wesley, 1669~1742)는 자식 열아홉을 키우면서도 각자에게 하루 한 시간씩 일대일 교육을 했다고 전해진다. 현대인이 들으면 그 일정표를 공유해 달라 고 부탁하고 싶을 만한 이야기다. 존 웨슬리가 훗날 엄청난 자기관리의 화신이 된 것은 이 어머니의 유산이었다.   존 웨슬리 초상화 1789년 경(위키피디아) 옥스퍼드의 규칙쟁이들 1729년 옥스퍼드 대학교. 남동생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1707~1788)가 몇몇 학생들과 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모임을 꾸렸다. 형 존이 합류하면서 모임은 더욱 체계를 갖췄다. 이들은 매주 성찬을 나누고, 금식을 하고, 감옥을 방문하고,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주변 학생들은 이 지나치게 규칙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무리를 비웃으며 감리교도(Methodist) 라 불렀다. 그 이름이 영구히 굳어버리리라고는 아무도 몰랐다. 별명이 정식 명칭이 되는 경우는 역사에서 드물지 않다. 조롱이 유산이 된 셈이다. 그러나 당시 웨슬리 형제의 신앙은 아직 딱딱했다. 규칙은 있었지만 불꽃이 없었다. 1735년, 두 형제는 새로 건설된 미국 식민지 조지아(Georgia)로 선교를 떠났다. 임무는 실패였다. 원주민 선교는 뜻대로 되지 않았고, 존은 한 여성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분란 끝에 영국으로 쫓기듯 돌아왔다. 패배자의 귀환이었다. 그런데 바다 위에서 폭풍을 만났을 때 공포에 떨었던 자신과 달리, 배 안에 있던 독일 경건주의자들이 찬송가를 부르며 태연했던 광경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새뮤얼 웨슬리, 존 웨슬리의 부친(위키피디아) 심장이 뜨거워지던 밤 1738년 5월 24일 저녁, 런던 앨더스게이트 거리. 웨슬리는 한 작은 모임에서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문이 낭독되는 것을 들었다. 그의 일기에 이런 문장이 남아 있다. 나는 내 심장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 순간을 두고 신학자들은 수세기째 논쟁한다. 회심이냐, 확신의 재발견이냐.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날 이후 웨슬리는 완전히 달라진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듬해부터 웨슬리는 말 위에 올랐다. 그리고 내려오지 않았다. 말년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평생 약 40만㎞를 여행했다. 지구 열 바퀴 거리다. 주로 말을 타고 달리면서 책을 읽었다. 낙마한 적도 있었다. 개의치 않고 다시 올랐다. 하루에 서너 차례 설교했다. 새벽 다섯 시 설교가 특기였는데, 본인 말로는 세상에서 가장 건강에 좋은 운동 중 하나 였다고 한다. 이 사람 앞에서 바빠서 못했다 는 말은 금물이다.   존 웨슬리의 어머니 수재너 웨슬리의 초상화(위키피디아) 가난한 자의 편에 서다 존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이 단순한 부흥운동으로 끝나지 않은 이유는 그가 설교만 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빈민구호소를 열었다. 무료진료소를 만들었다. 값싼 의약품을 직접 배포했다. 감옥을 방문해 죄수들을 가르쳤다. 소규모 신용조합 비슷한 것을 만들어 가난한 이들에게 무이자로 돈을 빌려줬다. 18세기 영국 산업혁명기에 도시 빈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을 때, 웨슬리는 그들에게 달려갔다. 그의 신앙은 가슴속이 아니라 발바닥으로 증명됐다. 1774년에는 소책자 『노예제에 관한 생각들(Thoughts Upon Slavery)』을 펴냈다. 노예무역을 지구상에서 가장 사악한 악행 이라 규정한 이 글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급진적인 선언이었다. 그는 친구이자 의회정치가인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에게 노예제 폐지운동을 계속하도록 독려했다. 세상을 떠나기 닷새 전, 웨슬리가 마지막으로 쓴 편지는 윌버포스에게 보낸 것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이름으로 이 비인도적인 악행에 맞서 싸우기를 그치지 말라 는 내용이었다. 87세 노인의 마지막 에너지가 노예해방에 쓰인 것이다. 동생 찰스 웨슬리(1707~1788)는 무려 6,500편 이상의 찬송시를 남겼다. 형이 발로 뛰는 동안 동생은 노래로 신앙을 심었다. 이 형제는 진정한 역할분담의 달인이었다.   존 웨슬리가 인디언들에게 설교하는 모습을 묘사한 판화.(위키피디아) 교황 존 이라는 별명 웨슬리의 단점도 짚어야 공정하다. 그는 조직운영에서 매우 권위적이었다. 감리교 모임의 모든 재산은 그의 이름으로 등록됐다. 모든 분쟁은 그가 최종결정했다. 반대파는 그를 교황 존(Pope John) 이라 불렀다. 아이러니하게도, 교황제도에 가장 강하게 맞선 개신교운동을 이끌던 사람이 그 별명을 들었다. 물론 웨슬리는 그 별명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역사는 그에게 두 가지 상반된 얼굴을 함께 남겼다. 민중을 위한 봉사자이면서 동시에 독불장군식 지도자. 위인전에 이런 내용까지 솔직하게 적어야 더 믿음직스럽다. 결혼 생활도 평탄치 않았다. 1751년 메리 바제일(Mary Vazeille)과 결혼했지만 1758년 별거했다. 웨슬리가 너무 오래 집을 비웠기 때문이었다는 설이 있다. 1년에 4만 5천㎞ 이상 말을 타고 다니는 남편과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웨슬리는 교구 교회의 강단에서 설교하는 것이 금지되자 야외 설교를 시작했다.(위키피디아) 혁명을 막은 복음? 역사가들 사이에는 오래된 논쟁이 하나 있다.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이 영국에서 프랑스식 혁명을 막았는가? 역사가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1917~2012)은 이를 부정했지만, 감리교 운동이 영국 노동계급에게 개인의 존엄과 공동체 의식을 심어줬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광부와 직공들이 감리교 소모임에서 성경을 읽고 토론하고 발언하는 법을 배웠다. 이것이 훗날 노동조합 운동과 노동당 창당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은 여전히 설득력 있다. 영국 노동당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케어 하디(Keir Hardie, 1856~1915)는 나는 맑스보다 웨슬리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배웠다 고 말했다. 웨슬리 자신은 정치혁명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영국 국왕에게 충성스럽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가 뿌린 씨앗이 어디로 자라났는지는 그의 의도와 무관했다. 좋은 씨앗은 심은 사람의 뜻을 넘어선다.   브리스틀의 뉴 룸 예배당 안뜰에 있는 A. G. 워커가 제작한 웨슬리의 기마상. 브리스틀은 웨슬리가 1740년대와 1750년대에 주로 거주했던 곳이다.(위키피디아) 한국교회, 어디로 가나? 존 웨슬리가 오늘날 한국에 왔다면 무슨 말을 할까. 한국의 감리교는 웨슬리의 직계후손이다. 한국개신교 전체에서 감리교는 주요교단 중 하나다. 그 창시자의 삶과 지금 한국교회의 모습을 나란히 놓으면 불편한 질문들이 쏟아진다. 웨슬리는 재산을 평생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줬다. 한국의 대형교회들은 어떤가. 웨슬리는 노예제에 맞서 싸웠다. 오늘날 누군가의 기본권이 짓밟힐 때 교회는 어느 편에 서는가. 2024년 12월 3일 밤, 윤석열이 계엄을 선포했다. 헌법을 정면으로 유린한 그 순간, 교회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일부 교회는 침묵했고, 일부는 계엄을 지지하기까지 했다. 웨슬리라면 어찌했을까. 그는 1774년에 이미 편지 한 장으로 비인도적 악행에 맞서 싸우라 고 했던 사람이다. 87세의 몸으로. 감리교는 영어로 Methodist , 곧 방법론자들 이다. 별명이 정식 이름이 된 이 교단의 창시자가 가르친 방법은 이것이었다. 매일 새벽 일어날 것, 말씀을 읽을 것, 가난한 자를 찾아갈 것, 불의에 맞설 것. 화려한 교회당을 짓는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웨슬리는 87세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이다. 그 말을 남기고 떠난 사람이 물려준 유산이 지금 어디쯤에 있는지, 한국교회는 한 번쯤 말발굽 소리를 떠올리며 물어봐야 할 것이다.   런던 세인트폴 대성당 묘지에 있는 웨슬리의 청동상(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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