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생들 앞 난 오줌싸개 반복케…수치심· 공포에 질려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①부에서 이어집니다.
나는 오줌싸개입니다.”
그 말은 벌이자 낙인이었다. 아이는 원생들 앞에서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어린 얼굴에는 수치심과 공포가 뒤섞였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아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음 차례가 자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밤이 오면 아이들은 물 마시는 걸 불안해했다. 화장실보다 두려움을 먼저 배우는 밤이었다.
백송이 씨의 고아원 친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했다. 본인도 시도한 경험이 있다. 시설 출신 아이들은 대부분 우울증에 시달리며, 사람을 만나는 것도 힘들어 한다. 대인기피증도 많아 사회생활이 쉽지 않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그때 기억이 사라지질 않는다고 말한다. 어른이 된 뒤에도 어린 시절의 기억은 몸 어딘가에 남아 있다. 그들에게 고아원은 이미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지금도 마음속 어딘가에서 계속 반복되는 시간이다.
백용한 씨의 기억은 누군가의 질병이었다. 어떤 선배가 배가 아프다고 계속 말했는데, 처음에는 단순한 꾀병 취급을 받았다. 아이가 배를 움켜쥐고 바닥에 웅크려 있어도 관리자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그날의 장면을 또렷이 기억한다. 선배는 결국 응급상태가 되어 병원으로 실려 갔다. 맹장이 터져버린 것이다. 수술을 받고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누군가의 생사가 ‘운’으로 정리되는 곳이었다.
백송이 백용한 백성빈씨가 머물렀던 제천 영육아원의 어린이날 행사 모습
백성빈 씨의 기억은 유치원부터다. 애들 웃기려고 말을 재미있게 표현했다. 아이들 사이에서는 흔한 장난이었다. 하지만 그 일은 시설로 곧장 전달됐다. 그날 저녁 성빈 씨는 시설에서 벌을 받았다. 엉덩이가 터져서 피가 날 정도로 맞았고 이후, 며칠 동안 유치원에도 가지 못하게 했다. 또 한 번은 물을 마시다가 TV에 쏟았는데, 바닥에 떨어진 물을 핥아 먹으라고 했다. 아이들이 있어야 할 곳, 보호받아야 할 곳이었던 시설에서 아이들은 ‘관리 대상’이었다. 당시 국장을 비롯한 관리자들은 매를 만들어 놓고 항상 엄포를 놓으며 때렸다.
어느 날, 뜻밖의 장면이 벌어졌다. 아동학대 이야기가 학교에 퍼지자 용한 씨의 중학교 2학년 같은 반 선생님과 친구들이 직접 제천영아원 앞까지 찾아와 시위를 벌였다. 거창한 구호나 깃발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친구들이 그곳에 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낯설고 놀랍고 고마운 일이었다.
그 가운데에 체격이 좋았던 유도부 친구가 특히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시설 앞에서 목소리를 내고, 저를 위해 함께 해 줬어요. 그날 이후 얼마간 저를 향한 폭력은 잠잠했지만 사라진 것은 아니었어요. 맞는 것이 너무 힘들어 시설로 돌아가지 않고 친구 집에서 며칠씩 지내기도 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왼손잡이였어요. 지금도 여전히 왼손으로 일상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글을 오른손으로 써야 한다며 무자비하게 때렸어요. 지켜보던 관리자가 저의 양쪽 뺨을 번갈아가며 때렸습니다. 왼손으로 글을 쓰면 안 된다는 이유였습니다. 한번은 머리가 길었던 두 여자 아이가 싸웠는데, 관리자는 둘을 뒤돌려 세워놓고 두 사람의 머리채를 함께 묶어버렸습니다.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게 만든 것이죠.”
한편, 여성 관리자가 여자 아이들에게 안마를 시키는 일이 자주 있었다. 팔과 다리를 두 명씩 네 명의 아이들이 맡았다. 제대로 안마를 하지 않으면 체벌이 가해졌다. 거부는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밤낮없이 안마를 시켜 졸음을 참고 눈을 비벼가며 안마를 해줘야만 했다.
시설의 샤워 시간도 아이들에게 단순한 일과가 아니었다. 그 시간은 늘 어딘가 불편한 긴장이 흐르기도 했다. 어느 날, 여성 관리자가 초등학생부터 중학교 1학년 남학생들까지 샤워실로 불러 모았다. 목욕을 시켜준다는 이유였다. 처음에는 몸을 씻겨주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은 아이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갔다. 관리자의 손이 아이들의 몸을 과도하게 만지는 일이 반복되었고, 일부 아이들의 중요 부위를 만지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아이들은 그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혹스러워 했다. 몸이 굳어졌고 말이 나오지 않았다. 부끄러움과 당혹감,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운 충격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러나 그 공간에서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시설 내에는 야외 수영장이 있었다. 남녀 모두에게 그 수영장에 속옷까지 벗은 채 들어가도록 했다. 알몸인 상태였다. 모욕감을 주려는 일종의 체벌이었다. 한번은 수영장에서 물고문을 당하고 있을 때, 후원자가 연락 없이 들어왔다. 갑자기 웃으라고 지시했다. 행복한 모습을 보이라며 강요한 것이다. 그날의 물고문은 아이들을 씻겨주는 행위로 위장되었다.
2000년대 초반 제천 영육아원 원생들의 모습.
이런 일도 있었어요. 저희가 보기엔 멀쩡한데, 그들은 상태가 심각하다며 몇몇 아이들에게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해서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약을 처방받았어요. 그런데 그 약을 치료와 상관없는 여러 명의 원생들에게 먹으라고 강요했습니다. 약을 삼키는지 여부까지 끝까지 감시했고, 입을 벌려보라며 확인까지 했습니다. 지극히 정상이었던 그 중 한명은 약의 부작용 때문이었는지 상태가 심각해지면서 결국 정신병원으로 보내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던 2013년, 제천영육아원에서 오래 묻혀 있던 균열이 밖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변화의 시작은 한 선배가 시설을 떠나면서였다. 그가 그룹홈으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당시 마음씨 착한 관리자 중 한 명이 지속된 아동학대에 분노하면서 그룹홈으로 옮기게 된 선배에게 국가인권위원회에 신고할 방법을 알려주었다. 처음에는 망설였다. 너무 오랫동안 그 환경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신고가 이루어졌다. 그 신고가 변화의 시작이었다.
매질과 폭언과 모욕과 성추행 등의 사건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들 스스로도 그것을 이상한 일로 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맞는 것은 우리가 잘못했기 때문이라는 말로 세뇌되었고, 그렇게 아이들은 폭력을 자연스러운 질서처럼 받아들이고 있었지요. 그 분위기는 집단적 침묵을 만들었습니다. 아이들 사이에서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누군가 맞는 장면을 보아도 대부분 고개를 숙이는데, 신고를 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어요.”
사건이 알려지면서 기자들이 제천영육아원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몇 명에 불과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거의 매일같이 취재진이 시설 앞을 지켰다. 아이들에게는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카메라와 마이크가 들락거리고, 기자들이 관리자를 찾는 일이 이어졌다. 그리고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가 시작되었다.
시설 안의 공기는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일부 관리자들은 아이들을 따로 불러 이야기를 했다. 인권위 조사에 협조하지 말라는 말이 반복되었다. 괜한 말을 했다가는 더 큰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식의 협박도 이어졌다. 그러나 이미 사건은 밖으로 알려진 뒤였다. 시설에서 벌어진 폭력과 학대의 정황이 하나씩 외부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이들 사이에서도 말이 돌기 시작했다.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일들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 순간들이었다.
파문이 확산되자, 위탁 아동들은 다른 시설로 옮겨졌다. 아이를 맡긴 부모들의 요청이었을 것이다. 학대를 견디며 살아온 아이들뿐 아니라 사건의 진실을 밝혀달라고 목소리를 냈던 원생들 역시 다른 곳으로 전원 조치되었다. 함께 문제를 제기하던 아이들은 그렇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이들 사이에서는 또 다른 이야기가 돌았다.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었던 김OO가 후원자 대표를 맡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사건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던 것 아니냐는 의심이 자연스럽게 퍼졌다. 시설 밖에서도 갈등은 이어졌다. 당시 시위를 주도했던 몇몇 아이들에게 후원자들이 직접 찾아오는 일도 있었다. 그들은 아이들을 설득하기보다 비난했다. 시설의 명예를 망치고 있다는 말이 이어졌고, 욕설도 서슴지 않았다. 제천에서 유명한 병원을 운영하던 한 의사는 아이들을 찾아와 격앙된 목소리를 냈다. 그 과정에서 백송이 씨에게 폭언과 폭행이 가해졌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버려진 것이다.”
2013년 제천영육아원 내부 사건이 터졌을 때 시위에 참가한 원생들.
이미 버림받았다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그 말은 더 큰 폭력이었다. 사건은 사회적 파장을 낳았지만, 결과는 아이들이 기대했던 것과 달랐다. 당시 아동학대 가담자로 지목된 사람은 원장을 포함해 다섯 명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자리에서 물러난 사람은 원장 한 명뿐이었다. 가해자로 지목된 다른 이들은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신고를 권유했던 관리자에게 정직 6개월의 징계가 내려졌다.
아이들은 그 결과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폭력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책임은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시설은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조용해졌다. 기자들도 점차 줄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사건은 끝난 일이 아니었다. 그 이후로도 여전히 두려움이 남아 있다고 했다. 진실을 말해도 상황이 바뀌지 않을 수 있다는 분노가 마음속에 피어났다. 2013년 시작된 사건은 기록으로는 한 번의 아동학대 신고사건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곳에서 자랐던 아이들에게는 단순한 일회성 사건이 아니었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그 기억은 트라우마가 되어 그들 곁을 맴돌고 있다.
아동학대 의혹이 불거졌을 때, 시설 안의 몇몇 아이들은 침묵하지 않기로 했다. 그중에서도 송이 씨는 비교적 앞에 서 있던 원생이었다. 시설 앞 시위와 문제 제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이유로 그의 이름은 곧 사건의 중심에 놓였다.
그러나 이후의 흐름은 아이들이 기대했던 방향과는 달랐다. 원주성애원으로 전원 조치 된 그에게는 업무방해 등의 혐의가 적용됐다. 첫 공판이 열리던 날, 그는 법정에서 곧바로 법무부 교정시설로 옮겨져 1년 6개월을 살아야 했다. 피해를 호소하던 아이가 어느 순간 황당하게도 범죄자의 위치로 바뀌어 버렸다. 시설 측의 책임을 희석시키기 위해 사건의 방향을 틀어버린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일부 피해 사례는 학교폭력 문제로 조작되기도 했다. 시설 내부 관리자의 구타 흔적이 아이들 간 학교폭력의 상처로 변조되었다.
용한 씨는 시설에서 강제 퇴소 조치 당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어떤 사건이 있었고, 학교는 그를 반강제로 자퇴 처리했다. 시설에서도 곧바로 퇴소 결정이 내려졌다. 준비할 시간도 없었다. 그날 밤 바로 시설을 떠나야 했다. 오히려 제천시청이 퇴소 절차를 빠르게 진행했다고 그는 기억한다.
아이가 갈 곳이 있는지, 이후의 생활이 가능한지에 대한 준비는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시설 문을 나선 뒤 그는 한동안 막막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음식점을 운영하며 그에게 큰 도움을 준 양어머니를 만났다. 그가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정직원으로 채용하기도 했다. 배달 일을 하며 생활을 이어갈 수 있도록 손을 내민 분이었다.
제천영육아원 사건은 결국 아동학대가 있었다는 사실이 인정되는 방향으로 정리됐습니다. 하지만, 아이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남았어요. 학대가 있었다는 사실은 인정됐지만, 그 피해의 무게는 결국 원생들이 나눠 짊어진 것 같다는 이야기였죠. 당시 자진 폐쇄 가 결정됐던 그 시설은 지금도 운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사건을 겪었던 우리는 여전히 묻는 겁니다. 그때의 진실은 과연 어디로 갔을까요?”
2013년 제천 영육아원 사건이 터졌을때 시위에 가담한 원생들이 오히려 해당 시설에서 쫓겨났다.
제인 화이트가 만든 화이트아동복지회에서 운영 중인 제천의 사회복지 시설은 3곳이다. 영육아원을 포함하여 아동보호전문기관과 상담복지센터 등이 있다. 당시 아동학대 가해자들이 지금도 위 3곳에서 고위직으로 일하고 있다. 제천영육아원 피해자들은 당시 가해자들을 사회복지시설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인터뷰 말미에 그들은 이 말을 남기기도 했다.
관리 감독 주체인 제천시도 결국 한통속이었어요.”
보호자여야 할 관리자들은 수시로 ‘아이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그러나 아이들은 영원히 아이 가 아니다. 세월이 흐르면 소년이 되고 청년이 되며 성인이 된다. 성인이 된 그들은 ‘보호’라는 이름의 시설폭력을 끊임없이 증언하며 시설보호 중단을 외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