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한 줌과 물레 하나로 제국 쓰러뜨린 간디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역사에는 가끔 이런 인물이 등장한다. 총도 없고, 돈도 없고, 군대도 없는데, 있는 거라곤 물레 하나, 소금 한 줌, 그리고 굽힐 줄 모르는 척추 하나. 그러면서 세계최강의 제국을 무릎 꿇린 사람.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1869~1948). 별명은 마하트마 (Mahatma), 즉 위대한 영혼. 그러나 그가 살아생전 가장 자주 들은 말은 아마도 이것이었을 것이다.
저 영감, 또 굶는대.
1931년의 간디(위키피디아)
구자라트 청년, 영국 법정에 서다
1869년 10월 2일, 인도 서부 포르반다르라는 항구도시에서 태어난 간디는 처음부터 혁명가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지방행정관, 어머니는 독실한 힌두교 신자. 집안은 그런대로 먹고살 만했다. 영국에 유학 가서 변호사 자격증을 딴 수재였으니, 요즘으로 치면 영국 로스쿨 출신 엘리트 변호사쯤 된다.
그런 그가 처음 인생의 벽을 만난 건 1893년, 스물넷의 나이에 남아프리카 나탈(Natal)로 건너가면서다. 사건 의뢰를 받아 기차를 탔다가, 일등칸에 버젓이 앉아 있었는데, 영국인 승객이 항의했다. 차장이 왔다.
유색인은 나가.
간디는 거부했다. 결과는? 짐짝처럼 역 플랫폼에 내동댕이쳐졌다.
그 추운 밤, 피터마리츠버그 역 대합실에서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도대체 이게 뭔가.
그 뭔가 를 풀어내는 데 그는 남은 생애를 전부 썼다.
1906년 남아프리카에서의 간디(위키피디아)
소금이 폭탄보다 세다
간디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1930년의 소금행진 이다. 당시 영국 식민당국은 인도인이 소금을 직접 만들거나 팔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세금을 매겼다. 밥상에 올라가는 소금에 세금을 내야 한다니, 조선시대 환곡(還穀) 수탈에 비견할 만한 치졸한 착취다.
간디는 이에 맞서 1930년 3월 12일, 아흔 명 남짓한 동료들과 함께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아라비아해 단디 해안, 거리는 약 388킬로미터. 24일 동안 걸어서 바닷가에 도착한 그는, 세상이 지켜보는 가운데, 허리를 굽혀 소금 한 줌을 집어 들었다.
총 한 방 없이, 칼 한 자루 없이, 그 행동 하나로 전 세계 언론이 들끓었다. 영국당국은 간디를 잡아 가뒀고, 이에 분노한 인도전역에서 수십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폭력 한 번 쓰지 않고 제국의 심장부를 흔들어 놓은 것이다.
누군가 물었다.
소금이 뭐가 그리 대수입니까?
간디가 답했다.
억압받는 사람에게 저항의 상징이 필요할 때, 그것은 가장 작고 가장 일상적인 것에서 나옵니다.
요즘 말로 하면, 프레임을 완전히 뒤집은 것이다.
간디가 소금 채취 독점권을 영국에 부여한 식민법에 저항하기 위해 소금 사탸그라하 운동 중에 소금을 채취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비폭력, 진짜 강한 자의 무기
간디철학의 핵심은 아힘사 (Ahimsa), 즉 비폭력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오해한다. 비폭력이 겁쟁이의 소극적 선택이라고. 천만에. 간디 자신이 못 박았다.
비폭력은 강한 자의 무기다. 폭력은 약한 자의 피난처다.
그가 말한 비폭력은 사탸그라하 (Satyagraha) , 즉 진리 파지(把持)와 한 쌍이다. 진실을 붙잡고 놓지 않으면서, 부당한 명령에는 몸으로 저항하되 상대를 해치지 않는다. 맞고, 잡혀가고, 굶으면서, 결국 부당함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생애 동안 열 차례 이상 감옥에 갔다. 남아프리카에서도, 인도에서도. 감옥 가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니 권력이 쓸 카드가 없어진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협박이 통하지 않는다.
인도 독립운동의 동지 자와할랄 네루(1889~1964)는 이렇게 회고했다.
간디와 함께 있으면 감옥도 순례지처럼 느껴졌다.
1942년 8월, 봄베이에서 인도 독립 결의안 초안을 작성하는 동안 간디가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로 지명된 자와할랄 네루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위키피디아)
물레질하는 변호사
간디의 또 다른 상징은 물레다. 그는 날마다 손수 실을 잣고, 직접 짠 천으로 만든 옷 카디(Khadi)을 입었다. 영국산 직물 불매운동의 일환이었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당시 영국은 인도에서 목화를 헐값에 가져가 영국공장에서 옷감을 만들어 다시 인도에 비싸게 팔았다. 인도의 전통 직조업은 몰락했고, 농촌 사람들은 일거리를 잃었다. 간디는 말했다.
물레 한 대가 인도경제를 되살린다.
오늘날로 치면 로컬경제 , 지역자립 , 소농지원 같은 개념이다. 150년 전 사람이 21세기 담론을 먼저 살았던 셈이다.
더 재미있는 건, 그가 채식주의자에 금욕주의자였다는 점이다. 주변사람들이 고기 좀 드시라, 쉬엄쉬엄 하시라 권할 때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소박함 자체가 그에게는 신념이었다. 죽을 때 그의 전 재산은 안경 하나, 샌들 한 켤레, 시계 하나, 밥그릇 하나였다.
재벌 3세가 수백억짜리 저택을 소박한 보금자리 라 부르는 나라에서 생각해볼 만한 장면이다.
간디가 1890년 영국 와이트 섬에서 채식주의자 협회 회원들과 함께 있는 모습(위키피디아)
그림자, 위인도 위인이 아닌 순간들
물론 간디가 완전무결한 성인은 아니었다. 그의 인생에는 불편한 그림자도 있다.
남아프리카 체류 초기(1893~1914)에 그는 흑인 아프리카인에 대해 차별적 발언을 남겼다. 인도 카스트 제도 철폐에도 소극적이었다는 비판이 있다. 여성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논란도 있다.
불가촉천민 해방운동가 브힘라오 람지 암베드카르(1891~1956)는 간디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카스트제도를 근본적으로 폐지하려 했던 암베드카르와 달리 간디는 제도 안에서의 개선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위인을 다룰 때는 이 부분을 빼먹지 말아야 한다. 추앙은 우상숭배로 가고, 우상숭배는 생각을 멈추게 한다. 간디 자신도 아마 이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간디와 그의 아내 카스투르바 (1902).(위키피디아)
총탄 앞에서 헤이 람(신이시여)
1948년 1월 30일 저녁, 뉴델리의 비를라 저택. 간디는 저녁기도회를 위해 마당을 걷고 있었다. 그때 군중 속에서 나투람 고드세(1910~1949)라는 힌두 민족주의자가 다가와 권총을 세 발 쏘았다. 향년 78세.
그의 마지막 말은 헤이 람(신이시여) 이었다고 전해진다. 자신을 죽인 자를 향해 증오의 말 한마디 없이.
아이러니한 것은, 간디를 죽인 자는 외세가 아니라 같은 인도인이었다는 점이다. 힌두와 무슬림의 화해를 위해 노력한 그를, 힌두 극단주의자가 죽였다. 평화를 설파한 자는 종종 가장 폭력적인 방식으로 생을 마감한다는 역사의 잔혹한 반복.
1948년 간디 암살 장소에 세워진 기념비. 간디의 발자국을 본뜬 조형물이 기념비로 이어진다.(위키피디아)
2020년대 한국, 간디에게 무엇을 묻나
자, 이제 한국으로 넘어오자. 2025~2026년의 한국은 좀 정신이 없다.
정치권은 날마다 고성과 막말이 오가고, 법과 제도는 힘 있는 자의 방패로 쓰이기 일쑤다. 검찰과 사법부를 둘러싼 신뢰는 바닥을 치고, 광장에는 태극기와 촛불이 번갈아 등장한다. 불평등은 심화되고, 청년들은 집 한 칸 마련할 희망을 잃은 지 오래다.
이런 상황에 간디가 한국사회에 던지는 물음은 무엇일까?
첫째, 저항의 방식에 대해. 간디는 불의에 맞서되 불의의 방법을 쓰지 않았다. 상대의 언어로 싸우다 보면 어느새 상대와 닮아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비폭력은 나약함이 아니라 전략이고 품격이다.
둘째, 일상의 저항에 대해. 간디의 물레질과 소금행진은 일상에서 할 수 있는 저항 의 위력을 보여줬다. 거대재벌 유통기업 불매운동, 지역소상공인 살리기, 공정무역소비, 이 모든 것이 현대판 물레질이다. 광장에 나가는 것만이 저항이 아니다.
셋째, 지도자의 자기절제에 대해. 간디는 스스로에게 가장 엄격했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어떤가. 자신의 잣대로 남을 재면서, 자신에게는 한없이 너그럽다. 내로남불 이라는 말이 사전에 등재될 만큼 일상화된 이중성, 간디의 삶은 그 대척점에 있다.
간디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그 뒤에는 수천만의 평범한 인도민중이 있었다. 저항은 영웅 한 명이 하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작은 용기를 내는 수많은 보통사람들이 역사를 움직인다.
한국도 그래왔다. 4·19혁명(1960), 5·18항쟁(1980), 6·10항쟁(1987), 그리고 촛불혁명(2016~2017). 광장을 채운 것은 언제나 영웅이 아니라 시민이었다.
수백만 명의 인도인들이 간디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애도를 표했다.(위키피디아)
위대함은 소박함 속에
간디의 삶을 돌아보면 역설의 연속이다. 가장 약한 자처럼 보였지만 가장 강했고, 가장 적게 가졌지만 가장 많이 남겼다. 폭력을 쓰지 않았지만 제국을 움직였고, 지위를 탐하지 않았지만 국부(國父)가 됐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당신이 보고 싶은 변화, 당신 스스로 그 변화가 되어라.
지금 한국사회에서 누군가 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그 사람이 한 명이 아니라 백만 명이라면, 어쩌면 우리도 우리만의 소금 한 줌 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물레 한 대가 제국을 흔들었다. 당신 손에 쥔 것이 무엇이든, 작다고 내려놓지 마시길.
1876년, 7살의 간디.(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