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의 한글철학 ㉗] 우리말로 다시 꿴 ‘늙은이(老子)’의 지혜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림1) 다석 류영모가 1959년 3월 22일부터 한 달 동안 노자 도덕경을 한글로 풀었다. 그는 노자(老子)가 ‘늙은이’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 푼 것을 뒷날 다시 바르게 써서 제자들에게 주었다.
1. 참알줄(道德經), 참을 아는 생명의 줄을 잡아라
류영모(多夕 柳永模)는 1890년에 나서 1981년에 돌아갔다. 90년 하고도 10개월 21일을 이 땅에서 사셨다. 그는 사는 동안 온통 ‘참’을 찾고, ‘참’을 잡고, ‘참’을 드러내고, 마침내 ‘참’으로 돌아간 ‘참사람’이다. 그러니 그의 철학적 당간지주는 오롯이 ‘참’ 한 글자에 있다고 할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참의 사상가와 경전들이 넘쳐나지만, 그는 오롯한 하나의 참을 오래도록 꿍꿍했다. 그 참은 쪼개질 수 없는 하나였고, 그 ‘오롯한 하나’에서 숱한 참의 숨이 샘솟고 참의 말씀이 터져 나왔다.
남긴 사상의 정수 중 하나가 바로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을 우리말로 풀어낸 작업이다. 다석은 『도덕경』을 단순히 한자 뜻풀이로 옮기지 않았다. 그는 노자(老子)를 ‘늙은이’로, 도덕경(道德經)을 ‘참알줄’이라는, 낯설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우리말, 즉 ‘뜻글’로 뒤바꾸었다. 이는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한자의 껍질을 깨고 그 안에 담긴 우주의 얼을 우리말의 그릇에 온전히 담아낸 창조적 승화였다.
하필 ‘참알줄’인가? 다석은 노자의 『도덕경』 세 글자를 우리말 ‘길(道)’, ‘속알(德)’, ‘줄(經)’로 새겼다.
‘도(道)’를 보자. 다석은 도를 ‘도’라 하지 않고 줄곧 ‘길’이라 했다. 우리말 ‘길’의 닿소리와 홀소리를 뜯어보면 우주의 이치가 숨어 있다. ‘길’의 첫소리 ‘ㄱ(기윽)’은 하늘이 땅을 그리워하여 내리긋는 모습이요, 가운뎃소리 ‘ㅣ(이)’는 그 사이에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이며, 끝소리 ‘ㄹ(리을)’은 쉬지 않고 끊이지 않게 흐르는 움직임을 뜻한다. 즉, ‘길’이란 하늘의 뜻이 땅으로 내려와 사람을 통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 곧 길을 닦고 실천하는 삶 그 자체다. 이것이 바로 거짓 없는 ‘참길’이니, 나는 여기서 ‘길’을 다시 ‘참’으로 바꾸어 부르고자 한다.
‘덕(德)’이다. 덕의 사전적 의미는 어질고 올바른 마음이나 훌륭한 인격”이지만 , 다석은 이를 ‘속알’이라 불렀다. 덕이 있는 사람이란 겉치레로 꾸민 사람이 아니라, 속(裏)이 꽉 찬 사람, 알맹이와 고갱이가 여문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흔히 속생각이 좁은 사람을 낮잡아 ‘소갈머리 없다’고 하듯, 덕은 빈 껍데기가 아닌 꽉 찬 ‘알’이다. 그러니 덕은 곧 ‘알’이다.
‘경(經)’이다. 경은 본래 실(絲)과 지하수(巠)가 합쳐진 글자로, 실이 물처럼 흐르는 모양, 즉 베틀의 세로줄인 ‘날줄’을 뜻한다. [cite_start]베를 짤 때 날줄을 팽팽하게 잘 잡아야 씨줄을 넣어 옷감을 짤 수 있듯, 경(經)은 삶의 기준을 바르게 잡는 ‘줄’이다.
셋을 합치면 ‘참알줄’ 된다. 참길의 줄잡기요, 속알의 줄잡기다. 참을 아는 줄며, 생명의 알맹를 꿰는 줄이다. 는 다석이 20년 동안 쓴 『다석일지』의 마지막 날, 1974년 10월 18일에 남긴 ‘실알 마올’라는 화두와도 정확히 맞닿아 있다.
‘실알 마올’은 한 실오라기 생명줄(실)의 참(알)으로 마음(마) 올바름(올)”이라는 뜻이다. 다석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우주와 내가 하나로 이어지는 그 한 가닥 ‘생명줄’의 참됨을 붙잡고자 했다. 그 ‘실알’이 곧 ‘참알’이고, 그 ‘마올’이 곧 바른 ‘줄’이니, 『도덕경』은 2천 년 전 중국의 고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말 속에 살아 숨 쉬는 ‘참알줄’인 것이다.
한글을 단순한 소리글자로 보지 않았다. 그는 훈민정음의 닿소리(자음)가 오행(목화토금수)의 원리를 품고 있고, 홀소리(모음)가 천지인(天地人)의 조화를 본뜬 ‘뜻글’임을 간파했다 . 우리말의 바른소리(正音)를 깨우칠 때 참뜻의 오묘한 깊이에 가 닿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노자의 낡은 도포 자락을 걷어내고, 다석이 우리말로 지어 입힌 새 옷을 입은 ‘늙은이’를 만나야 한다. 그 ‘늙은이’는 늙고 병든 노인이 아니라, ‘늘 그이’, 즉 변함없이 늘 살아 있는 스승이다. 그가 건네는 ‘참알줄’을 잡고, 껍데기뿐인 ‘제나’를 벗어던지고 오롯한 ‘얼나’로 솟아오르는 길, 그 가슴 벅찬 ‘말숨’의 잔치로 독자 여러분을 초대한다.
참, 알, 줄! 참알줄!
참을 아는 줄!
이 줄을 잡고, 이제 「늙은이」의 마당으로 함께 들어서 보자.
2. 길(道)에서 ‘참’으로, 하늘 땅을 잇는 사람의 길
류영모는 노자의 『도덕경(道德經)』 첫 글자인 ‘도(道)’를 ‘도’라 하지 않고 줄곧 우리말 ‘길’이라 했다.우리말의 어원에는 한자에서 유래한 말이 적지 않고, ‘도’라는 말 또한 우리말처럼 익숙하게 쓰이기에 굳이 바꾸지 않아도 될 법했다. 게다가 ‘도’를 ‘길’이라 풀어버리면 ‘도학(道學)’이나 ‘도교(道敎)’가 표방하는 그 그윽하고 형이상학적인 깊이가 왠지 얕아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불구하고 다석이 기어이 ‘도’를 ‘길’로 바꾼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말의 구조와 뿌리,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뜻으로 도(道)의 참모습을 온전히 드러내려 했기 때문이다. 다석은 남의 글자인 한자가 아니라, 우리말의 바른소리(正音)를 통해야만 참뜻의 오묘한 깊이에 가 닿을 수 있다고 보았다.
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석이 닦아 놓은 그 ‘길’을 다시 ‘참’으로 바꾸어 부르고자 한다. 왜 ‘길’이 곧 ‘참’인가? 다석이 한글을 풀어내는 방식, 즉 ‘뜻글’로서의 한글을 들여다보면 그 답이 보인다. 우리말 ‘길’이라는 글자의 생김새를 뜯어보자.
길’의 첫소리 ‘ㄱ(기윽)’은 어떤 모양인가? 그것은 하늘이 땅을 그리워하여 내리긋는 모습이다. 가없이 높고 먼 하늘이 저 낮은 땅을 향해 기운을 내리는 형상, 이것이 바로 ‘ㄱ’이다. 하늘의 뜻이 땅으로 내려오지 않으면 생명은 싹트지 않는다. 그러므로 길의 시작은 하늘의 마음이 땅으로 향하는 그 간절한 그리움에 있다.
그림2) 서울 YMCA에서 연경반 강연을 할 때는 늘 종이에 글을 써 벽에 붙여 놓고 강의했다. 이 글도 그 중 하나다. 제목은 ‘줄곧 하나’이다.
가운뎃소리 ‘ㅣ(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이다. 하늘이 내려오고 땅이 받아주는 그 천지간의 한복판에, 꼿꼿하게 서서 하늘의 뜻을 잇고 땅의 생명을 누리는 존재, 그것이 바로 사람이다. 사람이 없으면 하늘의 뜻은 공허하고 땅의 생명은 맹목적이다. 길은 사람을 통해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끝소리 ‘ㄹ(리을)’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굽이치며 쉬지 않고 끊이지 않게 흐르는 움직임이다. 고여 있는 것은 길이 아니다. 멈춰 있는 것은 도가 아니다. 하늘의 뜻(ㄱ)을 받은 사람(ㅣ)이 멈추지 않고 실천하며 나아가는 것(ㄹ), 이것이 바로 ‘길’의 완성이다.
셋을 합쳐 놓은 글자가 바로 ‘길’다. 하늘의 뜻을 땅에 심고, 사람 그 뜻을 받들어 쉬지 않고 닦아 나가는 것. 것은 단순히 오가는 도로(road)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마땅히 걸어가야 할 삶의 방식며, 닦고 실천해야 할 도리다. 그리고 렇게 길을 닦고, 길을 실천하며, 길의 삶을 온몸으로 살아내는 것, 그것 바로 거짓 없는 ‘참길’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길’이 곧 ‘참’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길은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살아내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다석이 『도덕경』을 ‘참알줄’이라 부를 수 있었던 것도, 그 속에 담긴 도(道)가 관념적인 법칙이 아니라, 우리가 숨 쉬고 밥 먹고 사랑하며 걸어가야 할 구체적인 ‘참’의 길임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자의 도(道)는 멀리 있는 신비한 주문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 우리말 ‘길’ 속에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로 어우러져 끊임없이 흐르는 이 ‘참’의 길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껍데기뿐인 삶을 벗어던지고 오롯한 ‘얼나’로 솟아오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다석이 열어젖힌 우리말 철학의 문을 통해, ‘길’이라는 글자 하나에 담긴 우주적 비의(秘義)를 보았다. 그 길은 하늘에서 내려와 땅으로 흐르고, 사람의 몸을 통과하여 다시 하늘로 솟구친다. 이 역동적인 생명의 순환, 이것이 바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 ‘참길’이다.
3. 속알(德), 겉치레를 벗고 알맹이를 채우는 삶
우리는 앞서 노자의 『도덕경』 첫 글자인 ‘도(道)’를 다석 류영모가 우리말 ‘길’로, 그리고 더 나아가 ‘참’으로 풀어내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하늘의 뜻이 땅으로 내려와 사람을 통해 이어지는 그 ‘참길’을 걷다 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두 번째 글자인 ‘덕(德)’을 마주하게 된다.
다석은 이 ‘덕(德)’을 우리말로 ‘속알’이라 새겼다. ‘도’를 ‘길’이라 한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변환이지만, ‘덕’을 ‘속알’이라 한 것은 무릎을 치게 만드는 파격이자 통찰이다.
우리는 ‘덕(德)’을 사전적 의미 그대로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행하려는 어질고 올바른 마음이나 훌륭한 인격”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흔히 ‘덕이 높다’, ‘덕을 베풀다’, ‘덕을 보다’라는 말을 쓴다. 덕망 있는 사람이란 남에게 베풀 줄 알고 인격이 훌륭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통용된다. 하지만 다석은 이러한 도덕 교과서적인 해석에 머물지 않고, 그 말의 뿌리를 우리말의 깊은 샘에서 길어 올렸다.
왜 하필 ‘속알’인가?
어질고 올바른 마음을 지닌 사람을 겉모습이 화려하거나 행동이 세련된 사람이 아니라, ‘속(裏)이 꽉 찬 사람’으로 보았다. 여기서 ‘속’은 겉치레의 반대말인 내면을 뜻하고, ‘알’은 생명의 핵심인 알맹이를 뜻한다. 즉, ‘속알’이란 겉껍질이 아니라 그 안에 단단하게 여문 ‘알맹이’요, 사물의 정수(精髓)인 ‘고갱이’를 말한다. 실제로 ‘속알’은 ‘알맹이’를 뜻하는 평안북도 방언이자 ‘고갱이’를 뜻하는 충청북도 방언이기도 하니, 다석의 풀이는 없는 말을 지어낸 것이 아니라 우리말 속에 숨 쉬고 있던 생명의 언어를 되살려낸 것이다.
일상에서 흔히 쓰는 말 중에 ‘소갈머리’라는 것이 있다. 소갈머리 없다”고 할 때, 이는 속생각이나 마음 씀씀이가 밴댕이 소갈딱지처럼 좁고 얕은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이때의 ‘소갈’이 바로 ‘속알’에서 온 말이다. 속알이 없거나 빈약한 사람은 겉으로는 번드르르할지 몰라도, 그 내면은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반대로 덕이 있는 사람은 그 ‘속알’이 꽉 들어찬 사람이다.
그러므로 덕(德)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치장이 아니다. 그것은 내 안의 빈탕을 하늘의 뜻, 곧 ‘참’으로 가득 채워 ‘알’을 만드는 일이다. 곡식이 햇볕과 비바람을 견디며 껍질 안쪽으로 단단한 알곡을 맺어가듯, 사람 또한 인생의 길(道)을 걸으며 그 내면에 참된 얼, 즉 ‘얼나’라는 속알을 맺어야 한다.
다석에게 덕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그것은 내 속을 들여다보고, 헛된 욕심인 ‘제나’의 껍질을 벗겨내고, 그 자리에 우주의 생명력인 ‘산알’을 채우는 치열한 닦음의 과정이다. 속이 차지 않은 사람은 바람에 쉽게 날리는 쭉정이와 같아서, 세상의 풍파에 이리저리 휩쓸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속알’이 든 사람은 묵직한 씨앗처럼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싹을 틔운다.
그림3) 다석 류영모의 한글철학이 듬뿍 담긴 글꼴로 지은 다석학회 벽그림이다. 다석학회가 창립하고 20년이 되어서야 첫 알맞이 말톺‘을 열었다. 첫 말톺의 말머리는 ”한글에 깃든 다석 류영모의 하늘 이었다.
이제 ‘도덕(道德)’이라는 한자어는 다석을 통해 ‘참길*과 ‘속알’이라는 우리말 옷을 입고 새롭게 태어났다. 도(道)가 우주가 운행하는 거대한 길이라면, 덕(德)은 그 길을 걷는 사람의 내면에 맺히는 단단한 결실이다. 길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탯줄이라면, 속알은 그 탯줄을 통해 자라나는 생명의 핵심이다.
덕(德)은 곧 ‘알’이다. 이 알은 생명을 품고 있고, 우주를 품고 있다. 다석이 『도덕경』을 ‘참알줄’이라 부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참(길)을 따라가서, 내 속에 참된 알(속알/덕)을 맺고, 그 이치를 줄(경)로 삼아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다석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늙은이(老子)’의 참뜻이다.
당신의 속은 어떠한가? 겉만 화려한 빈 껍데기인가, 아니면 속이 꽉 찬 알맹이인가? 이제 우리는 겉치레를 벗어던지고, 내 안의 ‘속알’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곳에 참된 생명의 씨앗이 숨 쉬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4. 줄(經), 흔들리는 삶을 붙잡는 단단한 날줄
우리는 지금까지 노자의 『도덕경』 앞의 두 글자, ‘도(道)’와 ‘덕(德)’을 다석 류영모의 우리말 철학으로 풀어보았다. 도는 하늘의 뜻이 땅으로 내려와 사람이 걷는 ‘참길’이 되었고, 덕은 그 길 위에서 내면을 꽉 채운 ‘속알’이 되었다. 이제 마지막 한 글자, ‘경(經)’이 남았다.
우리는 흔히 ‘경(經)’을 성인(聖人)의 가르침을 적은 책, 즉 ‘경전(經典)’이나 ‘성경(聖經)’ 정도로 이해한다. 하지만 다석은 이 거룩해 보이는 글자의 껍질을 벗기고, 그 속에 숨겨진 노동의 땀방울과 생활의 이치를 찾아냈다. 다석은 ‘경(經)’을 우리말로 ‘줄’이라 불렀다.
왜 하필 ‘줄’인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경(經)’이라는 한자의 뿌리를 캐봐야 한다. ‘경(經)’은 실 사(絲) 변에 지하수 경(巠) 자가 합쳐진 글자다. 지하수가 땅속을 곧게 흐르듯, 실이 세로로 팽팽하게 뻗어 있는 모양을 본뜬 것이다. 이것은 바로 베틀에서 옷감을 짤 때, 세로로 매는 실인 ‘날줄’을 뜻한다.
베를 짜는 일, 즉 길쌈을 해본 사람은 안다. 옷감은 세로로 놓인 ‘날줄’과 가로로 오가는 ‘씨줄’이 서로 얽히며 만들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날줄이다. 베틀에 앉아 북을 놀리기 전에 먼저 날줄을 팽팽하고 바르게 걸어야 한다. 날줄이 느슨하거나 삐뚤어지면, 아무리 부지런히 씨줄을 넣어도 옷감은 엉망이 되고 만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길쌈은 줄잡기가 일의 반이다”라고 했다.
다석은 이 ‘길쌈의 이치’를 ‘삶의 이치’로 가져왔다. 우리의 인생도 베를 짜는 것과 같다. 하루하루 먹고살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일상은 가로로 오가는 ‘씨줄’이다. 이 씨줄은 끊임없이 변하고 흔들린다. 하지만 그 흔들리는 일상이 엉키지 않고 온전한 ‘삶’이라는 옷감으로 짜이기 위해서는, 그 바탕에 변하지 않는 기준, 즉 ‘날줄’이 팽팽하게 서 있어야 한다.
날줄이 바로 ‘경(經)’, 곧 ‘줄’다. 그것은 진리요, 원칙며, 하늘의 뜻다. 사람 짐승과 달리 ‘사람 노릇’을 하며 살 수 있는 것은, 마음속에 바른 줄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다석에게 경전란 단순히 읽고 외우는 책이 아니라, 내 삶의 베틀에 걸어야 할 ‘바른 줄잡기’의 어미 글다. 곧 베틀어미란 야기다.
세상은 어지럽고 삶은 고달프다. 수많은 유혹과 시련이 씨줄처럼 우리를 흔든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흔들리는 씨줄을 단단히 잡아줄 ‘날줄’이다. 그 줄이 없으면 우리는 방향을 잃고 휩쓸려 다니다가, 결국 뒤엉킨 실타래처럼 흉한 꼴로 삶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다석은 노자의 『도덕경』을 ‘참알줄’이라 불렀다. ‘참’은 우리가 걸어가야 할 바른 길(道)이요, ‘알’은 그 길에서 얻는 생명의 속알(德)이며, ‘줄’은 그 참과 알을 놓치지 않게 붙들어 매는 단단한 끈(經)이다.
참알줄! 참을 아는 줄이요, 속알을 꿰는 줄이며, 참길을 바르게 잡는 줄이다. 우리가 고전을 읽고, 경전을 공부하는 이유는 지식을 쌓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내 삶의 베틀이 헐거워지지 않았는지, 나의 날줄이 팽팽하게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지 점검하기 위함이다. 다석 류영모가 평생을 하루 한 끼 먹으며, 잣나무 널빤지 위에서 잠을 자고, 끊임없이 사색했던 그 치열한 삶은, 바로 자신의 ‘줄’을 놓치지 않으려는 거룩한 몸부림이었다.
이제 우리는 다석이 건네는 이 ‘줄’을 잡아야 한다. 세상이 아무리 요동쳐도 끊어지지 않는 참된 생명의 줄, ‘참알줄’을 잡고, 오늘이라는 씨줄을 부지런히 엮어 나가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는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로, 거짓이 아닌 참으로, 죽음이 아닌 영원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
자, 이제 준비가 되었는가? 다석이라는 대장장이이자 길잡이가 마련해 둔 ‘늙은이(老子)’의 마당으로, 그 팽팽한 줄을 잡고 함께 들어서 보자.
그림4) 다석 류영모(오른쪽)와 함석헌(왼쪽)이다. 다석사상은 인류세의 시대에 부조리한 현실을 바로잡는 매우 실천적인 철학이랄 수 있다. 함석헌이 이미 그런 현실에서의 실천을 보여준 제자였다.
5. 뜻글로서의 한글, 소리마다 우주의 숨결이 깃들다
다석 류영모가 노자의 『도덕경』을 우리말로 옮기며 ‘참알줄’이라 이름 붙인 것은, 단순히 한자를 읽기 쉬운 한글로 바꾼 번역 작업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말 한글이 품고 있는 깊고 오묘한 철학적 뿌리를 캐내어, 그 위에 노자의 사상을 접목시킨 거대한 사상적 모험이었다.
흔히 한글을 소리 나는 대로 적는 ‘소리글자(표음문자)’라고 배운다. 하지만 다석에게 한글은 단순한 소리 기호가 아니었다. 그는 한글이 소리를 담는 그릇인 동시에, 우주의 이치와 생명의 원리를 품고 있는 ‘뜻글(표의문자)’임을 꿰뚫어 보았다. 다석은 우리말의 바른소리(正音)를 알아야 참뜻의 오묘한 깊이에 가 닿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한글 속에 어떤 우주가 숨어 있다는 말인가?
‘닿소리(자음)’를 보자. 훈민정음은 사람의 발음 기관을 본떠 다섯 개의 기본 자음 ‘ㄱ, ㄴ, ㅁ, ㅅ, ㅇ’을 만들었다. 다석은 이 다섯 소리가 동양 철학의 근간인 오행(五行)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보았다.
(나무, 木): 어금닛소리로, 봄에 해당하며 만물이 싹트는 기운이다.
(불, 火): 혓소리로, 여름에 해당하며 날카롭게 움직이는 불의 기운이다.
(흙, 土): 입술소리로, 늦여름에 해당하며 모나지만 합해지는 흙의 기운이다.
(쇠, 金): 잇소리로, 가을에 해당하며 단단하여 끊는 쇠의 기운이다.
(물, 水): 목구멍소리로, 겨울에 해당하며 깊숙한 곳을 적시는 물의 기운이다.
, 사람이 입을 열어 소리를 내는 행위 자체가 오행의 순환, 곧 우주의 운행과 하나가 되는 일인 것이다. [cite_start]또한 이 글자들의 모양에는 원방각(圓方角)의 이치가 서려 있으니, 동그라미(○)는 사람의 머리를, 네모(□)는 몸통을, 세모(△)는 손발을 상징하며, 이는 곧 만물이 싹트고(각), 잎이 넓어지고(방), 열매 맺는(원) 생명의 과정을 보여준다.
‘홀소리(모음)’를 보자. 글의 모음은 하늘, 땅, 사람을 본뜬 천지인(天地人), 즉 ‘․(하늘아)’, ‘ㅡ(으)’, ‘ㅣ(이)’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글자는 이 세 홀소리의 조화로 만들어진다. 여기서 다석은 음양(陰陽)의 이치를 읽어낸다. ‘ㅗ, ㅏ’와 같이 ‘ㆍ’가 위나 바깥에 찍히면 하늘에 속한 양(陽)의 소리가 되고, ‘ㅜ, ㅓ’와 같이 아래나 안쪽에 찍히면 땅에 속한 음(陰)의 소리가 된다.
이처럼 한글은 닿소리와 홀소리가 어우러져 오행과 음양, 천지인의 조화를 완벽하게 구현해낸다. 그러므로 우리말로 철학을 한다는 것은, 남의 사상을 빌려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핏속에 흐르는 우주의 원리를 우리말의 그릇에 담아내는 가장 주체적인 사유 행위다.
‘도(道)’를 ‘길’로 풀이한 것도 이러한 ‘뜻글’로서의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앞서 살펴보았듯, ‘길’이라는 글자를 파자해 보면 ‘ㄱ(하늘이 땅으로 내려옴)’, ‘ㅣ(사람이 서 있음)’, ‘ㄹ(끊임없이 흐름)’이라는 심오한 뜻이 드러난다. 이것은 한자 ‘도(道)’가 주지 못하는, 우리 민족 고유의 생동하는 철학적 이미지다.
이제 우리는 다석의 눈을 빌려 한글을 다시 보아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의사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다. 소리 하나하나에 하늘의 뜻과 땅의 생명, 사람의 도리가 사무쳐 있는 거룩한 ‘말씀’이다. 다석 류영모가 노자의 『도덕경』을 한글로 풀어내며 ‘참알줄’이라 명명한 것은, 바로 이 우리말의 위대한 힘을 빌려 고전의 죽은 껍질을 벗기고 그 안에 숨 쉬는 ‘참(眞’)을 생생하게 되살려내기 위함이었다.
한글은 소리글자이면서 동시에 뜻글자다. 아니, 소리가 곧 뜻이 되고, 뜻이 곧 우주가 되는 신비한 문자다. 이 ‘뜻글’의 바다에 배를 띄우고, 다석이라는 늙은 사공과 함께 ‘참’을 찾아 떠나는 여행,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펼치고 있는 「늙은이(老子)」 읽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