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후스, 면죄부 불태운 죄로 화형 당한 체코 사제 [사회혁신] 거위가 불태워지니 백조가 날았다
얀 후스(Jan Hus, 1369년 경~1415년). 체코어로 후스 (Hus)는 거위라는 뜻이다. 그러니 그의 이름을 직역하면 거위 얀 이다. 이 거위, 만만치 않았다. 황제의 약속 한 장을 믿고 심판대에 나타났다가 화형에 처해졌는데, 불에 타 죽으면서도 이런 예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당신들은 지금 거위를 굽고 있지만, 백 년 뒤에는 백조가 날아올 것이오. 그 백조는 당신들이 결코 구울 수 없을 것이오.
정확히 102년 뒤인 1517년,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년~1546년)가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95개 조 반박문을 못으로 박았다. 루터 본인도 후스를 읽고는 우리는 모두 후스주의자였다 고 고백했다. 거위 한 마리가 유럽 전체를 뒤흔든 것이다.
얀 후스, 니콜라스 루스너의 목판화(위키피디아)
보헤미아의 가난한 집 아들, 프라하대학 총장이 되다
후스는 지금의 체코 남부 후시네츠(Husinec) 출신으로, 마을 이름에서 성을 따왔다. 가난한 집 자식이었지만 공부 하나로 버텨 1394년 프라하 대학에서 석사를 마치고, 1401년에는 철학부 학장, 1402년에는 베들레헴 예배당 설교자가 됐으며, 1409년에는 총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런데 이 베들레헴 예배당이 예사로운 곳이 아니었다. 예배를 라틴어가 아닌 체코어로 드리겠다는 원칙 하나로 세워진 곳이었다. 당시 유럽에서 예배는 오직 라틴어로만 해야 했고, 보통 사람들은 사실상 무슨 말인지 모른 채 앉아 있었다. 후스는 이 구조 자체가 사기라고 봤다. 민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 주일에 설교를 두 번 했는데, 3000명이 몰려들었다.
여기서 그에게 결정적 영향을 준 인물이 등장한다. 영국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8년경~1384년)였다. 위클리프는 성경을 처음으로 영어로 옮긴 사람이자, 교황제도와 교회재산을 정면 비판한 신학자였다. 그의 제자 프라하의 예로님(Jerome of Prague, 1379~1416년)이 위클리프의 글을 보헤미아로 들여오면서 후스에게 불이 붙었다. 멘토와 제자 사이 한 권의 책이 역사를 바꿨다.
존 위클리프 초상화(위키피디아)
면죄부, 돈으로 천국을 사던 시절
후스가 살던 시절 유럽 교회는 말 그대로 부패의 박람회장이었다. 성직 매매는 공공연한 관행이었고, 보헤미아 땅 절반을 성직자들이 소유하고 있었다. 결정타는 면죄부였다. 돈을 내면 죄가 사해진다는 것이었는데, 심지어 돈을 내면 이미 죽은 가족의 죄도 사해준다며 팔았다. 요즘 말로 하면 사후 케어 서비스 쯤 되겠다.
1412년, 교황 요한 23세(John XXIII, ?~1419년)가 전쟁 자금을 마련하겠다며 보헤미아에서도 면죄부를 팔기로 했다. 보헤미아 왕 바츨라프(Wenceslas, 1361~1419년)는 수입을 나눠 받는 조건으로 이에 동의했다. 후스는 이 면죄부 문서를 공개적으로 불태웠다.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이 도장 찍은 시행령을 광장에서 불 지른 것이다. 당연히 왕의 지지를 잃었고, 파문을 당했다.
후스는 쫓겨나 지방을 떠돌면서도 글을 멈추지 않았다. 이 시기에 그는 『교회론(De Ecclesia)』을 썼다. 교회의 우두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내용이었다. 당시로선 엄청난 선언이었다.
16세기 독일. 얀 후스 탄생 100주년 기념 메달(위키피디아)
황제의 약속, 그리고 화형대
1414년, 콘스탄츠 공의회(Council of Constance, 1414~1418년)가 열렸다. 종교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명분이었다. 황제 지기스문트(Sigismund, 1368~1437년)는 후스에게 안전하게 왕복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는 안전통행증 을 발급해줬다. 후스는 이 약속을 믿고 콘스탄츠로 향했다.
결과는 체포였다. 공의회는 후스에게 자신의 주장을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후스는 성경에 근거해 자신이 틀렸음을 누가 증명해준다면 물러서겠다고 했다.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래도 무조건 취소하라고 했다. 논리가 아닌 복종을 요구한 것이다.
1415년 7월 6일, 후스는 이단으로 선고되어 화형에 처해졌다. 황제는 이단자에게는 안전통행증이 적용되지 않는다 고 말했다. 안전통행증의 효력은 황제가 마음먹기에 달려 있었다. 후스를 변호하러 콘스탄츠에 갔던 예로님도 이듬해 5월 30일 같은 장소에서 화형을 당했다.
얀 후스의 설교, 체코 필사본 삽화, 1490년대(위키피디아)
불꽃이 꺼지자 전쟁이 시작됐다
후스의 처형 소식이 보헤미아에 전해지자 민중은 분노했다. 1419년 7월 30일, 프라하에서 후스 추종자들이 시청 창문 밖으로 가톨릭 관리들을 내던졌다. 이른바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 이다. 유럽 역사에서 창문 밖으로 던지다 는 표현이 정치적 분노의 상징이 된 것은 이때부터다.
이후 보헤미아는 18년간 후스파 전쟁(1419년~1434년 무렵)을 치렀다. 교황청이 다섯 차례나 십자군을 보냈지만 후스파는 이를 모두 물리쳤다. 결국 1433년 바젤협약을 통해 후스파는 종교의 자유를 부분적으로 인정받았다. 거위 한 마리가 황제와 교황을 상대로 이긴 것이다.
후스의 유산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체코 언어를 통일하고 철자법을 정비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민족어로 성경을 설교하고 글을 쓴 것이 체코어 발전의 디딤돌이 됐다. 체코에서는 그의 순교일인 7월 6일이 오늘날에도 공휴일이다.
얀 후스가 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한 모습. 19세기 화가 카를 프리드리히 레싱의 작품(위키피디아)
한국에서 읽는 얀 후스, 재영 동포의 시선
영국에 살다 보면 이따금 체코출신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에게 얀 후스를 꺼내면 눈빛이 달라진다. 그는 단순한 종교인물이 아니라 민족과 언어와 정의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영국인들에게는 1215년 마그나 카르타가 그런 역할을 하듯이. 한국 현대사와 비교해 보면 섬뜩한 유사성이 보인다.
후스에게 안전통행증을 써준 황제 지기스문트는, 자신이 약속을 어겼을 때 이런 논리를 댔다.
이단자에게는 약속을 지킬 의무가 없다.
권력자가 스스로 예외를 만들어 법망을 빠져나가는 구조다. 한국에서도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 당시, 윤석열은 헌법에 명백히 반하는 행위를 하면서 국가 비상사태 라는 이름의 자의적 예외를 내세웠던 것을 우리는 목격했다.
면죄부를 팔던 교회권력과, 검찰권과 사법권을 사유화하듯 운영해 온 윤석열 정권의 권력 구조는 본질에서 닮았다. 돈과 연줄로 죄가 사해지고, 죄가 없어도 권력의 눈밖에 나면 처벌받는 구조. 후스는 이것을 성경(법)에 근거하지 않은 권위는 권위가 아니다 라고 맞섰다.
그리고 무엇보다, 후스의 이야기는 혼자 옳다고 해서 살아남지 못한다 는 냉혹한 진실도 가르쳐준다. 그는 논리적으로 이겼지만 조직적으로 졌다. 불꽃이 살아 있으려면 혼자인 시대에도 불씨를 이어받을 공동체가 필요했다. 위클리프에서 후스로, 후스에서 루터로 이어진 계보가 있었기에 개혁은 결국 살아남았다.
한국의 개혁적 지식인들, 시민사회, 진보언론이 지금 각자의 방에서 옳은 말을 홀로 옹알거리는 데 그치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종교 개혁가 얀 후스가 처형된 콘스탄츠의 기념비 (1862년).(위키피디아)
화형대의 재는 씨앗이 됐다
얀 후스는 죽었다. 그러나 후스가 죽은 방식이 후스파를 만들었고, 후스파가 루터를 길렀고, 루터가 근대유럽을 열었다. 권력이 진실을 불태울 수는 있지만, 재가 된 진실은 더 넓게 퍼진다.
체코의 시인이자 대통령이었던 바츨라프 하벨(Václav Havel, 1936~2011년)은 이렇게 말했다.
진실과 사랑은 반드시 거짓과 증오를 이긴다.
그 말의 뿌리에 후스가 있다. 거위 한 마리가 유럽을 바꿨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몇 마리의 거위인지, 아니면 불꽃 앞에서 도망가지 않는 용기인지, 우리 각자 스스로가 판단할 일이다. 분명한 것은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에 있는 얀 후스 기념비는 1915년에 건립되었다.(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