틱낫한 스님의 평화운동과 걷기철학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틱낫한 스님이 2022년 1월 21일 향년 96세로 열반에 드셨다.
1. 전쟁 한복판에서 피어난 ‘참여불교’의 길
20세기 중반의 베트남은 거대한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 놓여 있었다. 식민지 지배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분단과 전쟁이 이어졌고, 이념은 사람들을 갈라놓았다. 마을은 불탔고, 논과 강은 피로 물들었으며, 가족은 서로 다른 편에 서야 했다. 이러한 격랑의 시대 한복판에서 한 젊은 승려가 있었다. 그는 산사의 고요 속에 머무는 대신, 고통의 현장으로 걸어 나갔다. 그가 바로 틱낫한이었다.
그는 열여섯 살에 출가했다. 어린 나이에 불문에 들어선 그는 경전 공부와 참선 수행에 힘썼다. 그러나 수행이 깊어질수록 오히려 한 가지 물음이 커졌다. 나는 이 고통의 시대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 사찰 담장 밖에서는 폭격이 이어지고, 난민이 길 위에 넘쳐나는데, 수행자가 오직 개인의 깨달음만을 추구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물음이었다.
그는 불교가 세상과 분리될 수 없다고 보았다. 고통이 있는 곳에 수행이 있어야 하고, 절망이 있는 곳에 자비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참여불교(Engaged Buddhism)’라는 사상이었다. 이는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실천의 선언이었다. 불교는 현실 참여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수행자는 시대의 상처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베트남전이 격화되자 그는 젊은 승려와 학생들을 모아 ‘사회봉사청년학교’를 조직했다. 이들은 총 대신 삽을 들고, 증오 대신 연민을 품었다. 파괴된 마을을 재건하고, 난민을 돌보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생명을 살리는 일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이 활동을 통해 수행과 사회적 책임이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몸소 보여주었다.
플럼 빌리지 ‘붓다 홀’로 대규모 명상, 설법 등이 이루어지는 홀이다.
그의 평화운동은 어느 한 진영을 지지하는 정치적 행동이 아니었다. 그는 북과 남,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어느 편에도 서지 않았다. 대신 인간의 생명과 존엄이라는 더 근본적인 가치에 섰다. 그는 말했다. 폭력은 어느 편에서든 폭력이다.” 이 단호함은 많은 이들에게 불편함을 주었다. 양쪽 모두로부터 의심과 비난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진정한 평화는 편 가르기를 넘어선 자리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960년대 중반, 그는 미국을 방문해 전쟁 중단을 호소했다. 강연과 인터뷰를 통해 베트남 민중의 고통을 알렸고, 폭격을 멈출 것을 요청했다. 그의 메시지는 단순하면서도 깊었다. 적을 죽이는 것으로는 평화를 얻을 수 없다. 이해와 화해만이 길이다.” 그는 적을 악마화하지 않았다. 폭력의 구조를 비판했지만, 사람을 미워하지 않았다.
이러한 활동으로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망명은 그에게 개인적 상실이었으나, 동시에 세계를 향한 새로운 출발이기도 했다. 그는 프랑스 남부에 수행 공동체 플럼빌리지(Plum Village)를 세웠다. 이곳은 단순한 사찰이 아니라, 상처 입은 이들이 치유를 경험하는 공간이 되었다. 전쟁의 트라우마를 안고 온 이들, 삶의 방향을 잃은 젊은이들, 종교를 초월해 평화를 찾는 이들이 이곳에서 함께 호흡하고 걸었다.
그의 평화운동은 거창한 정치 전략이 아니라, 의식의 전환에서 출발했다. 그는 평화는 목적지가 아니라 길”이라고 했다. 이는 단순한 격언이 아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 분노를 정당화하는 태도를 거부하는 선언이다. 정의를 말하되 증오에 기대지 않고, 변화를 추구하되 폭력에 의존하지 않는 길. 그는 그 길을 ‘마음챙김’에서 찾았다.
2003년 한국을 처음 방문해 기자회견하는 틱낫한 스님.
마음챙김은 지금 이 순간을 또렷이 알아차리는 능력이다. 숨을 들이쉬며 ‘나는 숨 쉬고 있다’고 알고, 내쉬며 ‘나는 살아 있다’고 느끼는 일. 그 단순한 자각이 분노의 충동을 멈추고, 대화의 가능성을 연다. 그는 평화운동가이면서 동시에 수행자였다. 외부의 전쟁을 멈추기 위해 먼저 내부의 전쟁을 멈추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분노를 억압하지 않았다. 대신 그것을 돌보라고 했다. 분노는 이해받지 못한 고통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는 분노를 적으로 삼지 않고, 자비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것이 그의 평화운동이 지닌 독창성이다. 폭력에 맞서되 폭력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가능성을 증명했다.
그의 활동은 종교적 경계를 넘어섰다. 기독교인, 유대인, 무신론자까지 다양한 이들이 그의 강연을 들었다. 그는 특정 신앙의 우월성을 주장하지 않았다. 대신 인간 보편의 고통과 치유를 이야기했다. 그에게 평화는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였다. 숨 쉬는 모든 존재가 연결되어 있다는 통찰, 그 상호연결성이야말로 평화의 토대라고 보았다.
그의 평화운동은 또한 언어의 혁신을 동반했다. 그는 ‘상호존재(Interbeing)’라는 개념을 통해, 모든 존재가 서로 의존하며 함께 형성된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구름이 없으면 비가 없고, 비가 없으면 나무가 없으며, 나무가 없으면 종이도 없다. 우리가 손에 쥔 한 장의 종이 안에도 구름과 햇빛과 숲이 들어 있다는 통찰. 이러한 인식은 타자를 해치는 것이 곧 자신을 해치는 일임을 깨닫게 한다.
그는 집단 명상과 평화 행진을 통해 침묵의 힘을 보여주었다. 수백 명이 말없이 천천히 걷는 모습은 그 어떤 구호보다 강력한 메시지가 되었다. 고요 속에서 울리는 발걸음은 폭력의 소음을 잠재웠다. 그는 소리 높여 외치기보다, 깊이 숨 쉬고 천천히 걷는 방식을 택했다.
플럼 빌리지의 생활 속에 종은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로 모든 행동이 종소리에 반응하고 있다. 종소리가 들리면 하던 일을 멈추고 호흡을 생각한다, 흩어졌던 마음을 몇 번의 호흡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해준다.
그의 삶은 일관되게 한 방향을 향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는 평화였다. 그는 미래의 이상향을 약속하지 않았다. 대신 지금 이 자리에서 평화를 실천하라고 했다. 그 실천은 거창하지 않다. 누군가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일, 화가 날 때 한 번 더 숨을 쉬는 일, 걸음을 늦추는 일. 작은 실천이 모여 사회적 변화를 이룬다고 그는 믿었다.
오늘 우리는 다시 전쟁과 갈등의 시대를 살고 있다. 물리적 전쟁뿐 아니라, 혐오와 분열의 언어가 일상을 잠식한다. 이런 시대에 그의 평화운동은 낭만적 이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절실하다. 폭력의 논리가 익숙해질수록, 비폭력의 용기는 더 귀하다.
그는 생애 말년에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평화라면, 세상은 평화를 만날 것이다.” 이는 책임의 전가가 아니라, 가능성의 선언이다. 한 사람이 변하면 세상이 즉시 변하지는 않지만, 그 변화는 분명 파동처럼 퍼져 나간다. 그의 삶이 그 증거다. 전쟁의 시대에 그는 평화를 선택했다. 증오의 시대에 그는 이해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추상적 이상이 아니라, 매일의 수행으로 이어졌다. 그의 평화운동은 걷기철학과 맞닿아 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곧 평화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그의 첫 걸음을 되새긴다. 고요한 산사에서 세상의 한복판으로 걸어 나왔던 그 결단. 그 한 걸음이 오늘날 전 세계 수많은 이들의 삶을 바꾸었다. 평화는 거대한 전략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의식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그는 자신의 생애로 증명했다.
2. 한 걸음이 세계를 바꾼다, 걷기명상의 영성과 혁명성
그의 평화운동이 역사적 사건과 맞닿아 있었다면, 그의 걷기철학은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차원과 맞닿아 있다. 그는 총성이 멈춘 뒤에도 인간의 내면에서 계속되는 또 다른 전쟁을 보았다. 불안, 경쟁, 분노, 열등감, 비교와 집착. 그는 말한다. 전쟁은 밖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매일 반복된다고. 그러므로 평화 역시 외교적 합의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평화는 한 사람의 발걸음에서 시작된다.
플럼 빌리지 안내도
그는 걷기를 단순한 신체 활동으로 보지 않았다. 걷기는 하나의 선언이었다. 나는 서두르지 않겠다. 나는 지금 여기에 있겠다.” 현대 문명은 속도를 미덕으로 삼는다. 빨리 가는 사람을 유능하다고 평가하고, 더 많은 성과를 내는 이를 성공했다고 부른다. 그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도착해야 할 미래를 향해 달린다. 그러나 틱낫한은 묻는다. 그렇게 도착한 곳에서 우리는 과연 평화를 얻었는가.
그는 자주 말했다. 걷는 것은 도착하기 위함이 아니다. 걷는 그 자체가 이미 도착이다.” 이 말은 단순히 느리게 살자는 권유가 아니다. 존재론적 전환을 요청하는 선언이다. 우리는 늘 무엇이 되어야 하고, 어디에 이르러야 하며, 무엇을 성취해야 한다고 배운다. 그러나 그는 이미 존재하는 이 순간이 완전하다고 말한다. 걷는 순간, 우리는 살아 있다.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이라면, 그 걸음은 이미 충분하다.
프랑스 남부에 자리한 수행 공동체 Plum Village에서는 걷기가 일상의 중심이다. 이곳에서 수행자들은 말을 멈추고 천천히 걷는다. 발이 땅에 닿는 감각을 느끼고, 숨의 리듬을 따라 걸음을 맞춘다. 한 걸음에 한 호흡, 또 한 걸음에 또 한 호흡. 그들은 어딘가에 도달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저 지금의 걸음을 온전히 경험한다.
그는 이 걷기를 ‘평화의 발걸음’이라 불렀다. 우리가 분노 속에서 걷는다면 그 발걸음은 땅을 짓누른다. 그러나 깨어 있는 마음으로 걷는다면 땅을 어루만지게 된다. 발바닥의 감각을 알아차리는 순간, 우리는 지구와의 연결을 느낀다. 그 연결감이 깊어질수록 폭력은 힘을 잃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 이상 분리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 ‘상호존재(Interbeing)’의 통찰은 걷기명상에서 가장 분명히 드러난다. 한 걸음 안에는 햇빛이 있고, 비가 있고, 흙이 있고, 농부의 노동이 있다. 우리가 딛는 땅은 수많은 생명의 역사를 품고 있다. 그러므로 걷기는 단지 이동이 아니라, 존재의 그물망을 체험하는 일이다. 이 체험은 이념을 넘어선다. 그것은 직접적인 감각과 자각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는 도시에서도 걷기명상을 실천하라고 권했다. 시끄러운 거리에서도 가능하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의식이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순간, 버스를 타기 위해 줄 서 있는 순간, 우리는 이미 걷기명상을 시작할 수 있다. 발바닥을 느끼고, 숨을 알아차리는 그 짧은 멈춤이 삶의 방향을 바꾼다.
특히 그는 집단 걷기의 힘을 강조했다. 수백 명이 침묵 속에 천천히 걷는 장면은 하나의 거대한 기도와 같다. 구호를 외치지 않아도, 피켓을 들지 않아도, 그 고요는 깊은 울림을 낳는다. 그는 소리보다 침묵을 신뢰했다. 침묵 속에서 내딛는 걸음은 폭력의 언어를 무력화시키는 힘을 지닌다.
걷기철학은 또한 시간에 대한 그의 통찰과 맞닿아 있다. 우리는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걱정하느라 현재를 놓친다. 그는 현재만이 우리가 실제로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라고 보았다. 과거는 기억 속에 있고, 미래는 상상 속에 있다. 그러나 현재는 발바닥 아래 있다. 지금 이 순간의 감각을 놓치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살아 있다.
그는 아이들과 함께 걷는 것을 좋아했다. 아이는 본래 목적 없이 걷는다. 꽃을 보면 멈추고, 바람을 느끼면 웃는다. 어른은 그 감각을 잃어버린 채 결과를 향해 직선으로 나아간다. 그는 수행을 통해 그 잃어버린 감각을 회복하자고 했다. 걷기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순수성을 되찾는 과정이다.
틱 낫한 스님이 명상 공동체의 도반들과 함께 걷기 명상을 하고 있다.
그의 걷기명상은 심리적 치유의 차원에서도 깊은 의미를 지닌다.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에게 그는 복잡한 설명 대신 호흡과 걸음을 제안했다. 몸의 감각으로 돌아오는 일은 과도한 생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는 길이 된다. 천천히 걷는 동안 우리는 자신을 다시 안전한 자리로 데려올 수 있다. 이 단순한 행위가 깊은 치유의 시작이 된다.
그는 걷기를 통해 분노를 다루는 법을 가르쳤다. 화가 치밀 때 우리는 보통 더 빠르게 움직이거나, 더 강한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그는 멈추어 걷기를 제안했다. 분노를 억누르지 말고, 그것을 안고 천천히 걸으라고 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분노를 돌보는 손길이 된다. 그렇게 분노는 파괴적 에너지가 아니라 이해의 에너지로 변모한다.
그의 걷기철학은 경제적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 대한 조용한 저항이기도 하다. 모두가 빨리 가야 한다고 말할 때, 그는 천천히 가도 된다고 말한다. 모두가 더 가져야 한다고 말할 때, 그는 지금의 숨결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이 메시지는 체제 비판적이면서도 비폭력적이다. 그는 소리치지 않지만, 그 침묵은 강력하다.
걷기는 또한 관계를 회복하는 행위다. 함께 걷는 사람들은 자연스레 호흡을 맞춘다. 말이 없어도 연결된다. 그는 가족과 공동체가 함께 걷기를 권했다. 갈등이 있을 때 토론을 시작하기 전에 함께 걷자고 했다. 걷는 동안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말의 톤이 달라진다. 그 변화가 대화를 가능하게 만든다.
그의 가르침은 단순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한 걸음을 의식적으로 내딛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걷는다. 목적에 매달린 채, 다른 생각에 잠긴 채 움직인다. 그러나 깨어 있는 걸음은 훈련을 요구한다. 그는 이 훈련을 ‘기쁨의 수행’이라 불렀다. 억지로 하는 의무가 아니라, 살아 있음에 대한 감사에서 비롯된 행위이기 때문이다.
틱 낫한 스님이 플럼 빌리지를 찾아온 어린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결국 그의 걷기철학은 존재의 존엄을 회복하는 길이다. 누구도 서두르지 않아도 되고, 누구도 비교하지 않아도 된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이미 완전하다. 우리는 그 걸음 안에서 자신을 만나고, 타자를 만나며, 세계를 만난다. 그는 말했다. 당신이 평화롭게 걷는다면, 당신은 이미 세상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과장이 아니다. 세상은 수많은 개인의 걸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걸음이 조급함과 분노로 채워질 때 사회는 거칠어진다. 그러나 그 걸음이 자각과 자비로 채워질 때 사회는 부드러워진다.
그의 걷기철학은 거대한 혁명을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조용한 혁명을 제안한다. 한 사람의 속도가 바뀌고, 한 사람의 호흡이 달라질 때, 그 파장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번져간다. 그는 그 가능성을 신뢰했다. 우리는 여전히 빠른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그가 남긴 발걸음은 다른 리듬을 제시한다. 숨을 들이쉬고, 한 걸음 내딛고, 다시 숨을 내쉬는 그 단순한 리듬. 그 리듬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평화를 체험한다.
그의 걷기철학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리고 왜 그렇게 서두르는가.”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이미 새로운 길 위에 서 있다. 그 길은 멀리 있지 않다. 지금 이 자리, 우리의 발밑에서 시작된다.
3. 상처 입은 시대를 위한 마지막 가르침
그의 삶은 한 시대의 비극을 통과한 영혼의 기록이었다. 전쟁과 망명, 오해와 비난을 겪으면서도 그는 끝내 부드러운 목소리를 잃지 않았다. 그것은 타협이 아니라 선택이었다. 그는 강한 사람이었기에 부드러울 수 있었다. 분노를 이해했기에 증오에 기대지 않았고, 절망을 알았기에 희망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의 평화운동과 걷기철학은 바로 이 태도에서 출발한다.
플럼빌리지 숲길
우리는 흔히 평화를 거대한 정치적 합의나 국제 조약의 결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는 평화를 ‘관계의 방식’이라고 보았다. 내가 나 자신을 대하는 방식, 타인을 대하는 방식, 자연을 대하는 방식이 곧 평화의 토대라는 것이다. 외부의 갈등은 내부의 분열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세상을 바꾸는 일은 마음을 돌보는 일과 분리될 수 없다.
그는 생애 후반, Plum Village에서 수많은 이들을 맞이했다. 전쟁 참전 군인, 난민, 기업인, 교사, 종교인, 청년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찾았다. 그들은 각자의 상처를 안고 왔다. 그는 복잡한 이론 대신 간단한 제안을 건넸다. 숨을 쉬십시오. 그리고 걸으십시오.”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깊은 철학이 담겨 있었다.
그가 말한 호흡은 도피가 아니다. 현실을 외면하기 위한 명상이 아니라, 현실을 온전히 마주하기 위한 준비다. 숨을 알아차리는 순간 우리는 자동 반응에서 벗어난다. 화가 날 때 즉각적으로 공격하거나 방어하지 않고, 한 박자 멈출 수 있다. 그 멈춤이야말로 평화의 시작이다. 그는 이 멈춤을 ‘자유의 공간’이라 불렀다.
오늘의 사회는 멈추지 못하는 사회다. 속도는 경쟁력이 되었고, 자극은 일상이 되었다. 뉴스는 끊임없이 분노를 자극하고, 온라인 공간은 대립을 증폭시킨다. 우리는 생각보다 쉽게 상처 주고, 또 쉽게 상처받는다. 이 시대에 그의 걷기철학은 시대착오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가장 절실한 때인지 모른다.
그는 말했다. 당신이 평화라면, 세상은 평화를 만날 것이다.” 이는 이상주의적 문장이 아니라 책임의 선언이다. 우리는 흔히 세상이 바뀌어야 내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순서를 바꾸었다. 내가 달라질 때 세상은 이미 변화를 시작한다고. 물론 한 사람의 변화가 즉각적으로 제도를 바꾸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 변화는 관계를 바꾸고, 관계는 공동체를 바꾸며, 공동체는 결국 역사를 바꾼다.
그의 상호존재 사상은 오늘의 생태 위기 속에서 더욱 빛난다. 기후 변화와 환경 파괴는 인간 중심적 사고의 결과다. 자연을 자원으로만 바라보는 태도는 결국 인간 자신을 위협한다. 그는 걷기를 통해 땅과의 관계를 회복하라고 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감사의 마음을 품으라고 했다. 우리가 딛는 땅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생명의 터전임을 느낄 때, 소비와 파괴의 방식도 달라질 수 있다.
또한 그의 가르침은 정치적 갈등의 시대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그는 어떤 진영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불의에 침묵하지도 않았다. 그는 폭력을 비판하면서도 사람을 적으로 만들지 않았다. 이 균형은 쉽지 않다. 우리는 종종 정의를 말하면서 증오를 키운다. 그러나 그는 정의와 자비를 함께 붙들었다. 자비 없는 정의는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그의 걷기철학은 관계 회복의 실천이기도 하다. 갈등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말로 해결하려 한다. 그러나 그는 때로는 말보다 함께 걷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침묵 속에서 나란히 걷다 보면, 마음의 긴장이 조금씩 풀린다. 숨이 고르고, 발걸음이 맞춰진다. 그때 비로소 진짜 대화가 가능해진다.
그는 아이들에게 특히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아이는 본래 현재에 산다. 그러나 어른들의 불안과 경쟁이 아이들에게도 전이된다. 그는 학교에서의 마음챙김 교육을 강조했다. 시험과 성적 중심의 교육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돌보고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교육. 이는 단순한 정서 교육이 아니라 평화 교육이다.
틱낫한 스님의 젊은 시절.
그의 마지막 세월은 병상과 수행의 반복 속에 있었다. 뇌출혈로 언어 능력을 잃은 이후에도 그는 공동체 안에서 존재 자체로 가르침이 되었다. 말이 줄어든 대신, 그의 미소와 침묵이 더 큰 메시지가 되었다. 그는 여전히 천천히 걸었고, 사람들은 그 뒤를 따랐다. 그의 발걸음은 여전히 수행이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다른 형태로 계속된다”고 말했다. 상호존재의 관점에서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변형이다. 구름이 비가 되고, 비가 강이 되듯이, 존재는 형태를 바꾸어 이어진다. 이러한 통찰은 상실의 아픔 속에서도 깊은 위로를 준다.
오늘 우리는 그의 부재를 말하지만, 동시에 그의 현존을 경험한다. 그의 책과 강연, 공동체와 제자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 한 사람이 평화롭게 걷는 순간, 그는 그 자리에 함께 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우리의 발걸음은 무엇을 전하는가. 조급함과 경쟁의 리듬인가, 아니면 자각과 자비의 리듬인가. 우리는 매일 수많은 선택을 한다. 그 선택의 축적이 곧 삶의 방향이 된다. 그는 거창한 영웅이 되라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한 걸음을 깨어 내딛으라고 했다. 평화는 추상적 이상이 아니다. 숨 쉬는 이 순간, 발을 딛는 이 자리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분노를 잠시 내려놓고 한 번 더 호흡할 때, 우리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을 때, 우리는 이미 그의 길 위에 서 있다.
그의 평화운동은 역사 속 사건으로 남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도 진행 중인 수행이다. 걷는 사람이 있는 한, 숨 쉬는 사람이 있는 한, 평화의 가능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제 길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더 빨리 갈 것인가, 아니면 더 깊이 걸을 것인가. 그의 가르침은 분명하다. 깊이 걷는 사람이 결국 멀리 간다. 그리고 그 깊은 걸음이 세상을 치유한다.
걷기에 도움이 되는 책
걷는 존재 애나벨 스트리츠 : 걷는 존재는 애나벨 스트리츠가 제안하는 52가지 걷기 실험을 통해, 우리가 잊고 지낸 몸의 감각과 마음의 균형을 회복하게 하는 책이다. 거창한 결심 대신 이번 주에는 이렇게 걸어보라”고 다정히 권하며, 과학적 연구와 자신의 체험을 곁들여 걷기의 힘을 설득력 있게 전한다. 빠름과 효율에 지친 시대에 이 책은 속도를 늦추고 땅을 딛는 감각을 되찾으라 말한다. 걷기는 운동이 아니라 삶을 다시 배우는 방식임을 일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