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할아버지 백범은 아이와 거지들의 친구 [사람들] 김구가 강직한 사람이라고 하니까 흔히 엄하고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생각하기 쉬울 것입니다. 180cm가 넘는 큰 키에 얼굴은 조금 얽었고, 광대뼈가 발달한 구릿빛 얼굴에 엄청난 고집불통이었으니까요. 어렸을 때 마마로 인해 하얀 종이에 먹물 한두 방울이 튄 듯 살짝 얽은 얼굴은 타인이 보는 인상에 실금을 그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임정 초기 경무국장 시절 그는 카이저수염을 길렀습니다. 당시 카이저수염은 근대 남성의 위엄과 강인함을 드러내는 유행 수염이었습니다. 상냥하기보다는 엄한 인상을 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김구는 단지 유행에 따라 카이저수염을 기른 것이 아닙니다. 임정의 치안 책임자였던 김구는 엄격하고 단단한 인상이 필요했습니다. 상해 일본 영사관에서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수괴’라며 제거 1호로 꼽았던 김구는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력한 존재여야만 했습니다. 밀정을 가려내야 했고, 임정의 질서를 세우고, 죽은 사람의 염습까지 궂은일을 도맡아야 했던 그로서는 호락호락한 인상을 줘서는 안 될 위치에 있었습니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으며 눈빛이 강했던 그는 카이저 수염까지 길러 강력한 권위를 구축했습니다. 당시 임정 젊은이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가까이 가기 어려웠다” 말을 함부로 못 걸었다”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임정의 기강을 잡아야 했던 김구는 엄하게 보이기 위해 카이저수염을 기르고 말을 아꼈다. 그러나 아이들은 먼저 알았다. 아이들이 백범을 ‘곰보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랐다는 사실은 그 어떤 훈장보다 정확한 그의 초상이다.
김구는 이렇게 ‘범접하기 어려운 남자’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재미있는 반전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위압감을 느꼈던 사람들이 밥을 챙겨주거나 집안 사정을 물어보는 김구를 보고는 처음에는 무서웠는데 알고 보니 따뜻했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런 반응은 특히 어린이들이 자주 보여줬습니다.
1924년 아내 최준례가 세상을 뜬 후 그의 노모가 손자들이라도 먹여 살리겠다고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 황해도로 돌아가 버린 이후 국무령인 김구는 혼자 살면서 굶주리는 나날을 보냈습니다. 쫄딱 굶은 김구가 오후에 동포들의 집을 방문하면 부인들이 반가워하며 밥을 차려줬습니다. 그가 얻어먹는 것을 부끄러워했다면 임정은 문을 닫았을 것입니다. 김구가 김의한·정정화 부부의 집에 찾아가면 정정화가 잘 오셨다”며 음식을 만들기 위해 후동(훗날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이를 맡기고 시장을 보러 갔습니다. 후동이는 낯을 가려 다른 사람에게는 잘 가지 않았는데, 백범이 봐주면 그렇게 잘 놀았다고 정정화는 회고록 『장강일기』에 썼습니다.
아이들에게 김구는 ‘곰보 할아버지’이거나 ‘호랑이 할아버지’로 통했습니다. 김구가 정말 무서운 사람이라면 아이들이 그런 별명을 붙이지 못했을 겁니다. 김구가 윤봉길 의거 직후 상해를 탈출하기 전 미국인 피치(George A. Fitch) 목사의 저택에서 숨어 살 때는 피치의 아들 로버트가 매일 2층에 올라와 김구와 놀았습니다. 김구가 상해를 빠져나와 가흥(嘉興 자싱)에서 숨어 살 때도 소학교 1년생이던 진국침이 매일 김구 곁에 머물며 심부름을 해주거나 시내에 나가 신문을 사다 주었습니다.
일제의 공습을 피해 임정 대가족을 이끌고 남경(南京 난징)에서 중경(重慶 충칭)까지 옮겨가는 약 3년간의 대장정 기간에 김구가 보인 어린이들에 대한 정성은 진합니다. 공책에 대가족의 이름과 건강 상태를 낱낱이 기록했으며, 대가족의 어린이를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여성 광복군 김효숙은 김구는 아이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고 회고했습니다. 머리를 쓰다듬고, 볼을 만지고, 이름을 물으며 ‘요놈, 요놈’하며 귀여워했는데, 호랑이 할아버지의 손아귀 힘이 너무 세서 아이들이 어휴, 또 오신다!”하며 달아나곤 했다는 것입니다.
해방 후 임정 요인들이 환국한 이후에는 날마다 주변의 아이들이 경교장에 와서 놀았습니다. 아이들이 담을 넘어와 들어오니까 관리인들이 아이들을 내쫓곤 했습니다. 그 사실을 안 김구는 어느 날 아이들을 집무실로 불러들였습니다.
다음부터는 담을 넘지 말고 정문으로 들어와 놀아라.”
김구는 아이들에게 붓글씨로 ‘幸福(행복)’이라고 써 주며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컸을 때는 우리나라가 행복한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김구는 1948년 겨울 금호동 600여 호 이재민 자녀들을 위해 백범학원을, 염리동 천막촌에는 돈이 없어 학교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창암공민학교를 세웠다. 그가 세상을 떴을 때 가진 돈은 무일푼이었다. 백범학원 개원 기념식 사진.
경교장 바로 옆집에 살던 오경자씨는 백범 선생이 아이들과 잘 어울렸고, 간식도 나누어 주고, 동네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냈다”고 회고했습니다. 오씨는 백범이 주민들과 함께 동양극장으로 영화를 보러 간 적도 있다”고 기억했습니다. 백범은 어머니·아내의 묘를 이장할 때 들어온 돈과 아들 결혼식 축의금을 모아 1948년 말 이재민 자녀들을 위해 금호동에 백범학원을, 염리동 천막촌에는 창암공민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다음 해 6월 백범학원에서는 운동회가 열렸습니다. 운동회를 마치고 4학년 아이 한우삼이 이런 글을 썼습니다.
우리 4학년 운동 종목은 사람 찾기인데, 나는 이성오 선생님과 뛰어 1등을 했습니다. 우리 반 정순미는 김구 할아버지를 모시고 뛰게 되었는데, 할아버지가 숨이 차 못 뛰겠다고 하셔서 순미는 그 자리에서 울었습니다.”
백범이 저격당해 10일장 치르던 1949년 6월 26일~7월 5일까지 경교장에는 눈물로 눈동자가 빨갛게 된 소학생들이 몇 명씩 짝을 이루어 연일 찾아왔습니다. 김구는 귀한 과일이나 케이크, 과자 등의 선물이 들어오면 아껴두었다가 동네 아이들을 불러 직접 나누어 주곤 했습니다.
상가에 찾아온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백범의 너그러운 모습이 깊이 들어 있었습니다. 서거 다음날 언론들은 양정중학, 여자상업 등 남녀 중등학생들과 함께 국민학교(초등학교) 아동들이 단체로 빈소를 찾았다”고 보도했습니다. 아이들은 순서가 되면 통곡 소리로 가득 찬 경교장 2층 영안실로 줄지어 올라가 고인의 영정 앞에 엎드려 조문했습니다. 당시 언론은 눈물바다가 된 서대문, 남녀노소와 유무식을 막론하고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다. 어린 국민학생들이 고인의 영정 앞에서 목을 놓아 울어 현장에 있던 어른들의 심금을 울렸다”고 기록했습니다.(『서울신문』 1948년 6월 28일)
1949년 6월 26일 백범이 저격당한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이 조문을 드리기 위해 경교장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서울 인구는 140만이었는데, 조문온 사람은 124만 명이었다.
몰려오는 조문객 중에서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걸인들이었습니다. 조문 첫날엔 신당동 해방촌에서 걸인 세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집도 먹을 것도 없이 해진 옷을 입은 그들은 구멍 난 옷을 두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경교장 안뜰로 들어섰습니다. 그들이 조문을 마치고 돌아간 후 걸인들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계속 밀려들었습니다. 1898년 인천감리서를 탈옥한 청년 김창수(김구의 본명)는 삼남 지방을 유랑할 때, 실제로 패랭이를 쓰고 거지들과 어울려 걸식하며 밑바닥 삶을 체험했습니다. 빈소에 걸인들이 많이 찾아오는 것을 보는 정객들은 처음에는 기이하게 여겼으나, 마침내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언론인 엄도해 씨는 백범이 헐벗은 동족을 위하여 고문을 당하고, 투옥도 당하였고 저격도 받고, 굶기까지 하였다는 것은 세계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걸인까지도 사랑하고 구하려고 하였다는 것은 걸인들이나 아는 사실”이라고 썼습니다. 그러면서 엄씨는 러시아 시인 투르게네프의 시 「걸인」을 인용했습니다. (『자유신문』 6월 29일)
그는 빨갛게 부푼 더러운 손을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있는 주머니를 다 뒤졌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주저주저하다가 그의 떨리는 손을 꼭 쥐고 ‘용서하시오 형제여!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소.’라고 말했다. 그러자 걸인은 그 부은 손으로 나의 손을 꼭 쥐었다. 그이는 입속말로 중얼거리며 ‘선생님, 이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이것도 역시 적선이니까요.’라고 하였다. 나는 그 형제에게서 도움을 받는 것이었다.”
백범은 이 시처럼 같은 동족이요, 형제인 걸인들에게 단 한 푼이라도 쥐어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느 모퉁이에서 어떤 거지가 구걸하는지 다 알고 있었습니다. 해방 후 정객들은 연단에 서거나 좌담회 자리에 앉으면 누구나 삼천만 동포여!”를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백범 빈소에 찾아오는 걸인들을 보면서 자신들이 부르짖는 ‘삼천만 동포’ 가운데 걸인들은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자신들이 피해왔던 걸인들의 마음속에는 백범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정의는 진정한 마음에서 오가는 수단이지만, 여러 수단 중에서도 최상급의 솔직한 수단입니다. 정의는 아무렇게나 자의적으로 사용하는 용어가 아닙니다. 정의는 우직하며 고지식합니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백범은 고지식한 사람입니다. 남이 자신을 이렇게 부르거나 저렇게 부르거나 일관되게 충직하였습니다. 동료에 대한 신의는 결백하였고, 자주독립과 통일에 대한 신념은 목숨을 다하도록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가 신성모 국방장관을 비롯해 행동대원 안두희 일당에게 저격당해 세상을 뜨는 원인이 되었지만, ‘쓰는 사람이거든 의심치 말라’는 신의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백범의 서거 소식을 듣고 여학생을 데리고 문상 온 한 중년 여인은 분해서 못 견디겠다” 분해서 못 견디겠다”고 연거푸 소리치며 흐느껴 울었다는 기사가 마음에 와닿습니다. 왜 이런 지도자를 죽이나요? 참 분하지 않은가요?
임순만 언론인 hnanj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