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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독재자에 대한 신의 로 사법부의 시녀화 완성하다

독재자에 대한 신의 로 사법부의 시녀화 완성하다
[뉴스]
제2차 사법파동의 주역이 남긴 사법 독립의 잔혹사 2026년 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2권을 펼쳤다. 한 인물의 이름 앞에서 손이 멈추었다. 대한민국 사법 역사상 가장 굴욕적이고 철저한 ‘사법부의 시녀화’를 완성했던 장본인, 바로 제8대 대법원장 유태흥(兪泰興, 1919~2005)이다. 유태흥이 독재자 전두환(1931~2021)에게 가졌던 기이한 충성심의 실체와 자기기만의 논리, 그리고 그가 사법부에 남긴 ‘권력의 마당쇠 체제’가 어떻게 세포 분열을 거듭하여 오늘날 우리의 민주주의와 일상을 소리 없이 위협하고 있는지 파헤쳐 보자.   유태흥(나무위키) ‘신의’라는 이름의 맹목적 충성, 대법원장 자리를 낚아채다 유태흥은 1919년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 일본 간사이대학 전문부 법학과를 졸업한 그는 1948년 제2회 조선해방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며 본격적인 법조인의 길로 들어섰다. 대전지방법원 판사를 시작으로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서울지방법원장 등 요직을 거치며 사법부 내에서 탄탄대로를 달린, 이른바 ‘정통 엘리트 법관’의 표본이었다. 만약 그가 법관의 양심을 지키며 평범하게 은퇴했다면 사법부의 든든한 어른으로 기억되었을지도 모른다. 유태흥의 인생이 헌법파괴의 역사와 본격적으로 얽히며 비극의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은, 1980년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가 총칼을 앞세워 권력을 찬탈하면서였다. 1981년 대법원 판사로 재직 중이던 유태흥은 전두환의 무소불위 권력 앞에서 눈치를 보며 정권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판결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시위학생들을 엄벌하고, 독재정권의 통치행위를 법의 이름으로 정당화해주 그의 아부는 전두환의 마음에 쏙 들 수 밖에 없었다. 당시 권력층에서는 그를 두고 한번 주인을 정하면 절대 한눈 팔지 않는 신의의 법관”이라는 기이한 찬사가 돌았다. 법관이 지켜야 할 최고의 가치가 ‘헌법과 양심’이 아니라, 독재자에 대한 ‘조폭식 신의’로 둔갑해버린 서글픈 순간이었다. 유태흥의 이 눈물겨운 충성심에 감복한 전두환은 마침내 파격적인 보상을 단행한다. 임기가 엄연히 남아 있던 전임 대법원장을 강제로 주저앉히고, 1981년 4월 유태흥을 제8대 대법원장 자리에 앉힌 것이다. 삼권분립의 한 축이자 사법부의 수장이, 국가와 국민이 아닌 독재자와의 사적 친밀함과 충성도를 기준으로 임명되었다. 헌법이 그토록 피 흘려 보장하고자 했던 사법부의 독립은, 전두환이 던져준 대법원장 임명장과 가볍게 맞바꿔졌다. 이때부터 유태흥의 사법부는 권력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일하는 ‘자발적 마당쇠’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유태흥 대법원장과 진의종 국무총리가 악수를 나누고 있는 모습. 뒤로 전두환 사진이 보인다. ⓒ국가기록원  판사들의 입을 막아라, 제2차 사법파동 대법원장이라는 권력의 정점에 오른 유태흥의 진면목은 정권에 저항하는 소신 있는 젊은 판사들을 찍어 누르고 길들이는 과정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주인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제 살을 깎아내고 후배법관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의 가장 악명 높은 반헌법적 행위는 결국 1985년 대한민국 사법역사를 뒤흔든 ‘제2차 사법파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당시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에 근무하던 박시환(1953~ ) 판사는 시국사건으로 잡혀 온 학생들에게 잇따라 구속영장을 기각하거나 공정한 판결을 내리며 정권의 눈 밖에 단단히 나 있었다. 안기부와 치안본부가 용공 분자들을 왜 풀어주느냐 며 씩씩거릴 때, 사법부의 수장이라면 마땅히 외풍을 막아주고 후배 판사의 소신을 지켜주었어야 했다. 그러나 유태흥 대법원장의 선택은 정반대였다. 그는 대법원장이 가진 법관 인사권을 휘둘러 박시환 판사를 지방으로 좌천시키는 전보 발령을 전격 단행했다. 이는 대놓고 전체 판사들을 향해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 판결을 내리면 너희들의 법관 수명도 끝장날 것 이라는 서늘한 경고를 보낸 것이었다.  사법부 수장이 법관의 독립을 보호하는 방패가 되기는커녕, 독재정권의 행동대장이 되어 후배법관들의 목을 치는 칼춤을 추자 젊은 판사들을 중심으로 거센 저항의 불길이 일어났다. 서울지법 판사들이 연판장을 돌리며 법원 지휘부의 굴종을 성토했고, 집단 사표를 제출하는 등 사법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야당과 법조계의 분노도 극에 달해, 국회에서는 유태흥 대법원장에 대한 탄핵소추안까지 발의되는 사법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유태흥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자신을 임명해준 전두환의 철저한 비호 아래 대법원장 자리를 악착같이 지켜냈다. 결국 법관의 양심과 법치주의를 지키려던 올곧은 이들은 법원 밖으로 쫓겨나고, 정권이 휘두르는 채찍질에 맞춰 춤추던 자들만 사법부의 주류로 살아남는 거대한 암흑기가 도래하게 되었다.   1942년의 롤란트 프라이슬러(위키피디아) 나치 재판소장 프라이슬러와 소름 돋는 닮은꼴 영국에서 유태흥이 보여준 이 기이하고도 가식적인 행적을 들여다보면, 서구 역사에서 독재 권력의 충직한 사냥개가 되어 법치를 난도질했던 악명 높은 법률가들의 얼굴이 겹쳐 보인다. 그중에서도 가장 소름 돋는 평행이론을 달리는 인물은 나치독일 시절, 히틀러(1889~1945)의 피비린내 나는 절대독재를 법의 이름으로 칭송하고 완성해준 나치 민족재판소장 롤란트 프라이슬러(Roland Freisler, 1893~1945)다. 프라이슬러 역시 처음부터 야만인은 아니었다. 그 또한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정통엘리트 법률가 코스를 밟은 명석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히틀러가 권력을 잡자 그는 사법의 신성한 탈을 쓴 채 정권 반대파와 유대인을 처형대로 보내는 도살자로 완벽히 변신했다. 그는 신성해야 할 법정에서 피고인들에게 온갖 고함을 지르고 모욕을 주며 사법의 정치화를 선도했다. 그가 남긴 가장 유명한 망언은 유태흥의 속내와 완벽히 일치한다. 사법부의 유일한 임무는 총통의 의지를 실현하는 것이며, 총통의 생각은 곧 법이다. 유태흥과 프라이슬러의 본질은 이처럼 자로 잰 듯 일치한다. 사법부라는 독립된 헌법기관을 독재자의 사적통치 도구이자 정권연장을 위한 수단으로 기꺼이 헌납했다는 점이다. 다만 역사적 결말에는 기막힌 차이가 존재한다. 프라이슬러는 연합군의 폭격이 한창이던 1945년, 법정에서 판결문을 쥐고 있다가 무너진 대들보에 맞아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반면 유태흥은 전두환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가 찾아온 뒤에도 과분한 원로 대접을 받으며, 2005년 서울 마포대교에서 몸을 던질 때까지 부귀영화를 누렸다. 이 대목이야말로 대한민국 현대사가 과거 청산에 얼마나 나약하고 반헌법 행위자들에게 얼마나 관대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잔인하고 서글픈 풍경이다. 유태흥은 2005년 1월 17일 한강으로 투신, 곧바로 구조돼 여의도 성모병원으로 옮겨져 심폐소생술 등을 받았으나 심장마비를 일으켜 숨을 거뒀다. 지병인 요통으로 고생해온 유태흥은 백내장까지 겹치고 병세가 악화되자  죽고 싶다 는 얘기를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유태흥(나무위키) 2026년 오늘, 다시 돌아온 ‘사법부 장악’의 유령 유태흥의 삶과 그가 저지른 전횡은 한 세대 전 교과서에나 나오는 케케묵은 옛날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오늘날 조희대(1957~ )체제의 사법부를 바라보면, 40여 년 전 죽은 줄 알았던 유태흥의 유령이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1960~ )이 선포했던 비상계엄 사태를 영국에서 생중계로 지켜보며,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탱크나 군인들의 군화가 아니었다. 바로 1980년대 사법부를 권력의 발밑에 바쳤던 유태흥이었다. 국가의 헌정질서를 뿌리째 흔들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려 했던 명백한 내란범죄행위 앞에서도, 오늘의 사법부는 과연 법관의 양심과 사법부의 독립을 온전히 지켜내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영국 런던의 의회 의사당 앞에는 800여 년 전 왕의 절대권력조차 법의 테두리 아래 묶어두었던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의 정신이 도도히 흐르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법정은 유태흥이 살아생전 그 어떤 법적 책임도 묻지 못한 채 그를 역사 속으로 안락하게 보내주었다. 하지만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리고 그 역사의 방청석에 우리가 앉아 있다. 참고문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2026, 『반헌법행위자열전 1~4』, 사회평론아카데미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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