퀘이커 복음주의 선언한 아버지, 사료로 뒤집은 아들 [사람들] 수염 난 근엄함, 그 이름은 퀘이커 주교
조셉 비반 브레이스웨이트(Joseph Bevan Braithwaite, 1818~1905)는 별명부터 심상치 않다. 퀘이커 주교 라 불렸는데 정작 퀘이커에는 주교가 없다. 퀘이커는 성직자 계급 자체를 거부하는 종파이니, 이 별명은 상찬이라기보다 놀림에 가깝다. 이유는 옷차림이었다. 시대가 바뀌어 다들 수수한 정장을 입던 시절에도 그는 구식 퀘이커 복장을 끝까지 고수했다. 무늬만이 아니라 진짜로 검소함을 붙들고 놓지 않은 인물이었던 셈이다.
법조인 자격을 땄지만 말을 더듬는 습관 때문에 법정에서 변론은 하지 못했다. 대신 설교단에서는 이상하게도 말을 잘했다. 인생이 다 그렇다. 안 되는 데서 안 되고, 되는 데서 되는 법이다. 1847년 복음주의 퀘이커의 지도자 조셉 존 거니가 세상을 뜨자, 그 노선의 지도력은 자연스레 브레이스웨이트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1887년, 그는 리치먼드 선언(Richmond Declaration of Faith)이라는 문서를 손수 작성한다.
조셉 비반 브레이스웨이트(위키피디아)
리치먼드 선언이 뭐길래?
리치먼드 선언은 그 해 미국 인디애나주 리치먼드에서 열린 퀘이커 대표자 회의에서 채택된 신앙고백 문서다. 조셉 비반 브레이스웨이트가 초안을 작성했다. 리치먼드 선언의 핵심은 이렇다.
성경의 권위를 최우선으로 못 박았다. 그동안 퀘이커는 내면의 빛 Inner Light), 즉 개개인 안에 깃든 신의 계시를 신앙의 핵심으로 삼아왔다. 그런데 이 선언은 성경이 내면의 빛보다 상위에 있다 며, 개인의 주관적 깨달음이 성경 말씀과 충돌할 경우 성경이 우선한다고 못 박았다.
복음주의 노선의 승리선언이었다. 19세기 영국 퀘이커는 두 갈래로 갈려 있었다. 하나는 전통적으로 내면의 빛과 침묵예배를 중시하는 쪽, 다른 하나는 감리교나 침례교처럼 성경 중심, 설교 중심의 예배를 받아들인 복음주의 쪽이었다. 리치먼드 선언은 후자, 즉 복음주의 진영의 입장을 공식문서로 정리한 것이다.
일부 퀘이커 공동체의 공식 신앙고백으로 채택되었다. 특히 미국 중서부와 영국 일부 연회(Yearly Meeting)에서 정식으로 받아들여졌고, 지금도 복음주의 성향 퀘이커 교단에서는 여전히 권위 있는 문서로 취급된다.
반면 자유주의·전통주의 성향의 퀘이커들은 이 선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들은 성경도 결국 내면의 빛을 통해 해석되는 것 이라며, 성경을 ‘더는 다툴 수 없는 최종결정’으로 두는 발상 자체에 반발했다. 이 균열이 훗날 그의 아들 윌리엄 찰스 브레이스웨이트(William Charles Braithwaite, 1862~1922)가 역사학으로 방향을 튼 배경과도 은근히 맞닿아 있다. 아버지가 결론 을 선언했다면, 아들은 그 결론이 나오기까지의 과정 을 역사적으로 추적하는 쪽을 택한 셈이다.
하여간 이렇게 리치먼드 선언의 요지는 간단했다. 성경이 내면의 빛보다 위에 있다. 즉 퀘이커의 오랜 전통, 즉 개인의 ‘내면적 깨달음’을 중시하는 흐름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선언이었다. 성경 원리주의, 말하자면 원조 근본주의자였던 셈이다.
리치먼드 선언문, 서지 정보를 바탕으로 만든 표지 이미지(위키피디아)
아들은 아버지를 존경했지만, 아버지의 결론에는 서명하지 않았다
그런데 근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들, 윌리엄은 일찌감치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버지처럼 법조인이 되었다가 은행업으로 방향을 튼 뒤, 1896년 길레츠 은행의 동업자가 되어 안정적인 생계를 꾸렸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 신사의 이력이다.
하지만 반전은 이미 1895년에 예고되어 있었다. 그보다 앞선 1893년, 윌리엄은 존 윌헬름 라운트리(John Wilhelm Rowntree), 그리고 훗날 자신의 아내가 되는 재닛 몰런드(Janet Morland, 1869~1936)와 함께 요크셔 운동 이라는 청년모임을 꾸려 각지를 돌며 퀘이커 예배에 활기를 불어넣는 활동을 벌였다. 이 흐름은 1895년 맨체스터 회의로 이어지는데, 이 회의는 오늘날 퀘이커 역사에서 자유주의 퀘이커가 처음으로 제 목소리를 낸 사건 으로 평가받는다. 즉 아버지가 리치먼드 선언으로 복음주의 진영의 얼굴이 되던 무렵, 아들은 이미 정반대 진영의 젊은 얼굴로 자리 잡고 있었던 셈이다. 당대 기록은 이 부자를 이렇게 요약한다.
아버지는 당대 가장 무게감 있는 복음주의 지도자였다. 아들은 가장 저명한 자유주의자 중 한 명이 되었다.
이 노선이 학술적 결실로 이어진 계기는 1905년이었다. 함께 요크셔 운동을 이끌던 라운트리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자, 사업가였던 그의 후원으로 진행되던 퀘이커역사 편찬 작업의 바통이 윌리엄에게 넘어온다. 은행원이 하루아침에 역사학자로 변신한 게 아니라 이미 10년 넘게 다져온 자유주의 진영의 신념을 방대한 사료 작업으로 완성할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 1912년 윌리엄의 저서 『퀘이커의 시작』, 1919년 『퀘이커의 두 번째 시기』가 잇달아 나왔고, 이 저작들은 지금까지도 초기 퀘이커 운동사의 표준서로 남아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이 생긴다. 아버지는 성경이 진리의 최종 근거 라 선언했지만, 아들은 이미 20대에 공개적으로 반대의 깃발을 든 뒤, 이후 평생을 바쳐 그렇다면 그 성경을 해석해 온 사람들, 즉 역사 속 인간들의 기록을 낱낱이 파헤쳐 보자 고 매달렸다. 아버지가 결론을 내렸다면, 아들은 그 결론이 나온 과정을 검증한 것이다. 흔한 집안 싸움이 아니라 방법론의 충돌이었다. 아버지의 무기는 선언이었고, 아들의 무기는 사료였다.
윌리엄 찰스 브레이스웨이트(위키미디어)
선언과 사료, 둘 중 무엇이 더 무서운가?
역사적으로 보면 대개 선언은 목소리가 크고, 사료는 목소리가 작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결국 사료가 이긴다. 리치먼드 선언은 한 시대 복음주의 퀘이커의 결속을 다졌지만, 오늘날 대중에게 훨씬 더 널리 읽히고 인용되는 쪽은 아들의 역사서다. 근엄한 아버지의 선언문보다 꼼꼼한 아들의 각주가 더 오래 살아남았다.
조셉 비반 브레이스웨이트(85 N 2) | Quaker Strongrooms)
한국에 던지는 질문, 선언이냐, 기록이냐
이 부자(父子) 이야기가 남 얘기 같지 않은 이유가 있다. 한국사회에서도 늘 반복되는 장면 아닌가. 누군가는 근엄하게 선언한다. 이것이 진리다, 이것이 국익이다, 이것이 질서다. 그리고 그 선언에는 종종 서명도, 직인도, 계엄군의 총구도 따라붙는다. 반면 다른 누군가는 조용히 자료를 모으고, 날짜를 대조하고, 누가 어떤 발언을 언제 했는지 꼼꼼히 기록해 나간다. 당장은 선언이 화려하고 힘 있어 보이지만, 결국 후대가 판단의 근거로 삼는 것은 ‘반헌법행위자열전’과 같은 촘촘한 역사의 기록이다.
지금 한국에서 계엄이라는 선언이 던져진 지 채 2년이 되지 않았다. 그 선언을 한 이들은 정당성과 질서를 내세웠지만, 결국 그 정당성 여부를 가려낼 재료는 누가 무엇을 언제 지시했는지에 대한 세세한 기록이다. 윌리엄이 은행원이라는 안정된 자리를 박차고 나와 역사 편찬이라는 지루하고 돈 안 되는 작업에 뛰어든 이유도 여기 있다. 선언은 순간에 힘을 발휘하지만, 기록은 시간을 이긴다.
아버지는 성경 구절을 붙들었고, 아들은 사람들의 실제 행적을 붙들었다. 한국사회도 지금 이 갈림길에 서 있다. 누군가의 근엄한 선언을 그대로 받아쓸 것인가, 아니면 그 선언 뒤에 숨은 행적을 꼼꼼히 대조해 볼 것인가. 답은 이미 브레이스웨이트 집안의 저녁식탁에 올라 있었는지도 모른다.
윌리엄 찰스 브레이스웨이트(The Daily Quaker Message)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