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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같은 삶 슈만…쇼팽·멘델스존 세상에 알려
[사람들]
독일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데 정작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아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사람의 인생 자체가 한 편의 낭만주의 소설이다. 손가락이 망가져 피아니스트의 꿈이 좌절되고, 사랑하는 여인의 아버지와 법정에서 싸우고, 무명의 천재들을 알아보는 눈을 가졌으며, 라인강에 몸을 던져 삶을 끝내려 했다. 웬만한 드라마 작가도 이 정도로 파란만장하게는 쓰지 못할 것이다.   1839년 경의 슈만 초상화(위키피디아) 법대생, 건반 앞에 앉다 슈만은 독일 작센 지방의 츠비카우에서 서적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문학과 음악을 동시에 사랑했는데, 집안은 그를 법대에 보냈다. 라이프치히와 하이델베르크에서 법을 공부했지만 강의실보다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훨씬 길었다. 결국 법전을 덮고 피아니스트가 되기로 결심한 뒤, 유명한 피아노 교사 프리드리히 비크(Friedrich Wieck, 1785~1873) 밑에서 본격적으로 조련을 시작한다. 문제는 손가락이었다. 손가락 힘을 강화한다며 무리하게 기구를 쓰다가 오른손을 망가뜨려 버린 것이다. 거장 연주자의 꿈은 그렇게 끝났다. 그런데 이 남자, 좌절하는 대신 방향을 튼다. 건반을 두드리는 대신 펜을 들기로 한 것이다.   1838년 경의 프리드리히 비크(위키피디아) 손가락 대신 펜으로 1834년, 슈만은 음악잡지를 하나 창간한다. 당대의 매너리즘에 빠진 평론과 상업주의에 물든 음악계를 향해 날카로운 비평을 쏟아내는 매체였다. 이곳에서 슈만은 가상의 인물 두 명, 열정적인 플로레스탄과 사색적인 오이제비우스의 이름으로 글을 썼는데, 요즘으로 치면 필명을 여러 개 만들어 자기 안의 다른 자아들과 논쟁을 벌인 셈이다. 혼자서 다중인격 토론을 하며 원고료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이 잡지가 흥미로운 건 단지 재미있어서가 아니다. 슈만은 이 잡지 지면을 통해 당시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신인들을 세상에 알렸다. 폴란드 출신의 프레데리크 쇼팽(Frédéric Chopin, 1810~1849)이 데뷔했을 때 슈만은 여러분, 모자를 벗으시오. 천재요! 라고 외쳤다. 펠릭스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 1809~1847)을 우리 시대 최고의 음악가 라 치켜세운 것도 슈만이다. 심지어 이미 세상을 떠난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 1797~1828)의 유고 더미에서 잊혀진 교향곡을 발굴해 초연까지 성사시켰다. 그리고 죽기 3년 전인 1853년, 무명의 스무 살 청년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를 만나고는 마지막 평론에서 새로운 길 이라는 제목으로 그를 음악계의 후계자로 선언한다. 오늘날 브람스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걸 생각하면, 슈만의 안목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알 수 있다. 실력 있는 무명을 알아보고 자신의 지면을 아낌없이 내주는 평론가, 요즘 언론계에도 좀 있었으면 하는 인물형이다.   1849년 경의 프레데리크 쇼팽(위키피디아) 장인과의 전쟁 스승 비크에게는 딸 클라라 비크(Clara Wieck, 1819~1896)가 있었다. 부친을 능가하는 피아노 신동이었다. 슈만과 클라라는 사랑에 빠졌지만 부친은 격렬히 반대했다. 딸의 화려한 연주 경력에 그늘이 질까 걱정했다는 설도 있고, 가난한 음악평론가 사위를 원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이유가 뭐든 비크는 딸과 제자의 만남을 막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두 사람은 몰래 만나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버텼고, 결국 슈만은 법원에 소송을 걸었다. 스승이자 예비 장인을 상대로 재판을 벌인 것이다. 이 정도면 낭만이 아니라 근성이다. 1840년, 법원은 슈만의 손을 들어줬고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했다. 이 해에 슈만은 130곡이 넘는 가곡을 쏟아냈는데, 후대 음악학자들은 이 시기를 가곡의 해 라 부른다. 사랑이 창작욕을 자극한다는 상투적인 이야기를 몸소 증명한 셈이다.   1857년 클라라 비크 초상화(위키피디아) 라인강에 몸을 던지다 그러나 슈만에게는 젊은 시절부터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환청과 우울증세가 반복적으로 그를 괴롭혔고, 1854년 2월 27일에는 라인강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낚시꾼들에게 구조된 뒤 본인의 요청으로 본 근교 엔데니히의 요양원에 들어갔고, 2년 넘게 그곳에서 지내다 1856년 7월 29일,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847년의 로베르트와 클라라 슈만(위키피디아) 우리에게 주는 교훈 슈만의 삶에서 특히 눈에 들어오는 대목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그가 평론가로서 보여준 태도다. 그는 지면을 이용해 사익을 챙기거나 권력자에게 아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명의 실력자를 발굴하고, 매너리즘에 빠진 기득권 음악계를 향해 날 선 비판을 쏟아냈다. 언론의 본분이 무엇인지 200년 전 사람이 정확히 보여준 셈이다.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이라는 초유의 사건을 겪은 한국사회에서,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진실을 알리는 언론과 평론가가 왜 소중한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또 하나는 그가 부당한 권위에 맞서 싸운 방식이다. 스승이자 장인이 될 사람이 아무리 반대해도, 슈만은 정당한 절차, 즉 법정을 통해 문제를 해결했다. 힘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원칙과 절차로 부당함에 맞선 것이다. 계엄이라는 초법적 수단으로 권력을 유지하려 했던 이들과는 정반대의 태도다. 정당성은 완력이 아니라 원칙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이 낭만주의 음악가는 이미 190년 전 자신의 연애사로 증명해 보였다. 슈만이 몸으로 겪은 싸움들이, 원칙 없이 완력만 앞세운 이들에게 시대를 뛰어넘는 잔소리가 되고 있는 셈이다.   1850년의 슈만(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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