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관리 빵점, 무능 선관위의 판도라 상자 [뉴스] 모든 사건(일)에는 이유가 있다. 선거에서 패배하고 승리하는 후보와 정당에도 모두 분명한 이유가 있다. 월드컵에서 이기고 지는 팀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고 일터에서 노동자가 목숨을 잃는 중대재해가 생기는 데에도 확실한 이유가 있다. 선거 관리를 독립적으로 도맡은 선거관리위원회가 국민 전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투표지 부족 사건을 일으킨 것도 그렇다.
40여 년간 산업재해, 사회적 참사, 자연재해, 환경 재난, 식품 안전 파동, 팬데믹 등과 관련해 언론인으로서, 위기 소통 전문가로서, 관련 정부 기관과 각종 위원회에서 활동하며 기사와 칼럼을 쓰고 책을 저술하며 전국 곳곳 현장을 누비고 다니면서 얻은 지혜가 있다. 사고가 난 곳에서 다시 사고가 잘 나며 사고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즉 위험한 일을 하는 곳에서 위험한 일이 잘 생기지만 전혀 위험하지 않을 것 같은 곳에서도 위험한 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사소한 사고 방치가 큰 사고 부른다는 하인리히 법칙
지난 3일 저녁 6·3지방선거 개표 방송을 지켜보면서 일부 투표소에서 투표지 부족으로 투표가 예정 시간을 넘기거나 투표를 하지 못하고 돌아간 유권자가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보통 문제가 아님을 직감했다.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이미 소쿠리 투표 등을 겪은 적이 있어서 ‘그동안 물밑에 잠겨있었던 문제들이 물 위로 하나 둘씩 떠오르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10여 일이 지난 현재 집계 누락과 오입력 의혹, 위기 대응 매뉴얼 부재, 위기관리 전담 조직 부재, 위기 대응 실전 훈련 부재 등 온갖 위기관리 무능과 부실로 꽉 채운, ‘국민 주권 방해 악’들이 선관위의 판도라 상자를 열고 뛰쳐나오고 있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들여다보고 있는 합동수사팀이 11일 과천 중앙선관위를 압수수색한 뒤 압수품을 나르고 있다. 2026. 6. 11 연합뉴스
산재, 재난, 사고 등을 말할 때 빼놓지 않고 언급하는 법칙이 있다. 하인리히 법칙이다. 이 법칙은 사망 사고와 같은 한 번의 큰 재해가 있기 전에, 그와 관련된 작은 사고나 징후들이 먼저 일어난다는 법칙이다. 큰 재해와 작은 재해, 사소한 사고의 발생 비율이 1:29:300이라는 점에서 ‘1:29:300 법칙’으로 부르기도 한다. 사소한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내버려 둘 경우,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밝혀낸 것으로 산업재해 예방을 위해 중요하게 여기는 개념이다. 이 법칙은 근래 들어와서 현장 재해뿐만 아니라 각종 사고나 재난, 또는 사회적·경제적·개인적 위기나 실패와 관련된 개념으로 확장해 강조되고 있다.
세월호 참사와 같은 대형 사고는 정권의 몰락이나 개인, 기업의 파산을 가져오기도 한다. 이를 보여주는 사례는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너무나 많다. 모든 사고를 예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동차가 거리에 넘쳐나고, 무수한 부품의 장치와 소프트웨어로 작동하는 설비와 시설을 가동해야 하는 일터와 문명 기기에서는 사전에 찾아내기 어려운 위험 요소들이 산재해 있다. 이때 잘 돌아가는 듯한 원전과 항공기 등의 장비기기에서 갑자기 일어나는 사고를 어느 학자는 ‘정상 사고’란 개념을 도입해 설명했다.
이런 비정상 행태가 다른 때, 다른 곳에서는 없었는가
하지만 선관위에서 일어난 투표지 부족 사태와 그 뒤 드러난 투표 결과 입력 오류와 은폐 등은 비정상 사고 또는 행태로 볼 수밖에 없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선관위의 무사안일과 빵점 위기관리의 민낯은 홈페이지에 올린 사실관계 설명자료와 대국민 사과문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선관위의 해명과 사과에도 불구하고 일반 국민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그 가운데 하나만 톺아보더라도 그렇다.
선관위는 개표상황표는 위원 검열과 위원장 공표를 거쳐 ‘개표보고시스템’을 통해 전산으로 입력·보고되며 이는 ‘선거통계시스템’을 통해 실시간으로 국민에게 공개한다”라고 밝혔다. 이어 성남시중원구 금광2동 제3투표소의 투표용지는 경기도 교육감 후보 순서가 안민석-임태희 순이었으나 개표보고시스템(이하 시스템) 입력화면에는 임태희-안민석 순으로 설정되어 있었는데 임태희 368표, 안민석 337표로 입력해야 함에도 직원 실수로 서로 바꿔 임태희 337표, 안민석 368표로 입력·공표했다는 것이다. 결과로 보면 임 후보는 31표를 도둑맞았고 안 후보는 가만히 앉아 31표를 더 받은 셈이다.
경기도 교육감 선거의 경우 애초 투표소별로 투표용지에 인쇄된 후보의 순서가 다를 수 있는 식으로 설계했다. 이 때문에 개표상황표 상 후보 순서와 시스템 입력화면 상 후보 순서가 반대라는 것을 선거 전부터 선관위 관련자가 모두 알고 있었고 이 부분에서 실수가 일어날 가능성이 상존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입력자와 위원, 위원장이 만사 제쳐두고 두 번, 세 번 이를 확인해야 함에도 너무나 안일하게 ‘처리’한 것이다. 이런 식의 투개표 설계를 이번에 처음 한 것은 아닐 터여서 황당한 오입력 사건이 벌어진 것은 상식으로도 이해하기 힘들다. 이런 실수가 이 투표소에서만 해당하는 것인지, 이전 다른 선거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남성 자궁암’ ‘여성 고환암’ 통계 내놓는 공무원들 직무유기
이번 선관위 사태를 보면서 30년 전쯤 암 등 질병 통계와 관련해 벌어졌던 황당무계한 사건 하나가 떠올랐다. 당시 보건복지부(손학규 장관)는 건강보험통계연보를 매년 펴냈다. 이 연보는 복지부 산하 의료보험연합회(국민건강보험공단의 전신)가 만들어 보건복지부와 통계청의 승인을 얻어 국제기구 등에도 보내는 중요한 통계연보였다. 복지부는 보도자료와 함께 이 통계집을 출입기자들에게 배포했다.
남자의 유방암 통계가 궁금해 통계집에서 이를 살핀 뒤 남성성과 여성성과 관련한 암 통계를 살폈다. 유방암은 남녀 모두에게 똑같이 발생한다. 그러나 고환암, 음경암, 전립선암은 남성에게만, 난소암, 자궁경부암, 자궁암 등은 여성에게만 생긴다. 한데 통계집에서는 고환암, 음경암, 전립선암에 걸린 여성이 수백 명씩, 난소암, 자궁경부암, 자궁암에 걸린 남성이 수백 명씩 무더기로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너무나 황당한 일이었다. 이를 즉각 다음날 조간신문에 대서특필했다. 일부 석간 일간지와 공중파 방송도 그 내용을 중요하게 다루었다.
의료보험연합회, 보건복지부, 통계청에는 통계연보를 살피고 검열하는 담당자와 간부, 그리고 각 관련 부처와 기관마다 통계위원회가 있어서 적어도 수십 명이 이를 사전에 걸러내 오류를 바로잡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 누구도 이를 하지 않았다. 명백한 직무 유기이자 무사안일한 행태였다. 필자가 문제를 파악하는 데는 몇 시간, 몇 분도 아닌 몇 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건강보험 진료 건수는 지금은 더 엄청나게 많으나 당시에도 연간 수억 건에 달했다. 따라서 통계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국제질병분류기호에 따라 수억 건의 질병을 일일이 입력해야 한다. 옆 칸 등에 오입력할 가능성이 늘 있었다. 하지만 이를 원천적으로 막을 시스템을 만들 생각을 아무도 하지 못했다. 결국 장관이 의료보험연합회를 찾아가 호통치는 등 큰 소동이 벌어지고 난 뒤 전산시스템에서 남성과 여성 고유의 성과 관련한 장기에서 다른 성에는 입력 자체가 되지 않도록 개선해 오입력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하지만 남성, 여성 함께 생기는 질병에 대해서는 정확한 통계 입력이 되고 있는지는 그 뒤에도 알 수 없었다.
되살아난 부정선거론 좀비들 강력 대응해야
지방선거, 국회의원 선거, 대통령 선거도 마찬가지다. 한 치의 오차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는 국가 중대 사안이다. 선거 행정과 선거 관리 결과를 불신하면 사회 전체가 혼란에 빠진다. 국민의 참정권이 침해당하거나 훼손되는 것은 물론 우리 사회의 악이라고 할 수 있는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이 활개를 칠 자리를 깔아주는 구실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잠실개표소 앞 시위대. 2026. 6. 14 연합뉴스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은 양식 있는 온 국민이 힘을 모아 척결해야 할 좀비다. 이번 선관위 사태는 생기를 잃어가던 부정선거 음모론자와 극우 성향 유튜버들에게 물과 자양분을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정권 훼손 못지않게 선관위가 우리 사회에 끼친 해악이다.
안종주 언론인, 보건학 박사
오늘도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은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일대에서 ‘부정선거 재선거, 당일 개표 수 개표’를 부르댄다. 벌써 열흘이 훌쩍 지났다. 이는 진실로 그 내용과 같이 되기를 원한다는 뜻의 아멘을 외는 기독교인이나 부처에게 진심으로 귀의하여 공경하며 따른다는 뜻의 나무아미타불을 암송하는 불교도의 그것과는 다르다. 이들에게는 오로지 한국 사회를 혼란에 빠트리겠다는 일념으로만 꽉 차 있는 것 같다. 이런 정신 나간 헛구호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자신의 혼을 빼앗기는 일이다. 단호히 대응해야 한다.
이재명 정부와 국회, 사법부가 선관위의 총체적 부실 선거 관리와 관련해,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고 시급하다. 앞으로 선거 관리 조직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선거 투개표 위기 발생 시 소통·대응 시스템, 사전 예방과 훈련은 어떻게 할 것인지를 톺아보고 신속하게 혁신해야 한다.안종주 진단 jjahnpark@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