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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길 위에서 사유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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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니체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의 책장을 넘기는 것이 아니라 그가 걸었던 길을 따라 상상해보는 일일지 모른다. 니체는 철학자이기 전에 걷는 사람이었다. 아니, 그는 걷지 않으면 철학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사유는 언제나 두 발에서 시작되었고, 그의 문장은 늘 이동 중에 태어났다. 니체에게 걷기는 취미도, 건강 관리도 아니었다. 그것은 생존의 방식이자 사유의 조건이었다. 니체의 철학을 이루는 문장 하나하나는, 고요한 서재가 아니라 바람과 통증, 숨가쁨과 고독 속에서 길어 올려진 것들이었다. 니체는 평생 병약했다. 만성적인 두통과 위장병, 심한 소화 장애, 시력 저하와 신경 쇠약은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그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극심한 통증에 시달렸고, 밝은 빛과 큰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이런 상태에서 한 자리에 오래 앉아 있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밀폐된 강의실에서 정해진 시간 강의를 이어가는 대학 교수라는 직업은 그의 몸에겐 지나치게 가혹한 요구였다. 결국 그는 스위스 바젤 대학의 교수 직을 내려놓는다. 서른을 갓 넘긴 나이였다. 이 결정을 두고 동시대인들은 그를 불행한 천재, 몰락한 학자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니체에게 그것은 몰락이 아니라 탈출에 가까웠다. 제도와 규율, 시간표와 강단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견딜 수 없는 삶의 형식을 버렸고, 대신 불확실하지만 자기 몸에 맞는 삶을 선택했다. 걷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었기에, 그는 길 위로 나섰다. 그 선택은 그의 철학만큼이나 급진적이었다. 니체는 이후 정착하지 않는 삶을 산다. 스위스의 실스마리아, 이탈리아의 제노바와 토리노, 프랑스 남부의 니스 등을 계절에 따라 옮겨 다녔다. 기차는 이동 수단이었지만, 사유는 언제나 도보로 이루어졌다. 그는 하루에 몇 시간씩 걸었다. 호숫가, 산길, 도시 외곽의 비탈길을 오르내리며 혼자 걸었다. 걷는 동안 그는 자신의 몸 상태를 세밀하게 관찰했고, 통증이 심해지면 속도를 늦췄으며, 머리가 맑아질 때까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걷기는 그에게 사치가 아니라 처방이었고, 약이자 훈련이었다. 니체는 앉아서 오래 생각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자신의 노트와 편지에서 반복해서 말한다. 앉아 있는 동안 떠오른 생각은 믿지 않는다.” 그의 기준에서 진짜 생각은 몸을 통과한 것이어야 했다. 발걸음의 리듬과 호흡의 흐름, 근육의 피로와 회복 속에서 떠오른 생각만이 살아 있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의 철학은 언제나 단정적이기보다 격렬하고, 체계적이기보다 파편적이다. 그것은 미완의 약점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사유의 흔적이다. 니체의 문장은 걷는 문장이다.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며, 때로 방향을 바꾸고, 때로 스스로를 부정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는 책상 앞에서 계획적으로 쓰인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산길에서 태어났다. 니체는 이 작품의 상당 부분을 실스마리아 주변을 걸으며 구상했다. 그는 노트에 짧은 문장과 이미지, 격언 같은 문구들을 적었고, 그것들이 나중에 하나의 흐름으로 엮였다. 그래서 이 책은 논문처럼 논증하지 않고, 설교처럼 가르치지도 않는다. 대신 예언처럼 말하고, 시처럼 울린다. 니체의 사유는 설명하기보다 부딪치고, 설득하기보다 흔든다. 그것은 걷는 동안만 가능한 방식의 언어다. 니체에게 걷기는 고독의 형식이기도 했다. 그는 무리를 이루어 걷지 않았다. 대화 속에서 생각을 정리하는 유형의 철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혼자 걸었다. 그러나 그 고독은 폐쇄적이거나 자기 연민적인 고독이 아니었다. 그는 걷는 동안 자신과 대화했고, 동시에 세계와 접속했다. 사회적 역할과 기대, 도덕적 요구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그는 비로소 인간이라는 존재를 낯설게 바라볼 수 있었다. 니체의 사유는 언제나 ‘거리 두기’에서 시작된다. 걷기는 그 거리를 가능하게 했다.   니체가 자주 걸었던 해변 절벽 마을인 프랑스 에즈 . 니체는 힘든 오르막길을 걸으면서 차라투스트라 의 결정적인 장을 구상했다고 한다. 니체의 산책로 란 이름으로 약 4km 길이의 언덕길이 조성됐다. 편도 1시간 30분 걸린다. 이 고독 속에서 니체는 ‘초인’이라는 개념을 사유한다. 초인은 흔히 오해되듯 폭력적이고 지배적인 인간상이 아니다. 니체의 초인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넘어서는 존재다. 과거의 자신, 주어진 가치, 익숙한 도덕을 반복적으로 의심하고 갱신하는 인간이다. 그리고 그 넘어서기는 추상적인 결단이 아니라 일상의 반복 속에서 이루어진다. 매일 같은 길을 걷되, 어제와는 다른 생각을 품는 것. 니체에게 초인은 그렇게 길 위에서 형성된다. 니체는 자연을 낭만적으로 소비하지 않았다. 그는 산과 숲을 단순한 위안의 공간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은 그에게 시험의 장소였다. 가파른 오르막과 갑작스러운 날씨 변화, 몸의 피로와 통증은 그를 끊임없이 시험했다. 그는 이 시험을 통해 자신이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를 확인했다. 니체 철학의 핵심 개념인 ‘힘에의 의지’는 추상적인 욕망이나 지배 본능이 아니라, 바로 이런 몸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이 아니라, 더 오래 견디고, 다시 일어서려는 의지에 가깝다. 이 점에서 니체의 걷기는 수행에 가깝다. 그는 의도적으로 자신을 단련하려 하지 않았다. 금욕이나 고행을 미덕으로 삼지도 않았다. 그러나 걷는 과정에 그는 자연스럽게 단련되었다. 그는 고통을 피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고통을 숭배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고통을 사유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고통 없는 사유는 얕다고 보았고, 몸을 거치지 않은 생각은 허약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의 철학은 불편하다. 쉽게 위로하지 않고, 간단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불편함 때문에, 그의 사유는 오늘날까지도 살아 있다. 니체가 살던 시대는 근대 문명이 절정으로 치닫던 시기였다. 이성, 진보, 과학, 도덕은 거의 종교처럼 숭배되었다. 인간은 합리적 계획과 제도를 통해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니체는 그 모든 가치가 삶의 몸통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를 보았다. 그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지만, 그것은 단순한 무신론의 선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삶과 분리된 가치 체계, 몸과 감각을 무시한 도덕에 대한 고발이었다.   걷는 동안 그는 인간이 만든 규범과 도덕이 얼마나 삶의 리듬을 억압하는지를 감각했다. 정해진 시간에 일하고, 정해진 방식으로 생각하며, 정해진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삶. 니체는 그런 삶이 인간을 강하게 만들기보다 오히려 병들게 만든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철학을 가르치기보다 흔들고자 했다. 그의 글이 종종 오해받고, 극단적으로 소비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독자를 안심시키지 않는다. 대신 길 위로 끌어낸다. 니체의 문장은 독자에게 요구한다. 너 자신이 이 문장을 따라 걸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더 부족하다. 그의 철학은 독자의 삶의 리듬을 바꾸기를 요구한다. 스스로 걷지 않는 독자는 니체를 끝내 이해할 수 없다. 그는 독자를 사유의 동반자로 만들고자 했지, 제자로 만들고자 하지 않았다. 오늘날 니체를 다시 읽는다는 것은, 그의 개념을 해석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가 선택했던 삶의 형식을 다시 묻는 일이다. 우리는 너무 오래 앉아 있었다. 너무 많은 시간을 고정된 자세로 보냈고, 생각은 점점 몸과 분리되었다. 화면 앞에 앉아 머리만으로 사유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우리는 더 피로해졌다. 니체의 걷기는 이런 상태에 대한 하나의 급진적인 처방이다. 생각이 막힐수록, 더 오래 걸어야 한다는 그의 태도는 지금도 유효하다. 한국 사회에서도 니체의 걷기는 낯설지 않은 울림을 준다. 성과와 속도가 삶의 기준이 된 사회에서 걷는다는 것은 뒤처지는 일처럼 보인다. 빨리 이동하지 못하는 사람, 빨리 결과를 내지 못하는 사람은 실패자로 간주된다. 그러나 니체는 묻는다. 빠르다는 것은 과연 어디로 가는 것인가.” 방향 없는 속도는 소진을 낳을 뿐이다. 걷는 속도는 느리지만, 방향을 사유할 시간을 준다. 니체가 길 위에서 붙잡았던 것은 바로 그 시간이었다. 니체는 결국 정신의 붕괴를 겪는다. 토리노에서 말에게 매달려 울던 장면은 그의 삶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남았다. 그래서 그의 삶은 흔히 비극적으로 끝났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그를 단순히 실패한 철학자로 기억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그는 자신의 몸이 허락하는 한 끝까지 걸었고, 생각했고, 썼다. 그는 앉아서 안전하게 철학하지 않았다. 대신 몸을 걸고 사유했다. 그 위험 속에서 그의 철학은 태어났다. 니체의 걷기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우리는 얼마나 몸을 통과한 생각을 하고 있는가. 걷지 않는 사유는 편리하지만, 쉽게 굳어진다. 반면 걷는 사유는 불편하지만, 살아 있다. 니체는 그 불편함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오늘날까지도 우리를 흔든다. 니체의 걷기는 단순한 생활 습관이 아니라, 현대사회가 잃어버린 사유의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그는 왜 그토록 걸어야 했는가를 묻는 순간,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앉아 있게 되었는지를 함께 묻게 된다.   프리드리히 니체와 그의 어머니(왼쪽). 평생 ‘자유정신’을 옹호하며 가족, 사회, 국가 등 모든 공동체적 삶을 비판했던 극단적 개인주의자 니체는 나이 들어 정신 질환으로 어머니와 여동생의 보살핌을 받게 된다. 위키피디아 현대사회는 속도와 효율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생각은 빠를수록 좋고, 결정은 즉각적일수록 유능하다고 여겨진다. 우리는 이동 시간을 최소화하고, 몸의 개입을 제거하며, 머리만으로 사고하는 환경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그 결과 생각은 점점 많아졌지만, 깊어지지는 않았다. 니체의 걷기는 바로 이 지점에 우리를 멈춰 세운다. 그는 묻는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왜 우리는 더 피로해지는가. 니체에게 걷기는 사유의 속도를 늦추는 행위였다. 느린 속도는 단순한 지연이 아니라 방향을 점검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그는 목적지를 향해 서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걷는 과정에 목적 자체를 의심했다. 이는 목표 중심의 현대사회에 대한 중요한 반론이다. 우리는 너무 자주 ‘어디로 가는지’보다 ‘얼마나 빨리 가는지’에 집착한다. 니체의 걷기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를 다시 전면에 세운다. 또한 니체의 걷기는 몸의 복권을 의미한다. 현대의 사유는 몸을 배제한 채 이루어진다. 감각은 방해물로 취급되고, 통증과 피로는 관리 대상이 된다. 그러나 니체는 몸을 제거한 사유를 불신했다. 그는 몸을 통과하지 않은 생각은 현실을 견디지 못한다고 보았다. 오늘날 정신적 소진과 무기력, 공허감이 만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생각은 넘치지만, 몸과 단절된 생각은 삶을 지탱하지 못한다.   니체가 카를 폰 게르스도르프에게 보낸 편지, 실스마리아, 1883년 6월 18일 니체의 걷기는 고독의 의미도 다시 묻는다. 현대사회에서 고독은 실패나 결핍으로 해석되기 쉽다. 그러나 니체에게 고독은 사유의 조건이었다. 그는 혼자 걷는 시간을 통해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과 언어에서 잠시 벗어났다. 그 고독 속에서만 기존 가치에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이는 끊임없는 연결과 노출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생각은 언제나 거리에서 시작된다. 무엇보다 니체의 걷기는 삶에 대한 태도다. 그는 고통을 제거하려 하지 않았고, 고통을 미화하지도 않았다. 다만 고통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현대사회는 불편함을 즉각 제거하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삶의 밀도 역시 함께 제거한다. 니체의 걷기는 말한다. 불편함을 견디는 만큼, 삶은 깊어진다고.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대표작인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1818). 이 작품은 니체의 철학이 등장하기 수십 년 전에 그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니체의 사상을 시각적으로 가장 잘 구현한 예술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니체의 대표 저서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와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 결국 니체의 걷기가 현대사회에 주는 가장 큰 의미는 이것이다. 생각을 바꾸기 전에 먼저 걸어야 한다는 것. 삶의 리듬을 바꾸지 않고서는 사유의 내용도 바뀌지 않는다. 니체는 철학을 이론으로 남기지 않았다. 그는 몸으로 살았고, 두 발로 사유했다. 그 점에서 그의 걷기는 지금도 여전히 급진적이다. 이 연재에서 니체는 단지 한 명의 철학자가 아니다. 그는 걷는 삶이 어떻게 사유를 바꾸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극단적인 사례다. 다음 회에서는 니체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걷기를 실천했던 또 다른 인물을 만날 것이다. 규칙과 반복 속에 걷기를 삶의 윤리로 만들었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걷기의 또 다른 얼굴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계속 길 위에 있을 것이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같은 질문을 품고. 걷기에 도움이 되는 책 다비드 르 브르통 느리게 걷는 즐거움 (북라이프) : 걷기를 이동 수단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으로 회복시키는 책이다. 그는 빠름과 효율에 중독된 현대 사회에서 걷기란 곧 속도를 거부하는 사유이자, 세계와 다시 관계 맺는 행위라고 말한다. 이 책에서 걷는다는 것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길 위에서 몸의 감각과 생각이 천천히 깨어나는 과정이다. 걷는 동안 우리는 시간의 압박에서 벗어나 풍경을 보고, 기억을 만나며, 자신과 조용히 대화한다. 느리게 걷는 즐거움 은 성취와 생산성의 언어에 지친 이들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충만함을 선물하는 사유의 산책이다. 빠르게 살수록 길을 잃는 시대에 이 책은 느리게 걷는 법으로 삶의 방향을 다시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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