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재난, 우리는 왜 늘 마지막 순서입니까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울진·삼척산불이 계속되는 8일 경북 울진군 울진읍 신림리 일대 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2022.3.8 연합뉴스
2022년 3월, 울진을 덮친 대형 산불은 한 지역의 재난을 넘어 국가적 위기였습니다.
그날 불길은 강한 바람을 타고 한울원자력발전소 코앞까지 다가왔습니다. 원전 보호를 위해 전국의 소방 인력과 장비가 집중됐고, 불길은 원전 부지의 ‘스위치 야드’ 인근까지 위협했습니다.
그날 밤, 우리는 하늘을 향해 기도했습니다. 불길이 원전을 넘지 않기를, 마을이 남아 있기를. 다행히 원전은 지켜졌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집과 밭, 삶의 터전은 불길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국가의 모든 역량이 ‘시설 보호’에 쏠린 사이, 주민의 삶은 뒷전으로 밀려났습니다.
재난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잿더미만이 아니었습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민의 안전은 누구의 몫인가’ -그 질문이 우리 마음속에 깊은 상처처럼 남았습니다.
2025년, 또다시 동해안 산불이 발생했을 때 우리는 불길이 울진을 비켜갔음에도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지진, 태풍, 산불, 정전, 단수… 이름만 달랐을 뿐, 울진의 재난은 늘 반복되었습니다.
이제는 재난이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일상의 공포’가 되어버렸습니다.
통신이 끊긴 순간, 시간은 멈췄습니다.”
2016년 경주 지진 당시, 후포고에 다니던 자녀들과 연락이 두절됐습니다. 전화도, 문자도, SNS도 모두 먹통이었습니다. 몇 분이었을까요. 하지만 그 짧은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무 소식도 들리지 않는 동안, 우리는 아이들이 무사하길 기도하며 두 손을 모았습니다.
2017년 포항 지진 때는 울진에서도 건물이 흔들렸습니다. 농업기술센터 가공교육관 2층에서 끓는 기름솥 앞에 서 있던 주민들은 공포 속에서 몸을 움츠렸습니다. 가스 밸브를 잠그는 일조차 잊고 말았습니다.
2019년 태풍 ‘미탁’ 때는 정전과 단수가 이어졌습니다. 식수조차 확보하지 못했고, 1901년에 지어진 오래된 가옥이 물길에 휩쓸려 사라졌습니다. 그곳은 단순한 주택이 아니라, 마을의 기억과 역사였습니다.
이 모든 재난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난 것은 기초 인프라의 취약성입니다. 통신망이 끊기고, 전기가 나가고, 수도가 마비되면 지역은 단절됩니다. 국가적 차원의 백업 통신망과 긴급 전력·수도 시스템 구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입니다.
국가 시설보다 먼저,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합니다.”
2022년 산불 당시, 국가 자원은 모두 원전 보호에 투입됐습니다. 물론 원전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국가의 존재 이유는 시설이 아니라 국민의 생명입니다. 원전을 지키며 주민의 삶을 잃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보호가 아닙니다.
재난 대응 자원의 배분 원칙을 다시 세워야 합니다. 국가 시설과 주민의 안전은 대립되는 가치가 아니라 함께 지켜야 할 공동의 목표입니다.
주민 없는 재난 대응은 실패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지시만 받는 수동적 존재가 아닙니다. 재난의 현장에서 몸으로 배운 경험과 지혜를 갖고 있습니다.
이제는 주민이 참여하는 ‘민·관 합동 재난 대응 기구’를 만들어야 합니다.
책상 위 매뉴얼이 아니라, 현장에서 통하는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대피소는 피난처가 아니라 희망의 공간이어야 합니다.”
울진의 대피소 현실은 참담합니다. 비상식량도, 의약품도, 난방시설도 충분치 않습니다. 노약자나 장애인을 위한 구조 시스템은 거의 없습니다. ‘대피소’라는 이름을 붙이기조차 부끄러운 수준입니다. 정기적인 훈련, 비상물자 확충, 그리고 취약계층을 고려한 맞춤형 대피 체계가 시급합니다. 대피소는 단순히 몸을 피하는 공간이 아니라, 재난 속에서도 사람이 사람답게 존엄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보루여야 합니다.
울진 주민들이 바라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권리, 그것뿐입니다. 불길이 번질 때, 비가 쏟아질 때, 전화 한 통이 통하고 불이 켜지는 세상 -그 평범함이 우리에게는 절실한 소망입니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둘 때, 국민은 비로소 국가를 신뢰할 수 있습니다.
이번 우리의 목소리가, 재난이 끝난 뒤 흩어지는 재처럼 사라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울진의 절박한 외침이 이 땅의 모든 재난 취약 지역을 위한 새로운 정책의 출발점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