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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논의, 껍데기는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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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 국면이 다시 열렸다 지난 제헌절 조정식 국회의장이 개헌의 깃발을 들었다.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넣고, 대통령의 계엄선포권을 제한하며, 권력구조를 개편하고, 선거관리를 개혁하겠다는 것이 그가 꼽은 핵심이었다. 2027년에 국민주권 개헌안을 마련하고 22대 국회가 10차 개헌을 매듭짓자는 시간표도 내놓았다. 곧 의장 직속 개헌자문위를 출범시키고 여야 개헌특위를 가동하겠다고 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제헌절 기념사에서 개헌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뒤로 한 걸음 물러서 있는 것이 정치적으로 낫다고 보는 것인지, 자신은 국정에 전념하고 개헌은 국회에 맡기겠다는 것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며칠 후 조 의장이 현직 대통령의 연임여부는 국민의 선택 문제라고 하자 파장이 일었다. 청와대 비서실장이 나서서 현행 헌법으로는 연임이 불가능하다고 서둘러 선을 그었다. 헌법 제128조 2항이 대통령 임기 연장을 위한 개헌은 그 제안 당시 대통령에게 효력이 없다고 못 박고 있으니, 법리로는 다툴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이 소동을 지켜보며 드는 생각은 따로 있다. 개헌을 말하는 목소리는 늘었는데, 정작 개헌으로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에 대한 알맹이가 없다. 연임이 되느냐 마느냐를 두고 며칠을 시끄러웠을 뿐, 이 나라의 권력 구조를 실제로 바꿀 두 가지, 곧 선거제 개혁과 주권자 권리 강화는 누구의 입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두 가지 먼저 선거제 개혁이다. 권력구조 개편을 말하면서 선거제를 빼놓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대통령을 4년 연임으로 바꾸고 총리를 국회가 추천하게 하는 것은 권력의 꼭대기를 손보는 일이지만, 그 권력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는 선거제가 정한다. 지금의 소선거구제는 표의 등가성을 깨뜨려 사표를 양산하고 표심과 의석의 심한 불비례성을 초래하며 거대 양당의 적대적 공생과 담합을 낳는다. 한 정당이 상대보다 조금만 앞서도 의석을 압도적으로 가져가고, 그 위에서 양당이 번갈아 권력을 독점한다. 이 구조를 그대로 둔 채 대통령 임기만 손보는 개헌은 집을 떠받치는 기둥은 그대로 두고 지붕 색만 바꾸는 일이다. 선거제가 왜 뿌리인지는 그 연쇄를 따라가 보면 드러난다. 선거제도는 선거결과와 정당구조를 정하고, 의석수와 정당구조가 의회의 권력구조를 정하며, 의회의 권력구조가 정부의 권력구조를 정한다. 소선거구제가 양당제를 낳고, 양당제가 의회를 두 거대 정당의 각축장으로 만들며, 그 의회 구성이 대통령과 행정부의 권력 지형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선거제는 대의민주주의와 정당민주주의와 선거민주주의의 핵심이자 뿌리다. 헌법의 조문을 몇 개 고치는 것보다 선거제를 바꾸는 것이 이 나라의 권력 지형을 더 깊이 바꾼다는 점에서 선거제 개혁이야말로 실질적 의미의 개헌이자 근본적인 개헌이다. 이 뿌리를 건드리지 않고 가지만 다듬는 개헌 논의는 개헌의 시늉일 뿐이다. 알맹이인 선거제를 빼놓은 채 껍데기만 손보면서 권력구조를 개편한다고 말하는 것은 국민 앞에 개혁의 외양을 내세워 실은 대리인들 사이의 자리다툼을 벌이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7일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시민주도헌법개정전국네트워크가 연 개헌안 가결 촉구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6.5.7. 연합뉴스 다음이 더 중요하다. 주권자 권리의 강화, 곧 국민발안과 시민의회의 법제화다. 우리 주권자는 두 번의 시민혁명을 해냈다. 광장에서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새 정부를 세울 힘이 시민에게 있음을 두 번이나 증명했다. 그런 시민이 이제 중대사안에 대한 직접민주주의와 추첨민주주의의 도입을 바란다. 자기 손으로 법안을 발의하고, 잘못된 법을 거부하고, 대표를 소환하고, 중요한 문제를 이해관계 없는 시민들의 숙의에 부치기를 원한다. 그런데 정치권은 이 요구에 귀를 내주지 않고 주류 언론은 포퓰리즘이라는 한마디로 간단히 치워 버린다. 이 두 제도의 무게를 정확히 재야한다. 국민발안과 시민의회는 정치와 경제, 사회에 만연한 과두지배를 시민의 개헌안과 입법안, 입법권고안으로 깰 수 있는 주권자 시민의 법적 무기다. 대통령과 지자체장, 국회와 지방의회, 그리고 그 배후의 거대 양당 같은 정치과두제는 물론이고 재벌조차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주권자 시민의 독립 입법권이다. 이해당사자들이 손대지 못하는 곳에서 시민이 스스로 규칙을 세울 수 있다는 것, 여기에 이 제도의 힘이 있다. 그렇기에 이것은 단순한 제도 하나의 신설이 아니라 권력분립의 근본을 다시 묻는 일이다. 우리가 먼저 유념해야 할 권력분립은 입법과 행정, 사법 사이의 삼권분립이 아니라 주권자와 대의권력 사이의 일차적인 권한 분배, 즉 선출직과 법관에게 위임된 권력과 주권자가 직접 쥔 권력의 분배다. 그런데 지금 주권자가 손에 쥔 것은 선거권 하나뿐이다. 몇 년에 한 번 대표를 뽑고 나면 그것으로 끝이다. 이 빈약한 주권자의 몫을 국민발안권과 시민의회 요구권으로 넓히는 것, 이것이 주권자와 대의권력 사이의 권력분립을 바로 세우는 일이다. 개헌 논의는 무엇보다 지금의 이 권력분립이 과연 온당한가라는 물음에 집중되어야 한다. 비례대표제와 다당제, 국민발안과 시민의회에 대한 정치권의 침묵은 우연이 아니다. 두 의제는 근본적으로는 정당과 선출직의 영향력이 직접 미치지 않는 제2의 정치영역, 즉 시민입법과 시민정치 영역을 만들어내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침묵에는 이유가 있다 선거제 개혁이 말해지지 않는 이유는 그것을 요구할 제3 세력이 정치권 안에 없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소선거구제의 최대 수혜자는 제1당이다. 상대다수에 그친 지지를 압도적 의석으로 바꿔 주기 때문에 제1당을 노리는 거대양당은 스스로 이 발판을 걷어찰 이유가 없다. 거대양당 중의 하나가 만년 2등으로 굳어져서 셈법이 바뀌지 않는 이상 양당 합의로 소선거구제를 바꾸는 건 불가능하다. 영남 독점에 토대를 두고 제1당 지위를 오랫동안 누려온 국힘당은 21대와 22대 총선에서 연거푸 패배하고 간신히 개헌저지 의석을 확보했을 뿐이지만 여전히 소선거구제에 미련을 둔다. 그나마 소선거구제 아래서 제1당 가능성이 높다고 믿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이런 상황을 은근히 즐긴다. 선거법 개정은 여야합의가 필수적이라고 노래 부르며 절대다수 의석을 갖고도 선거법 개정을 손 놓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국민발안과 시민의회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정치권이 직접 책임지고 싶은 사안에서 이것을 완충 장치로 활용할 여지가 아주 없지는 않다. 그러나 결정적인 대목에서 정치권은 이 둘을 지독하게 꺼린다. 이유는 하나다. 정당도 의회도 이것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정치권이 열어 둔 시민참여는 당국이 소집하는 공론조사까지다. 여기서는 대통령이나 국회가 의제를 정하고, 시점을 정하고, 질문의 틀을 짠다. 통제권이 정치권 손에 남아 있는 것이다. 반면 시민이 스스로 발의하는 국민발안과 시민이 요구해서 소집하는 시민의회는 그 통제권을 시민에게 넘긴다. 정치권이 원하지 않는 의제가 정치권이 피하고 싶은 시점에 정치권의 각본 없이 굴러가는 것, 이것이 정치권이 두려워하는 지점이다. 두 제도를 깎아내리는 방식도 다르다. 중대사안을 국민이 직접 결정하는 직접민주주의는 포퓰리즘이라는 딱지를 붙이기 쉽다. 국민표결 전에 일정한 숙의과정이 보장되지 않아서 사안을 잘 모르는 대다수의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판단에 나라를 맡길 수 없다는 오래된 경계심이 발동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추첨 시민의회는 그 딱지를 붙이기 쉽지 않다. 이해관계 없이 추첨으로 뽑힌 시민들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학습하고 숙의하는 과정이 필수여서, 즉흥적 감정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민의회를 향해서는 다른 공격이 나온다. 선거로 뽑힌 것도 아니고, 구성과 숙의 과정에서 조작 가능성이 있으며, 한 번 일하고 흩어져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기구에 무엇을 맡기느냐는 것이다. 어느 정도 합당한 우려이지만 제도를 잘 설계해서 풀 문제이지 제도 자체를 봉쇄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최소한의 개헌으로 무엇이 달라지는가 이런 조건에서는 개헌이 실제로 이뤄진다 해도 국민의힘이 소극적인 이상 합의 가능한 최소한을 넘어서기 어렵다. 그 최소한의 개헌이 어떤 모습일지는 지금 거론되는 항목만 봐도 짐작된다. 헌법 전문에 5·18을 넣고, 대통령 임기를 4년 연임으로 바꾸고, 총리를 국회가 추천하게 하고, 감사원을 국회로 넘기고, 비상계엄 요건을 강화하고, 선관위 구성 방식을 손보는 정도다. 물론 대법원장의 법관인사권도 떼어내야 마땅하고 이른바 3부구성주의도 폐기해야 마땅하다. 기본권과 경제조항도 손볼 대목이 왜 없겠는가. 문제는 항목이 늘어날수록 합의가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그나마 합의 가능한 개헌사항으로 거론되는 항목들이 무의미하다는 말이 아니다. 5·18의 헌법적 자리매김은 값지고, 계엄요건 강화는 우리가 겪은 일을 생각하면 절실하다. 그러나 이것들을 다 합쳐도 이 나라의 권력구조가 얼마나 달라지는지 물으면 답은 초라하다. 대통령의 연임을 가능하게 하고 총리를 국회가 추천하는 정도로는 대리인들의 권력독점을 크게 흔들지 못한다. 더욱이 재벌체제가 그대로 남는다. 방금 대법원장의 법관인사권을 떼어내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더 큰 과제의 한 조각이다. 권력구조 개편이 진짜로 겨눠야 할 것은 제왕적 대통령제와 제왕적 대법원장제 자체다. 우리 대통령은 행정부 수반을 넘어 입법과 사법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우는 집중권한을 갖고 있고, 대법원장은 대법관 제청권과 법관 인사권, 사법행정권을 한 손에 쥐어 사법부 전체를 수직으로 지배한다. 한 사람에게 권력이 이렇게 모이면 견제는 형식이 되고 그 권한은 남용의 유혹에 노출된다. 개헌이 권력구조 개편을 말한다면, 이 두 기관을 최대한 탈제왕화하는 것이 필수 과제다. 대통령의 권한을 나누고 사법부의 인사권을 분산해 어느 한 사람도 기관을 통째로 좌우하지 못하게 하는 것, 이것이 대통령 임기를 4년 연임으로 바꾸는 일보다 훨씬 근본적이다. 권력구조나 기본권, 경제조항 개헌이 한참 미진하더라도 비례대표제와 다당제를 뿌리내려 민심을 그대로 반영하고 국민발안과 시민의회 등 주권자 권리를 강화하면 시민 주도로 점차 훨씬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 주권자 시민에게 국민발안권, 국민거부권, 국민소환권, 시민의회 요구권을 줘서, 자기 손으로 법을 발의하고, 잘못된 법을 거부하고, 대표를 불러들여 파면하고, 중대한 문제를 시민의 숙의에 부쳐 권고하게 하면, 주권자 시민이 직접 잘못된 법은 솎아내고 미진한 법은 보완할 수 있다. 대통령과 대법원장의 탈제왕화가 대의권력 안의 집중을 푸는 일이라면, 주권자 권리의 확대는 대의권력과 주권자 사이의 몫을 다시 나누는 일이다. 이 둘이 함께 가야 권력구조 개편이 완성된다. 그리고 이것이 대통령 임기를 만지작거리는 것보다 이 나라를 훨씬 깊이 바꾼다. 그렇다면 어떤 길로 가야 하는가 핵심은 정치관계법, 특히 선거법 개정의 불문율처럼 행세해온 여야합의 도그마를 깨는 데 있다. 지금까지는 선거제를 포함한 정치관계법을 여야합의, 즉 여야담합으로 고치는 것이 관행이다. 그러나 이 관행이야말로 개혁을 가로막는 주범이다. 국힘당이 반대하면 선거제를 못 바꾼다는 논리가 여기서 나온다. 게임의 규칙을 그 규칙의 이해당사자들이 만장일치로만 바꿀 수 있다면, 유리한 쪽이 거부권을 쥐는 셈이라 규칙은 영영 바뀌지 않는다. 우물쭈물하다가 2028년 총선에도 세 번째로 위성정당을 만들 셈인가. 여야합의가 안 된다는 이유로 거대여당 민주당이 국힘당의 위성정당 전술에 또 끌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방법이 없지 않다. 선거제와 개헌 등 정치개혁에 관한 한 야당을 우회해서 직접 주권자 국민을 주체로 만드는 것이 맞다. 이 빗장을 여는 길이 시민의회다. 선거제 개혁은 주인인 주권자가 나서야 할 일이지 직접적 이해당사자인 여야 대리인의 합의에 기댈 사안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추첨 시민의회의 숙의에 맡겨 그 입법 권고를 존중해 처리하겠다는 방침을 밝혀야 한다. 이해관계 없는 시민들이 학습하고 숙의하면, 특정 정당에 유리하게 비튼 방안은 걸러지고 표의 등가성이라는 원칙에 맞는 결론이 남는다. 위성정당 같은 꼼수가 다시는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 장치도 그 안에서 설계된다. 촛불 혁명과 응원봉 혁명을 해낸 위대한 국민의 집단지성에 맡기면 공명정대한 선거제가 마련될 수 있다. 시민의회가 내놓을 결론의 방향은 어렵지 않게 그려진다. 위성정당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비례 의석을 100석 이상 늘리고, 지금의 50퍼센트 연동형을 100퍼센트 연동형으로 정상화하며, 지방의회도 비례대표제나 4인 내지 5인을 뽑는 단기이양식(STV)으로 바꿔서 준비례대표제로 구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선거제를 바로잡는 것이 정치개혁의 첫걸음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국민발안 개헌권과 국민발안 입법권을 주권자 시민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시민이 직접 개헌을 발의하고 법률을 발의할 수 있게 하는 원포인트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쳐 통과시키면, 민심이 개혁의 동력이 된다. 선거제 개혁으로 정치의 문법을 바꾸고, 주권자 권리로 개혁의 엔진을 시민에게도 넘기는 것이다. 이것이 되면 헌법 자체가 상대적으로 연성화한다. 시민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개헌 시민의회 소집을 요구하거나 개헌안 국민발안을 내서 국민투표로 확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민의 압도적 지지를 긴 호흡으로 문제는 이 원포인트 개헌안도 국민의힘이 반대하면 막힌다는 데 있다. 국민의힘의 반대를 넘어서는 데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압도적 국민 지지로 밖에서 누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긴 호흡으로 이해득실을 흐려 안에서 반대할 이유를 없애는 것이다. 하나는 여론의 힘으로 반대를 무릅쓰지 못하게 하고, 다른 하나는 애초에 반대할 동기를 지운다. 먼저 압도적 국민 지지다. 선거제 개혁안과 개헌안을 이해관계에 얽혀 합의가 난망한 국회에 맡기지 말고 이해관계가 없는 추첨 시민의회에 맡기는 혁신 방안에 대해 압도적인 국민 지지를 조직하고 확인해야 한다. 정치권과 보수언론이 포퓰리즘과 조작가능성을 들어 반대해도, 주권자 권리에 목마른 시민들은 좀처럼 넘어가지 않는다. 우리 국민 대다수가 스위스와 캘리포니아와 독일 같은 OECD 여러 나라는 물론이고 대만에서도 시민의회 방식이나 국민발안 방식이 선거법 개정과 개헌 등 정치개혁에 널리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에게도 꼭 필요하다는 지지가 압도적 다수로 모일 것이다. 이래야만 국민의힘도 국민 여론에 압도돼 무작정 반대를 못한다. 다음으로 긴 호흡이다. 거대 양당이 모두 개헌에 개방적인 자세를 가지려면 그 개헌의 효과가 어느 정당에 유리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어야 한다. 눈앞의 이익이 걸리면 손해 볼 쪽이 반드시 반대해서 개헌저지선을 넘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답은 시간의 지평을 늘려 잡는 것이다. 지금 당장 발효하는 개헌으로 밀어붙이면 이해득실이 선명해 반대에 부딪히지만, 발효시점을 멀리 두면 그 무렵의 정치지형을 아무도 장담할 수 없어 이익계산이 지배하지 못한다. 구체적으로는 양당의 권력투쟁과 잇속계산으로 합의가 안 되는 개헌조항의 발효 시점을 단계화하고 차등화하는 것이 방법이다. 어떤 조항은 확정즉시, 어떤 조항은 다음 대통령 임기부터, 어떤 조항은 24대 국회부터, 어떤 조항은 차차기 대통령 임기부터 효력을 갖게 해서 당장의 이익 계산으로 반대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물론 더디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계속 못 하는 것보다는 낫다. 개헌의 진짜 물음 돌아보면 지금의 개헌 논의가 비켜가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연임이 되느냐 마느냐, 총리를 누가 추천하느냐는 대리인들 사이의 권력 배분에 관한 물음이다. 그러나 개헌이 진짜 물어야 할 것은 다른 데 있다. 대의권력 안에 집중된 힘을 어떻게 풀 것인가, 주권자인 시민이 자기 손에 어떤 권한을 남겨두고 대리인들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이다. 제왕적 대통령과 제왕적 대법원장에게 몰린 권력을 나누는 일이 앞의 물음이고, 선거권 하나뿐인 주권자에게 사표를 없애고 표의 등가성을 보장하는 선거법을 만들어주고 국민발안과 국민소환, 시민숙의의 권리를 돌려주는 일이 뒤의 물음이다. 두 번의 시민혁명으로 이 나라를 구한 주권자가 정작 헌법 안에서는 몇 년에 한 번 투표하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광장에서는 주인이었다가 광장을 나서면 구경꾼이 되는 것이다. 개헌이 이 간극을 메우지 못한다면, 아무리 조항을 손보아도 그것은 대리인들의 개헌일 뿐 주권자의 개헌이 아니다. 선거제를 바로잡아 시민의 표의 값을 동등하게 되찾아 주고, 국민발안과 시민의회로 시민에게 실질적 권력을 돌려주는 것. 이것이 개헌이 놓쳐서는 안 될 핵심이다. 이 알맹이를 채우면 개헌은 주권자의 것이 되고, 이것을 빼놓으면 아무리 조항을 늘려도 껍데기만 남는다. 일찍이 신동엽은 ‘4월의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물러가라’고 외쳤다. 그 절규가 60년도 더 지난 지금의 개헌 국면에 그대로 얹힌다. 알맹이인 선거제와 주권자 권력을 비켜간 채 껍데기만 매만지는 정치권의 개헌논의 앞에서 시인이 살아 있다면 다시 껍데기 개헌논의는 가라고 외쳤을 것이다. 정치권이 침묵하고 언론이 외면해도, 주권자가 원하는 개헌이 무엇인지는 이미 두 번의 광장이 답했다. 그 답을 헌법에 새기는 일이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 kwaknh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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