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슬, 순수와 집념의 삶이 빚은 노래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1970년 그가 1학년을 다시 다닐 때였다. 첫해 그는 워낙 자주 결석해 유급했다.
초여름 어머니는 정릉에서 수유리로 멀찌감치 이사했다. 살림살이가 어려워 시내에서 더 멀리 갔지만, 옮긴 집에는 연탄 등을 쌓아두던 반지하실이 딸려 있었다. 그동안 학교 복도 등 더부살이로 그림을 그렸던 김민기는 기뻤다. 곰팡내만 참으면 화실로 쓸 만했다.
그리고 싶을 때 그리고, 싫증 나면 이런저런 산문을 쓰고, 영감이 떠오르면 노랫말도 썼다. 기타를 튕기다가 멜로디가 떠오르면 노래를 지을 수 있었다. 노래도 그림도 신통치 않으면 집에서 지척인 동산을 거닐었다. 공동묘지 정도는 아니어도, 돌보지 않는 묘지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오르는 사람도 없었다. 호젓이 머물기엔 안성맞춤이었다.
2021년 아침이슬 50년 헌정무대로 꾸며진 KBS 열린음악회 화면 캡처. 이 땅의 힘겨웠던 한 시대를 함께 살아온 모든이에게 이 노래를 바칩니다는 김민기의 헌사가 눈길을 끈다. 화면속 사진은 1990년 겨레의 노래 공연에서 김민기가 직접 아침이슬을 부르고 있는 모습. 사진: 학전 제공
‘아침이슬’은 그 반지하실에서 탄생했다. 한국의 대중음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려놓았다는 노래, 애국가보다 더 많이 불렸다는 노래, ‘한국의 70년대는 아침이슬과 함께 시작됐다’라고 하는 그 노래다. 압제에 대한 저항, 저항의 좌절로 말미암은 염세와 회의로 점철된 시대였다.
2018년 9월 13일 JTBC 뉴스룸 ‘손석희의 문화초대석’에서였다. 김민기는 그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던 ‘아침이슬’ 작곡의 전후 사정을 이렇게 전했다.
미술대학에 입학하고 1년 뒤 정릉에서 수유리 우이동(실은 수유리)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주변에 야산이 있었고, 야산엔 무덤도 여기저기 몇 기 있었죠. 집에는 연탄도 쌓아두고 했던 반지하 창고가 있었고요. 처음으로 제 개인 작업실로 쓸 공간이 생긴 거였죠. 그림은 주로 밤에 그렸는데, 하다 보면 막힐 때가 있잖아요, 그러면 기타를 잡고 노래를 짓고, 그러다가 다시 그림 작업으로 돌아가곤 했죠. …어느 날 밤중이었어요. 그림이 막혀서 기타 치며 짓다 만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죠. 그게 ‘아침이슬’이었는데….”
아침이슬 탄생 과정
김민기의 노래 짓는 방식은 다른 이들과 좀 달랐다. 김민기는 즐겨 산문을 썼다. 생각나는 대로 쓰는 일종의 잡문이었다. 그런 글을 쓰다 보면 마음에 꽂히는 낱말이나 문장이 나타나곤 했다. 그것을 되뇌다 보면 노랫말이 되고, 노랫말을 웅얼거리다 보면 멜로디가 따라 나왔다. 이 과정을 되풀이하다 보면 노랫말도 멜로디도 정리됐다. 그의 노래에서 멜로디는 노랫말에 스미고, 노랫말은 선율에 이끌려, 발음은 물론 메시지까지 선명해지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아침이슬’을 정리할 당시, 김민기는 가사 때문에 한동안 끙끙 머리를 싸맸다. 도입부와 전환을 거쳐 절정으로 넘어가는 부분에서 노랫말과 선율이 낱말 하나에 막혀 꼼짝 못 하고 있었다. 한낮에 찌는 더위는 00 시련일지라”에서 00을 몇 인칭으로 할 것인지였다. 처음 김민기는 00을 삼인칭 ‘그의’로 상정하고 있었다. 고뇌와 모색과 결단의 과정인데, 그것을 남 얘기하듯 하다 보니 노랫말도 노래도 절실하지 않았다.
그날도 답답한 마음에 동산으로 갔다. 새벽 먼동이 트고 있었고, 여명에 풀잎의 이슬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데 문득 입안에서 ‘그의’가 ‘나의’로 바뀌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1인칭 즉 나의 문제로 바뀌자 막혔던 곳이 뻥 뚫리고, 이어지는 대목이 술술 나왔다. ‘나 이제 가노라, 저 푸른 광야로,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김민기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를 ‘나’로 바꾸자, 감정이입이 훨씬 잘 되고, 당시의 시대상과 마주한 ‘나’의 기분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었다.”
훗날 그를 아는 많은 몇몇 명망가들은, 그가 그림에 빠져있고, 노래를 즐기는 ‘순수한’ 청년이라며 마치 정치 사회적 현실과 담쌓고 산 것처럼 묘사하지만, 그는 그림을 그릴 때나 노래를 지을 때나, 무언가 결단을 위해 모색하고 고뇌했다. 그림의 침묵 속에서, 노래의 발언 속에서 그는 ‘당대의 시대상, 당대의 모순’과 마주하고 있었다.
다른 노래와 달리 난산의 과정을 거친 ‘아침이슬’은 그의 낯가림 때문에 무대 뒤에서 한참을 배회해야 했다. 세상에 그 모습을 알릴 기회를 찾은 게 외국 유학을 떠나는 한 선배의 환송연이었다. 강준만의 에 따르면 1970년 8월 28일 태평로의 강당에서였다. 그러나 양희은의 기억은 다르다. 그의 자전적 에세이 에는 1971년 초봄 꼭대기 층 강당이라고 되어 있다. 1971년이면 양희은이 재수생 신분에서 벗어나 대학 초년생 시절이었고, 김민기와도 가깝게 지내던 때였다. 2월 그는 김민기의 기타 반주로 생애 최초의 ‘리사이틀’을 청개구리 홀에서 했던 터였다.
다음은 ‘아침이슬’이 없었다면 나는 가수가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라고 했던 양희은의 기억이다.
그날 김민기가 처음 듣는 노래를 부르는데 홀딱 반했다. 한 소절도 안 놓치려 까치발을 들고 봤다. 그 모습을 본 어떤 사람이 노래가 끝난 뒤 나에게 ‘아까 민기가 악보에 뭔가 끄적이다가 버리는 것을 봤다’라고 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실제로 악보가 찢어진 채 바닥에 버려져 있었다. 그것을 모두 주워 집에 돌아와 테이프로 맞췄다.”
김민기 씨는 처음엔 ‘아침이슬’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한번 부르고 악보를 버렸을 정도니까. 그러나 나는 그가 처음 부르던 순간 그 노래에 끌리듯 빠져버렸다. 그가 버린 악보 종이를 주워 연습했고 언젠가 꼭 녹음하겠다고 생각했다. 원작자 김민기보다 먼저 내가 ‘아침이슬’을 취입한 건 그 때문이었다.”
양희은은 테이프로 짜맞춘 악보를 지금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대중음악계 특히 팝과 모던포크 분야의 큰손이었던 CBS의 김진성 피디, 경음악 평론가이자 음악방송 진행자였던 최경식의 기억은 또 다르다. ‘진정한 한국 포크’라고 부를 만한 노래의 탄생에 가장 중요한 배후 역할을 했다는 이들이다. 두 사람은 1970년 5월 이라는 프로그램을 기획 제작하며 김광희, 김민기, 조동진, 이주원, 양병집, 현경과 영애 등을 발굴했다. 이들 젊은 가수들은 두 사람의 손에 이끌려 자작곡을 녹음하고, 방송에 송출하고, 앨범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CBS 라디오는 ‘포크송의 본산’처럼 되었다.(한국 팝의 고고학 1970,신현준, 최지선 공저)
다음은 김진성 피디의 기억이다. YWCA 측으로부터 ‘청개구리의 집 행사’를 프로그램에 담아 방송하면 어떻겠냐는 제의를 받았어요. 해서 공개방송용으로 녹음하러 갔는데 ‘도비두(김민기, 김영세)’라는 듀엣이 나와서 피터 폴 앤 메리의 를 부르더군요. 노래를 매우 잘하기에 한국 노래는 없느냐고 물었더니 다음날 방송국에 찾아왔어요. 그래서 처음 부른 노래가 예요. 김민기의 기타 반주로 녹음테이프를 직접 만들어서 방송했지요.”
아마도 이백천과 김민기 사이에 ‘영어 아니면 말을 못 하느냐’ ‘영어 노래 말고 우리말 노래는 없느냐’라며 벌어진 일진일퇴 공방전 직후의 일이었던 것 같다. 김진성의 회고는 이렇게 이어진다. ‘친구’가 방송에 나가자마자 신청 엽서가 엄청나게 오는 거예요. 그래서 김민기를 다시 찾아 새로운 노래를 녹음해 방송했지요. 그 노래가 입니다.”
양희은에게 모든 것을 내어준 김민기
그 시점이 1970년 말이었다. ‘아침이슬’은 최경식이 진행하는 가운데 코너를 통해 그야말로 뻔질나게 송출됐다.
이듬해 7월 양희은은 ‘김추자 못지않은 가수가 될 수 있다’라는 킹레코드사 박성배 사장의 회유와 강권에 따라 ‘아침이슬’ 등 김민기의 노래를 녹음했고 9월 첫 앨범을 발매했다. 녹음에 앞서 김민기에게 그런 계획을 밝히자, 김민기는 이렇게 한마디만 하더란다. 그래. 알았어.”
양희은이 부른 김민기의 아침이슬은 금세 세상에 알려졌다. 하지만 1973년 건전가요에 선정되었다가 1975년 금지곡이 되었다. 사진은 아침이슬을 담은 1971년 발매된 양희은의 1집 앨범. 사진 출처: 위키백과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양희은은 그런 김민기에게 이런 헌사를 전했다.
김민기는 작사, 작곡, 편곡, 연주 등 모든 일을 아무 계산 없이 식구에게 하듯 베풀어주었다. 도무지 계산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순수는 늘 나의 타협과 비교가 됐다. 내가 먹고살기 위해 노래를 돈과 바꾸며 타협할 때, 그는 때 묻지 않은 순수와 고집불통으로 자기를 지키며 살았다.”
김민기는 양희은의 앨범 제작 때 자신이 직접 기타 반주를 한 것은 물론 청개구리 홀에서 함께 활동했던 시각장애인 가수 이용복, 작곡가 김광희 등에게도 부탁해 반주를 맡도록 주선했다. 이용복은 당시 12줄짜리 기타의 대가로 유명했고, ‘세노야’를 지은 김광희는 피아노를 맡았다. 이렇게 탄생한 양희은의 1집 에는 ‘아침이슬’ 외에도 김민기 작사 작곡의 ‘그날’이 포함돼 있고, 고은의 시에 선율을 입힌 ‘세노야’도 있었다. ‘세노야’의 작곡자는 오랫동안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는데, 그가 바로 김광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