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문의 정석 이강인과 손흥민에게 배운다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최우규 전 대통령 연설기획비서관
지켜보는 모든 이를 답답하게 했던 한국 국가대표 축구팀 내 불화가 종결되는 국면이다. 불화의 당사자로 지목됐던 손흥민, 이강인 선수가 21일 화해하고 사과문을 게재하면서다.
이강인 선수는 이날 손흥민 선수를 영국 런던까지 찾아가 대화를 나누고 사과했다. 손흥민 선수는 이를 받아들였다. 둘은 함께 사진을 찍어 화해했음을 공표했다. 사과문도 각각 게시했다.
두 선수가 올린 사과문은 '사과문의 정석'을 보여준다. 사과는 네 가지 요소를 갖춰야 한다. '사실 인정, 진정성, 문제 해결 방안 제시, 재발 방지 약속'이다. 이중 하나라도 빠지면 제대로 된 사과문이 아니다.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사실 인정이다. '내가, 혹은 나로 인해 그런 잘못이 벌어졌다'라는 사실을 깨끗하게 인정해야 한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입방아에 오른 지 한참 된 뒤에 하면 마지못해 사과했다는 인상을 준다.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제대로 된 사과는 아니다.
진정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잘못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해야 한다는 마음이 사과의 표현이나 방식에서 명백하게 드러내야 한다. '어쨌거나 사과하겠다', '당신이 요구하니 사과하겠다'라는 투는 금물이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마지못해서 하는 모양새다. 진정성을 의심받는다.
영국 추리 소설가 길버트 체스터턴은 에세이집 <보통 사람(The Common Man)>에 이렇게 썼다.
"거만한 사과는 모욕이나 다름없다…피해자 측은 부당한 취급에 금전적 보상을 원하는 게 아니라, 상처를 입었기에 치유를 원한다(A stiff apology is a second insult…the injured party does not want to be compensated because he has been wronged; he wants to be healed because he has been hurt)."
전적인, 진심이 담긴 사과, 이게 어렵다. 그러다 보면 사과 앞에 수식이 많이 붙는다. "내가 그런 의도로 한 것은 아닌 데 그렇게 받아들여지면 미안하다", "선의로(진짜 '좋은 뜻'일 수도 있고, 법률 용어로 '잘 모르고'라는 뜻일 수도 있고) 한 일인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돼서 미안하다"라는 식도 있다. 모두 틀렸다. "그 점은 전적으로 우리 잘못이다"라고 해야 한다.
'미안하다. 끝'. 이것도 사과가 아니다.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지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재발 방지책도 내놓아야 한다. 그래야 피해자나 제3자도 사과의 진정성을 인정한다. 애매한 방지책, 잘하겠다는 정도의 두루뭉수리도 안 된다. 눈에 보이고 피부에 느껴질 정도로 뚜렷해야 한다.
중요한 요소 중 하나 더 꼽는다면 사과하는 사람의 자격이다. 누가 사과하느냐. 당사자가 하는 게 맞다. 대리(代理) 사과가 불가피하다면, 직계 존비속 혹은 상사가 해야 한다. 그래야 책임지는 모습을 보인다고 받아들인다.
손흥민이 21일 "강인이가 진심으로 반성하고 나를 비롯한 대표팀 모든 선수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했다"며 함께한 사진을 공개했다. 2024.2.21 [손흥민 인스타그램 캡처]
이강인 선수가 이날 소셜미디어에 올린 사과문을 보면 첫 줄에 "지난 아시안컵 대회에서, 저의 짧은 생각과 경솔한 행동으로 인해 흥민이 형을 비롯한 팀 전체와 축구 팬 여러분께 큰 실망을 끼쳐드렸습니다"라고 썼다. 토를 달지 않은 깔끔한 사과다.
그는 "흥민이 형이 주장으로서 형으로서 또한 팀 동료로서 단합을 위해 저에게 한 충고들을 귀담아듣지 않고 제 의견만 피력했다"라며 "그날 식사 자리에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봐도 절대로 해서는 안 될 행동이다"라고 썼다. 사실의 인정이다.
이강인 선수는 직접 행동으로 진정성을 보였다. 런던까지 가서 손흥민 선수에게 사과했다. 대표팀 선배, 동료에게 개별로 연락해 사과했다. 그러면서 "저의 사과를 받아주시고 포용해 주신 선배님들과 동료들에게도 이 글을 통해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라고 썼다. 이 정도 진정성을 보이기는 쉽지 않다.
이번 사태의 잘못이 오롯이 자신에게 있다고 밝혔다. 문제 해결 방식을 놓고 다른 누구보다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제안한 셈이다. 이강인 선수는 "저의 행동 때문에 함께 비판의 대상이 된 선수들도 있다. 그들에게 향한 비판 또한 제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썼다. 갈등 상황에 처해 봤다면 절감하겠지만, 모두 내 책임이라고 공표하는 일은 극히 어렵다. '나만 억울하게…'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강인 선수는 재발 방지 약속도 했다. "여러분들께서 저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만큼 실망이 크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앞으로 축구선수로서 또 한 사람으로서 발전을 위해 더욱 노력하고 헌신하는 이강인이 되겠다. 죄송하다. 그리고 감사하다." 축구선수가 열심히 뛰겠다는 말보다 더 중요한 약속이 뭐가 있겠나.
손흥민 선수도 사과에 가까운 석명(釋明) 글을 소셜미디어에 냈다. 그는 "강인이가 진심으로 반성하고 저를 비롯한 대표팀 모든 선수들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했다"라고 전했다.
손 선수는 "저도 제 행동에 대해 잘했다 생각하지 않고 충분히 질타받을 수 있는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라며 "저는 팀을 위해서 그런 싫은 행동도 해야 하는 것이 주장의 본분 중 하나라는 입장이기 때문에 다시 한번 똑같은 상황에 처한다고 해도 저는 팀을 위해서 행동할 것"이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어 "앞으로 더 현명하고 지혜롭게 팀원들을 통솔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약속했다.
손흥민 선수는 "그 일 이후 강인이가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 번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달라. 대표팀 주장으로서 꼭 부탁드린다"라고 썼다. 그러면서 "앞으로 저희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이 이 계기로 더 성장하는 팀이 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다. 다시 한번 대한민국 대표팀 주장으로서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라고 재차 용서를 구했다.
손흥민 선수 글에서 두 가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우선 이강인 선수와 화해하고 앞으로 불문에 부치겠다는 생각인 듯하다. 경기 직후 심경과는 달리 앞으로도 부르면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을까 고민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두 선수 모두 '유감' 따위의 애매한 용어를 쓰지 않고 '잘못', '사과'라고 콕 집어 썼다. 이로써 축구 국가대표팀 갈등 사태는 해결 국면으로 접어드는 것 같다. 두 사람이 다시 국가 대표 선수로 뛸지는 나중 문제다.
젊은 두 선수의 사과문을 읽으며 잘못해 놓고도 역으로 성을 내거나, 마지못해 "옜다, 사과다, 받으라"라는 뻔뻔한 기성세대 군상이 떠올랐다. 나도 그 기성세대에 속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두 선수 말고 사과해야 할 사람들이 있다. 갈등이 수면 위로 올라오자, 안타까워하기는커녕 부추기고 퍼 나른 이들이다. 돈을 벌기 위해서였든, 남을 욕하면서 도파민을 얻으려고 했든, 마찬가지다. 잘못된 일이다. 큰 기대는 않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