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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신의 이름으로 혁명을…호메이니, 그 불편한 거울

신의 이름으로 혁명을…호메이니, 그 불편한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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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성인(聖人)이라 부르고, 어떤 사람은 악마라 부른다. 그런데 이 양쪽이 동시에 옳을 수 있다면? 루홀라 호메이니(Ruhollah Khomeini, 1900~1989).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창건자이자, 20세기 가장 강렬한 혁명가 중 하나. 그는 근대 역사에서 가장 흥미롭고, 가장 두렵고, 가장 논쟁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한국 현실과 꽤 많이 겹쳐 보인다. 호메이니.(위키피디아) 터번을 쓴 혁명가의 등장 호메이니는 1900년 이란 중부 소도시 호메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가 다섯 달 만에 세상을 떴고, 어머니와 고모마저 그가 열여섯 살이 되기 전에 죽었다. 그러니까 이 사람, 출발부터 드라마틱했다. 이후 이슬람 신학도시 콤(Qom)에서 수십 년간 공부하고 가르치며 이슬람 법학자(파키흐)로 이름을 날렸다. 그런데 이 조용한 신학자가 갑자기 정치판에 뛰어든 건 1960년대 초반이다. 팔레비 왕조의 모하마드 레자 샤(1919~1980)가 미국의 뒷배를 받으며 이른바 백색혁명 이라는 걸 밀어붙일 때였다. 여성참정권 확대, 토지개혁, 서구식 근대화, 듣기엔 그럴듯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개혁의 실질적 수혜자가 왕실과 외국자본이었다는 점이다. 농민은 더 가난해졌고, 종교기관은 탄압받았으며, 비밀경찰 사바크(SAVAK)는 반대파를 마구잡이로 잡아들였다. 호메이니는 이에 맞서 강단에서 왕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결과는? 1964년 추방. 이라크 나자프로, 이후엔 프랑스 파리 근교 뇌플르르샤토로. 망명지에서 그는 오히려 더 유명해졌다. 현지 기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그의 육성녹음이 카세트테이프에 담겨 이란 전역으로 밀수입됐다. 아날로그 시대의 유튜브라 할까. 당시로선 혁명적인 미디어 활용이었다. 호메이니의 출생지, 호메인.(위키피디아) 혁명은 카세트테이프로 왔다 1979년 1월, 팔레비 왕은 결국 나라를 버리고 떠났다. 그해 2월 1일, 호메이니는 망명 15년 만에 귀국했다. 테헤란 공항에는 수백만 명이 쏟아져 나왔다. 비행기에서 내려오던 그에게 기자가 물었다. 조국으로 돌아오는 느낌이 어떻습니까? 호메이니의 대답은 역사에 길이 남을 명(?)언이었다: 아무 느낌도 없소. 이 한마디가 전 세계로 타전됐다. 어떤 이는 이걸 심오한 철학으로 해석했고, 어떤 이는 그냥 피곤한 노인의 솔직함으로 받아들였다. 같은 해 4월, 국민투표를 거쳐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 수립됐다. 이슬람 법학자가 최고통치자가 되는 윌라야트 알파키흐(법학자의 통치) 원칙이 헌법에 박혔다. 신(神)이 직접 통치하지 않으니 신의 법을 아는 자가 통치한다, 논리는 그럴듯했다. 그런데 신의 법을 해석 하는 권한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다면? 그건 신정정치가 아니라 그냥 독재 아닌가, 하는 물음은 나중 이야기로 넘어가기로 하자. 학생 시절의 호메이니와 그의 친구들 (오른쪽에서 두 번째).(위키피디아) 혁명의 명과 암, 장미와 가시 호메이니가 이끈 이란 혁명은 몇 가지 점에서 20세기 가장 독창적인 혁명이었다. 첫째, 민중의 자발적 동원이었다. 미국도, 소련도, 군부도 아닌, 모스크(이슬람 성원)와 시장 상인들과 학생들이 들고일어났다. 세계최강 미국의 지원을 받는 왕정을 맨손으로 뒤집었다. 둘째, 외세 의존을 거부했다. 미국도 싫고 소련도 싫다 , 냉전시대에 이 구호는 혁명적이었다. 강대국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겠다는 제3의 길 선언이었다. 셋째, 종교가 혁명의 언어가 됐다. 마르크스주의가 아닌 이슬람 신학으로 민중을 결집했다. 이건 이후 중동전체의 정치지형을 바꿔놓았다. 그런데 혁명의 뒷면을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혁명직후 수천 명의 정적이 처형됐다. 왕정부역자들뿐 아니라 함께 싸웠던 좌파동지들도 숙청 대상이 됐다. 1980년대엔 정치범 수천 명이 집단으로 처형됐다는 증언이 넘친다. 여성들은 히잡 착용을 강제 당했고, 자유언론은 틀어 막혔다. 혁명은 자식을 먹는다 는 서양격언이 다시 한 번 증명됐다. 1988년에는 자신이 한때 칭송하던 작가 살만 루슈디(1947~ )에게 파트와(종교적 사형선고) 를 내렸다. 루슈디의 소설 《악마의 시》가 이슬람을 모독했다는 이유였다. 표현의 자유냐 신성모독이냐, 이 논쟁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호메이니는 1989년 6월 3일 89세로 사망했다. 장례식엔 수백만 명이 몰렸고, 군중의 울음소리가 세계로 중계됐다. 1979년 2월 1일, 호메이니는 에어 프랑스 조종사의 호위를 받으며 귀국했다.(위키피디아) 한국에서 이 이야기를 읽는 이유 자, 이제 본론이다. 왜 오늘 한국에서 호메이니를 되새겨야 하는가. 첫 번째 거울, 외세와 독재의 결탁. 팔레비 왕조는 1953년 미국·영국이 주도한 쿠데타(이란 모사데크 총리 축출)로 권력을 공고히 했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를 외세가 뒤집은 것이다. 한국은? 1961년 군사 쿠데타, 1979년 또 쿠데타, 그리고 2024년 12월, 윤석열(1960~ )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역사는 반복되고, 민중은 또 거리로 나왔다. 팔레비 왕은 국외로 도망쳤다. 한국민중은 이번엔 어떤 결말을 쓸 것인가. 두 번째 거울, 카세트테이프와 사회관계망 서비스. 호메이니는 카세트테이프로 혁명을 조직했다. 당시 왕의 검열망을 우회한 매체였다. 오늘날 한국의 시민들은 사회관계망 서비스와 영상 플랫폼으로 계엄선포 당일 밤의 진실을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알렸다. 권력은 언제나 정보를 틀어막으려 하고, 민중은 언제나 틈새를 찾아낸다. 기술이 바뀌어도 이 싸움의 구조는 동일하다. 세 번째 거울, 혁명 이후를 생각하라. 이란혁명의 가장 뼈아픈 교훈은 무엇을 무너뜨릴지 만 알고 무엇을 세울지 를 충분히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팔레비를 몰아냈지만, 그 자리에 더 강력한 신권독재가 들어섰다. 한국도 촛불로 대통령을 두 번 끌어내렸다. 그런데 그 이후의 사회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충분했는가? 저항은 잘하는데 건설은 늘 서툰, 이것이 한국 민주주의의 숙제다. 네 번째 거울, 종교와 민족주의의 위험한 결합. 호메이니는 이슬람 신앙과 반미 민족주의를 결합해 엄청난 동원력을 얻었다. 그 에너지는 혁명을 성공시켰지만, 동시에 이성적 비판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신앙과 애국심은 의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특정 정치세력이 태극기와 십자가를 동시에 흔들며 민주주의를 종북 과 반기독교 로 프레임 짓는 현상은 우연이 아니다. 이란에서 이미 본 현상이다. 테헤란의 이슬람 고등학교에서 호메이니.(위키피디아) 혁명은 완성되지 않는다 호메이니는 죽기 전 이런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우리는 혁명을 했지만, 혁명은 아직 우리를 완성하지 못했다. 진위는 불분명하지만, 울림은 크다. 혁명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니다. 광장에 모이는 것, 부패한 권력을 끌어내리는 것은 시작일 뿐이다. 그 이후에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 누구를 위한 민주주의인가, 이번엔 이전과 다를 것인가, 이 물음들이 진짜 혁명이다. 이란은 1979년에 왕을 몰아내고 신정 독재를 얻었다. 한국은 2024~2025년의 혼돈을 지나 무엇을 얻을 것인가. 역사는 반복된다. 하지만 반복의 방향은 우리가 결정한다. 1989년 6월 4일, 자마란의 호메이니 거주지 주변에서 애도하는 사람들.(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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