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밝은 빛 으로 식민지 조선청년 응원한 타고르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인도 벵골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소년이 있었다. 어머니는 그가 여덟 살 때 세상을 떴고, 아버지는 언제나 히말라야 어딘가를 떠돌았다. 학교는 그를 견디지 못했고, 그 역시 학교를 견디지 못했다. 열한 살에 정규교육을 완전히 때려치웠다. 오늘날 이 아이를 봤으면 어른들은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저 아이, 앞으로 어떻게 살려고…
그런데 그런 아이가 1913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아시아 최초로.
라빈드라나트 타고르(1861~1941). 벵골 출신의 시인이자 소설가, 철학자, 음악가, 화가, 교육자. 직함을 나열하자면 한참 걸린다. 인도 국가(國歌)와 방글라데시 국가 가사는 모두 그의 것이다. 세계사에 두 나라 국가를 한 사람이 작곡한 사례는 전무후무할 것이다. 이쯤 되면 천재 라는 말도 어딘가 부족하게 느껴진다.
1926년의 타고르(위키피디아)
제국의 그늘 아래서 피어난 붓
타고르가 태어난 1861년은 인도가 영국 제국의 직접 통치 아래 들어간 지 불과 4년째 되던 해였다. 무굴제국의 마지막 황제 바하두르 샤 자파르(1775~1862)가 미얀마로 유배를 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절이다. 식민지 지식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대체로 두 가지였다. 침묵하거나, 아첨하거나.
하지만 타고르는 세 번째 길을 선택했다. 그는 영어로 쓰지 않았다. 벵골어로 썼다. 지배자의 언어가 아닌 모국의 언어로, 민중의 언어로 노래했다. 그의 시집 『기탄잘리(신에게 바치는 노래)』(1910년 벵골어 초판, 1912년 영어 번역 출판)는 마치 나는 당신들 언어 빌리지 않아도 세계와 이야기할 수 있다 고 선언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노벨위원회는 1913년 그에게 노벨문학상을 주었다. 수상 소식을 들은 영국 총독부 관리들의 표정이 어땠을지는 굳이 묘사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젊은 타고르, 런던에서, 1879년(위키피디아)
영예를 돌려준 사람
그런데 이 사람, 상을 받기만 한 게 아니었다. 1915년, 영국 국왕 조지 5세(1865~1936)로부터 기사 작위까지 받았다. 경(卿) 타고르 가 된 것이다. 그러나 4년 뒤인 1919년, 타고르는 그 작위를 반납했다.
이유는 단 하나. 영국 군인들이 인도 암리차르의 잘리안왈라 바그 광장에서 비무장 민간인을 향해 총을 쏜 사건 때문이었다. 그 날 죽은 사람은 공식 집계로 379명, 실제로는 1000명에 가까웠다고 전해진다. 타고르는 총독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 작위는 수치 속에서 나의 동포들과 함께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고 썼다. 노벨상은 간직하고, 기사 작위는 돌려줬다.
한국에서도 윤석열 대통령이 수여한 훈장과 감투를 스스로 반납하는 장면을 우리는 몇 번이나 목격했던가. 아니, 반대로 불의한 시절에 받은 훈장을 아직도 가슴에 달고 다니는 이들이 몇이나 되는지를 먼저 세어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타고르와 그의 아내 므리날리니 데비, 1883년(위키피디아)
교육이 제국을 이긴다, 샨티니케탄의 실험
타고르가 단순한 시인이었다면 그는 아름다운 유물로만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1901년, 그는 벵골 시골마을 볼푸르에 학교를 하나 세웠다. 이름은 샨티니케탄(평화의 집) . 학생 다섯 명으로 시작했다.
이 학교의 원칙은 당시로선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수업은 교실 밖, 나무 아래서 진행됐다. 암기보다 질문을 권장했다. 지역 장인과 농민을 교사로 불렀다. 예술과 음악은 필수과목이었다. 훗날 샨티니케탄은 비스바바라티 대학교 (1921년 설립)로 발전했고, 오늘날까지 인도를 대표하는 교육기관 중 하나로 살아있다.
그가 교육에 대해 남긴 말이 있다.
교육의 최고 결과는 관용이다.
입시전쟁, 사교육비 세계 최고 수준, 문이과 구분 , 수능 한 방 으로 일생이 결정되는 한국의 교육 풍경 앞에 이 문장을 갖다 놓으면 어떨까. 뭔가 불편하다면 그게 맞는 반응이다.
1924년 중국 칭화대학교에서의 타고르(가운데 오른쪽, 위키피디아)
민족주의에 맞선 세계시민
타고르는 인도 독립운동을 지지했다. 그러나 동시에 민족주의를 경계했다. 모순처럼 보이지만, 그에게는 일관된 논리였다.
그는 1908년부터 1917년 사이에 쓴 여러 글에서 민족주의가 타자를 배제하고 폭력으로 흐를 수 있다고 경고했다. 마하트마 간디(1869~1948)와는 절친한 동지이면서도 그의 비폭력운동 방식에 대해서조차 솔직하게 비판했다.
나는 인도를 사랑하지만, 그것이 다른 나라를 미워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 말이 오늘날 한국 정치지형에 던지는 울림은 작지 않다. 국익 이라는 이름 아래 혐오와 배제가 당연시되고, 애국 을 내세운 이들이 정작 이웃시민의 기본권을 짓밟는 장면은 낯설지 않다. 타고르라면 이런 엇나간 민족주의를 향해 붓을 들었을 것이다. 아마도 아주 날카롭게.
1931년 독일에서 타고르(위키피디아)
타고르와 한국, 그 짧고 깊은 인연
여기서 잠깐. 타고르는 한국과도 인연이 있다. 1929년, 그는 일본 방문 중 조선청년들의 요청으로 시 한 편을 써줬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그 해 4월 2일치 동아일보에 실린 이 시는, 식민지 조선사람들에게 위로이자 예언처럼 읽혔다. 타고르가 직접 조선을 방문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그 짧은 시 한 편은 나라 잃은 민족의 가슴에 오래 남았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한 벵골 노인이 건넨 등불의 은유. 우리는 그 등불을 제대로 밝히고 있는가. 아니면 그 불씨를 두고 서로 누구 등불이냐고 싸우고 있지 않는가.
1941년 타고르의 마지막 사진(위키피디아)
오늘 한국, 타고르라면 무슨 말을 했을까
타고르가 오늘의 한국을 본다면 어떤 시를 쓸까. 잠시 상상해 보자.
세계 10위권 경제규모를 자랑하지만, 청년 10명 중 4명은 정규직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나라. 민주주의 지수는 높다는 평가를 받지만, 국회 앞 광장에선 여전히 시민들이 촛불을 들어야 변화가 생기는 나라. 문화적 창의력은 세계를 매료시키지만, 정작 그 창작자들의 생계는 불안한 나라. 입시경쟁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또다시 취업 경쟁에 뛰어들고, 그 경쟁에서 진 이들은 사회 안전망의 구멍으로 떨어지는 나라.
타고르는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는 세상을 옳게 살아가고 있을 때 비로소 세상이 아름다움을 깨닫는다.
제도가 아름답지 않으면,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아름답게 살기 어렵다. 제도를 바꾸는 것이 개인의 각성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중요하다. 타고르가 시만 쓴 게 아니라 직접 학교를 세우고, 작위를 반납하고, 정치 발언을 서슴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 있다.
자와할랄 네루와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1940년 2월(위키피디아)
등불을 켜는 건 시인의 일이 아니다
타고르는 1941년 8월 7일, 여든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47년 인도 독립을 6년 앞두고였다. 그는 해방된 조국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노래는 두 나라의 국가가 됐고, 그의 학교는 여전히 학생들을 품고 있으며, 그의 시는 100년이 지난 뒤에도 식민지 청년들이 남긴 기록 속에서 발견된다.
민들레는 잡초라고 불린다. 뽑아도 뽑아도 다시 난다. 타고르의 글도 그랬다. 제국이 눌러도, 검열이 막아도, 시대가 바뀌어도 다시 피어났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화려한 수사나 거창한 이념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무 아래 앉아 진짜 질문을 던지는 용기, 불의한 권력이 준 훈장을 돌려줄 수 있는 결기,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봄을 믿는 마음.
동방의 밝은 빛 이 되는 것. 그게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님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타고르와 아인슈타인 1930년(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