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으로 포장된 지대추구 탐욕 이 불평등 낳아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김태형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
변호사와 예술가의 능력을 어떤 기준으로 비교하나
신자유주의에 특화된 개인주의적 정의론인 능력주의는 이전의 글에서 언급했던 것들 외에도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능력이 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정의론 분야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철학자 롤즈는 능력과 재능은 물론이고 근면함, 인내심 같은 품성들조차 자연이 각각의 개인들에게 무작위로 배당한 추첨의 결과, 즉 행운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 사회에서 상류층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 부모의 경제적 지원을 받으면서 공부하여 일류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해 엘리트가 된 사람은 아무런 운 없이 순수하게 자신의 노력만으로 현재의 사회적 지위나 능력을 획득한 것일까? 롤즈는 다양한 사례들을 거론하면서 능력을 순수하게 자기 것이라거나 자기 노력의 결과라고 말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능력주의 정의론이 주장하는 능력에 따른 분배는 정의롭지 않다.
능력주의 정의론의 문제점은 또한 능력을 단일 기준으로 측정하여 비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람의 능력은 질적으로 너무나 다양해서 그런 능력들을 단일한 기준으로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 결과 어떤 능력이 더 가치 있는 능력인지를 비교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법을 잘 알고 활용하는 변호사의 능력과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예술가의 능력을 단일한 기준으로 측정하여 비교할 수 있을까? 질적으로 다른 여러 능력들을 단일한 기준으로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따라서 그런 능력들을 공정하게 비교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능력주의 정의론이 주장하는 능력에 따른 분배는 정의롭지 않다.
비교 불가능한 기준으로 분배할 때 사회적 갈등은 필연
능력은 물론이고 능력주의 정의론이 능력과 동일시하는 사회적 기여도, 공헌도는 측정과 비교가 어려워서 그것을 기준으로 분배를 할 경우 사회적 갈등과 대립을 피할 수 없다. 어떤 회사가 대박 상품을 터뜨렸다고 가정해보자. 그 대박 상품의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 회사에 자본을 투자한 주주들, 회사 경영을 맡은 경영자, 상품을 만든 노동자들, 상품을 홍보한 영업사원들의 기여도를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을까? 만일 대박 상품의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의 회사에 대한 기여도가 가장 크다면서 그에게 수익의 80%를 분배해준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기여도의 기준이나 평가 등을 둘러싸고 싸움이 벌어지고 그 해결점을 찾지 못할 경우 회사공동체가 붕괴할 것이다. 능력이나 사회적 기여도는 측정과 비교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것을 기준으로 분배할 경우에는 반드시 누군가의 불만과 반발을 사고 그 결과 분열과 갈등이 발생한다. 따라서 결과의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기능 외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능력주의 정의론을 옹호하는 것은 곧 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옹호하는 것과 같다.
배경의 불평등 외면하는 능력주의
능력주의는 기회의 공정, 평등만 보장된다면 능력에 따른 결과의 불평등은 정의롭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능력주의는 기회의 공정이나 평등을 강조하기 때문에 정의롭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기회가 공정하고 평등하다면 그 다음부터는 개인이 능력을 얼마나 키우느냐의 문제만 남게 되고 결과의 불평등은 다 개인 책임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기회의 공정이나 평등만 보장된다면 결과의 불평등을 정의롭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까?
능력주의에 의하면, 어떤 달리기 시합에 서울 거주자는 참가할 수 있지만 인천 거주자는 참가할 수 없다면 그런 시합은 기회의 공정이 보장되지 않으므로 불공정하고 부정의한 시합이다. 그러나 그런 기회의 차별이나 불평등 없이 모든 사람이 참가할 수 있는 기회의 평등, 공정이 보장된다면 달리기 시합의 결과로서 결과의 불평등이 발생하더라도 그것은 정의롭다. 달리기 시합이 시작되면 달리기 능력이 우수한 사람이 승리하거나 더 열심히 달린 사람이 승리하는 반면 달리기 능력이 열등하거나 게으름을 피운 사람이 패배할 것이다. 따라서 달리기 시합의 결과에 따라 차등분배를 해서 결과의 불평등이 생기더라도 그것은 다 개인 책임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논리적으로 하자가 없다거나 옳은 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능력주의의 주장에는 결정적인 허점이 있다.
미국 백인과 흑인 간 기회의 공정이 보장되고 있다?
달리기 시합에 참여한 두 아이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한 아이는 부잣집 출신이어서 영양 상태가 매우 좋고 달리기 시합에 최적화된 운동복과 신발도 착용하고 있다. 다른 아이는 가난한 집 출신이어서 영양 상태가 부실하며 달리기에 불리한 바지를 입었고 고무신을 신고 있다. 이런 조건이라면 설사 가난한 집 아이의 달리기 능력이 우수하다 할지라도 그 아이가 부잣집 아이를 이기기는 힘들 것이다. 미국의 경우 슬럼가 출신 흑인이든 중산층 출신 백인이든 간에 모든 국민들에게 기회의 평등, 공정이 보장되지만 승자의 대다수는 백인들이다. 왜일까? 배경의 불평등 때문이다. 다수의 연구들에 의하면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는 사람들은 대체로 중산층 이상의 백인 가정에서 좋은 유전자를 타고난 남성들이다.(김비환, 『정의는 불온하다』, 2016, 개마고원, 166쪽) 배경이 불평등하다면 기회의 평등, 공정이 보장된다고 할지라도 능력에 따른 분배는 부정의하다.
기회의 평등, 공정만 있으면 결과의 불평등은 아무 문제 없다고 외치는 능력주의 정의론은 재능을 개발하여 경쟁에 필요한 능력과 자격을 갖출 기회가 모두에게 공정하게 제공되었는지, 즉 경기장에 들어오기 이전의 불평등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능력 부족 한탄하며 우울증에 빠지는 낮은 서열 사람들
능력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불평등에 찬성하고 불평등 사회를 긍정하도록 만든다. 한마디로 능력주의는 불평등의 수호자인 것이다. 능력주의는 배경 정의, 사회정의를 외면하며 능력에 따른 분배 결과인 불평등을 정의로 간주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불평등을 합리화하고 조장하는 역할을 한다.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Michael Young)은 1958년에 출간한 『능력주의의 부상』이라는 저서를 통해 능력주의 분배원칙에 기반하는 기회의 평등이 구현된 사회가 결과적으로는 불평등한 신-신분사회로 전락하는 모습을 묘사했다.(김도균, 『한국 사회에서 정의란 무엇인가』, 2020, 아카넷, 260쪽) 개인 간 경쟁과 개인 간 능력에 따른 분배는 필연적으로 불평등한 개인 간 서열사회로 이어진다. 능력주의가 득세한 서열사회에서 살아가는 낮은 서열 사람들은 자신의 열등한 서열을 능력과 노력 부족의 산물로서 당연시하게 된다. 반면에 상위 서열 사람들은 자신의 부나 높은 서열이 우수한 능력과 노력 덕분이라고 우쭐대면서 독선적으로 변한다.
생존조차 버거운 힘든 삶을 살아가는 것이나 자신의 낮은 서열을 다 자신의 능력 부족 때문이라고 믿게 되면 자기비하나 자기혐오에 빠지고 그 결과 우울증에 취약해지게 된다. 모든 것이 다 내 탓이어서 세상을 원망할 수가 없으니 분노가 자기 자신을 공격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기비하나 자기혐오가 심해지면 자기 자신을 전혀 돌보지 않고 방치하거나 과음이나 불규칙한 생활 등으로 스스로의 건강을 해치는 자기파괴적인 삶을 살게 될 수 있다. 우울증이 심해지면 자포자기하는 삶, 즉 사회적 존재로서의 사망에 이르게 되거나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될 수 있다.
능력주의 분배는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다
1980년에 미국 주요 기업의 CEO들은 노동자들보다 42배 정도 많은 보수를 받았다. 그러나 2007년에 그 CEO들은 노동자들보다 평균 344배나 많은 보수를 받았다. 자본가와 노동자들 사이의 격차가 이렇게 급격하게 벌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2007년 CEO들의 능력이 1980년 CEO들의 능력보다 월등히 뛰어나서였을까? 답은 미국이 신자유주의 사회로 전환되면서 CEO의 보수를 제한했던 법이 없어져 CEO들의 무제한적인 탐욕을 제어할 수 없게 되었다는데 있다. 즉 1980년과는 달리 신자유주의 시대의 CEO들이 돈방석에 앉게 된 것은 능력에 따른 분배 때문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전도사였던 미국 정부가 분배규칙을 자본가들에게 유리하게 바꾸었기 때문이다.
노벨상 수상자인 경제학자 스티글리츠는 갑부들이 과도할 정도로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은 능력 덕분이 아니라 그들이 지대추구자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능력주의가 한껏 추켜세우는 능력이란 지대추구 능력 – 간단히 말해 지대추구 능력이란 돈에 대한 무절제한 탐욕 더하기 떼돈이나 불로소득을 버는 능력 – 에 불과하며, 오늘날의 심각한 불평등은 능력주의 분배가 아니라 지대추구의 결과라고 비판했다. 지금까지의 인류역사에서 능력주의 분배원칙에 따라 분배가 이루어졌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그들의 성공은 능력 아닌 악한 심성 때문은 아닐까?
능력주의의 입장에서 보기에 드라마 은 능력에 따라 분배를 해주는 정의로운 게임일 수 있다. 가장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끝까지 살아남아서 막대한 보상을 받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징어게임을 보면 끝까지 살아남는 능력이 사회에 기여하는 능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은 경제학자 스티글리츠가 말하는 지대추구 능력이거나 반사회적 능력 혹은 이기주의적 능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시즌 2, 3에서 마지막 결승전까지 살아남는 사람들이 착한 사람들이 아니라 악한 사람들인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영화 ‘오징어게임’의 한 장면
마지막 결승전까지 살아남은 참가자들 중에 착한 사람이 1명 포함되어 있긴 하다. 주인공 성기훈이다. 하지만 그를 제외한 나머지는 다 악한 인간들이다. 드라마 은 경쟁에서 이기는 능력이 악당으로서의 능력일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한국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 부자가 된 사람들의 대다수는 과연 능력자일까? 아니면 상대적으로 더 악한 사람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