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걸린 묵직한 역사의 공소장, 반헌법행위자열전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반헌법행위자열전』에 실린 반헌법행위자들
2026년 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1~4권을 받았다. 책을 펼치기 전에 잠시 표지를 들여다 본다. 수십 개의 얼굴이 펜화로 새겨져 있다. 이승만(1875~1965), 박정희(1917~1979), 전두환(1931~2021), 노태우(1932~2021), 최규하(1919~2006). 민복기(1913~2007), 양승태(1948~ ), 김기춘(1939~ ).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기념관이 아니라 역사의 피고석에 앉아 있다.
어떤 이들은 말할 것이다.
이 사람들 이름은 이미 다 아는데, 새삼스럽게?
맞다. 우리는 안다. 그런데 알면서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전두환은 29만 원밖에 없다 면서도 골프를 쳤고, 양승태는 집행유예로 풀려났으며, 김기춘은 야구장 귀빈석에서 한국시리즈를 관람했다. 우리가 안다 는 것과 역사가 기록한다 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이 책은 그 차이를 메우기 위해 만들어졌다.
10년, 540회 회의, 그리고 81명의 이름
이 책의 시작은 2015년 제헌절인 7월 17일이다. 한홍구·임경석·박노자 등 역사학자와 시민 33명이 모여 손을 잡았다. 상임공동대표 이만열, 책임편집인 한홍구가 이끈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는 10여 년 동안 540여차 회의를 거쳤다. 계산해보면 거의 일주일에 한 번꼴이다. 그 회의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했는가. 싸웠다. 이 사람을 넣느냐 마느냐, 이 행위가 반헌법인가 아닌가, 이 표현이 지나치지 않은가. 3000명에서 450명으로, 다시 312명으로 추려냈다. 그 첫 번째 결실이 1~4권에 담긴 81명이다.
원칙은 단 하나였다. 정치적 이념이 아니라 헌법 위반 여부. 그리고 지금의 헌법이 아니라 행위 당시의 헌법을 기준으로 삼았다. 그 시대에는 어쩔 수 없었다 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 구조다. 그 시대에도 헌법은 존재했으니까. 이 원칙 하나가 이 책을 정치적 공격 문건이 아닌 역사 기록으로 만들어준다. 편찬위는 수록 대상자나 유족에게 이의신청 기회까지 줬다. 단 한 명도 억울하게 수록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지극히 공정한 태도다.
반헌법형위자열전.(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1권: 대통령들, 제사상의 대추·밤 을 올려놓은 사람들
1권은 대통령 5명을 다룬다. 읽다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눈에 띈다. 그들은 하나같이 헌법을 사랑했다. 다만 사랑의 방식이 독특했다. 이승만(1875~1965)은 헌법을 두 번 갈아엎으며 내가 없으면 나라가 없다 고 했고, 박정희(1917~1979)는 스스로 헌법을 정지시키며 유신을 가장 좋은 제도 라 불렀다. 전두환(1931~2021)은 계엄을 확대해 광주에서 시민을 학살하고도 훗날 기억이 없다 고 했다. 최규하(1919~2006)는 모든 반헌법 행위 앞에서 서명만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그의 반헌법 행위였다. 노태우(1932~2021)는 나는 보통사람 이라는 슬로건으로 대통령이 돼 4100억 원의 비자금을 쌓았다. 참으로 보통이 아닌 보통사람이었다.
민복기(1913~2007)가 퇴임 후 스스로 털어놓은 말이 1권 어딘가에서 메아리친다. 박정희가 사법부를 제사상의 대추·밤처럼 구색을 맞추기 위해 올려놓는 것으로 여겼다고. 10년간 대추·밤 노릇을 한 민복기의 솔직함에 박수를 쳐야 할지, 아니면 그 솔직함에 담긴 뻔뻔함에 혀를 차야 할지 모르겠다.
2권: 법원, 사법부가 스스로를 팔았다
2권은 대법원장 3인과 정치판사 27명을 다룬다. 민복기, 유태흥(1919~2005), 양승태. 이 세 사람은 각각 박정희, 전두환, 박근혜(1952~ ) 정권의 사법부 수장이었다. 한국 현대사 3대 독재 및 권위주의 정권의 사법부 수장 세 명이 나란히 올라오는 셈이다. 역사의 아이러니치고는 너무 촘촘하다.
양승태는 상고법원이라는 조직의 이기적인 목표를 위해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재판 결과와 노동조합의 운명을 정권과 거래했다. 법원행정처 하드디스크에서 발견된 문건에는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의 기대효과로 보수세력을 확실한 우군으로 확보할 수 있다 는 내용이 버젓이 담겨 있었다. 최고 사법기관이 스스로 정치 브로커임을 고백한 문건이었다. 항소심에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상고했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유죄를 선고받은 전직 대법원장이 법원에 상고하는 장면, 그 아이러니를 뭐라 불러야 할까.
2권에 수록된 27명의 정치판사들이 내린 판결들은 훗날 대부분 재심에서 무죄로 뒤집혔다. 그러나 그 판결들 사이에서 수십 년을 살아낸 사람들의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재심 무죄와 억울한 세월을 맞바꾸는 것을 정의라고 부를 수 있는가.
3·4권: 검찰, 법비(法匪) 49인전
3권과 4권은 정치검사 49명을 다룬다. 김기춘(1939~ ), 고영주(1949~ ), 최병국(1942~ ), 안강민(1941~ ) 등. 이들의 공통직업은 검사이고, 공통특기는 법의 언어로 국가폭력을 포장하는 것이었다. 고문을 직접 가하진 않았지만 고문으로 받아낸 자백을 공소장으로 번역했다. 간첩을 직접 만들지 않았지만 조작된 간첩을 법정에 세웠다.
이 가운데 최병국은 부림사건 피의자가 전두환 정권은 군사파쇼다 라고 말하자 나는 파쇼가 좋은데 라고 대꾸한 인물이다. 이 솔직함은 어디서 나왔을까. 고영주는 문재인은 공산주의자 라고 공언했고 법원은 이를 공적 인물에 대한 의견 표명 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이후 그는 스스로를 법원에서도 인정한 공산주의자 감별사 라 불렀다. 유머 감각만큼은 발군이다. 다만 그 유머의 피해자들은 웃지 않고 있을 뿐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이 49명 중 상당수가 민주화 이후에도 의원직을 얻고 법사위원장이 되고 스타 검사로 불렸다는 사실이다. 독재에 부역한 법비들이 민주화의 과실을 함께 나눠 먹은 것이다. 3·4권이 독자에게 던지는 가장 불편한 질문은 이것이다. 과거의 반헌법 행위자들이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민주화의 열매를 누렸다면, 과연 민주화는 완성된 것인가.
『반헌법행위자열전』에 실린 반헌법행위자들
친일인명사전의 약점을 넘어서다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은 2009년 『친일인명사전』이 가졌던 약점을 극복했다는 점이다. 『친일인명사전』이 나왔을 때 수록자 대부분은 이미 고인이었다. 역사적 단죄의 의미는 있었지만 살아있는 자를 향한 경고로서의 힘은 약했다. 편찬위는 이 지점을 겨냥했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1~4권에 수록된 81명 중 36명은 현재 생존해 있다. 이 책이 서점에 깔리는 순간부터, 그들은 역사의 피고석에 살아서 앉게 된 것이다. 이것이 열전이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이다.
또한 사전 이 아닌 열전(列傳) 의 형식을 택했다. 사전은 압축한다. 열전은 펼친다. 반헌법 행위는 하루아침에 탄생하지 않는다. 어떤 집안에서 태어나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어떤 권력을 만나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생애사의 흐름 속에서 추적한다. 민복기의 아버지 민병석(1858~1940)이 경술8적이었다는 사실, 박정희(1917~1979)가 만주군관학교에 혈서를 써서 지원했다는 사실이 그냥 데이터가 아니라 이야기로 살아 숨 쉬는 이유가 여기 있다.
영국에서 2026년을 생각한다!
영국에서 이 책을 읽으며 한 가지 장면이 자꾸 떠올랐다. 2026년 5월, 민주당이 6·3 지방선거와 동시에 국민투표에 부치려던 헌법 개정안이 국민의힘의 표결 불참과 필리버스터 위협에 끝내 무산됐다. 계엄 선포 때 국회 승인을 의무화하고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넣자는 내용이었다. 이 개정안이 막힌 날, 나는 이 책의 총론을 다시 펼쳤다. 반인도적 범죄에 공소시효를 없애고 소급처벌의 길을 열자는 편찬위의 주장이 얼마나 절실한 과제인지를 새삼 깨달았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1960~ )이 비상계엄을 선포했을 때, 계엄군이 국회로 향하던 그 밤, 이 책에 수록된 81명의 행적이 먼 과거가 아니라 바로 어젯밤의 뉴스처럼 겹쳐 보였다. 박정희가 만든 유신의 문법, 전두환이 쓴 계엄의 언어, 김기춘이 설계한 공안통치의 구조. 그것들이 다른 옷을 입고 2024년 12월 3일 밤에 귀환했다.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역사는 반드시 돌아온다. 이것이 이 책이 지금 이 시점에 출간된 이유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 법정이 드디어 문을 열었다. 방청석은 우리의 자리다. 그리고 이 책은 우리가 그 자리를 떠나지 않도록 붙잡아두는 닻이다.
참고자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2026, 『반헌법행위자열전』 1~4권, 사회평론아카데미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