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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아이를 납치한 국가가 확인해주지 않는 진짜 기록들

아이를 납치한 국가가 확인해주지 않는 진짜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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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복성 씨는 수원 연무초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외할머니 손을 잡고 친척집을 방문하던 중이었다. 처음 보는 용산역 로터리는 소란스러웠다. 사람들은 바쁘게 오갔고, 아이는 그 흐름에서 잠시 떨어져 있었다. 외할머니는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음료수를 사러 가게로 들어갔다. 아이는 로터리 가장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시간은 유난히 길게 늘어졌다 5분쯤 지났을까. 철망이 둘러진 1톤 탑차 한 대가 멈춰 섰다. 낡은 차체와 달리, 문을 열고 내린 두 남자의 옷차림은 평범했다. 사복이었다. 그들은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고 아이에게 다가왔다. 좋은 데 가자.” 트럭에 올라타니 다른 아이들이 서너 명쯤 있었다. 서로 눈을 마주쳤지만 말을 걸지 않았다. 아이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었겠지만, 그걸 확인할 용기는 없었다. 차는 오래 달렸고, 창밖은 점점 낯설어졌다. 그때서야 외할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나를 찾고 있을까. 아니면 이미 포기했을까.’ 도착한 곳은 시립아동보호소였습니다. 이름은 보호소였지만, 들어가는 순간 뭔가 다른 느낌이 왔습니다. 여긴 보호받는 곳이 아니라는 걸. 담장은 높았고, 문은 무거웠어요. 그 문이 닫히는 소리가 세상과 끊어지는 소리 같았어요. 도착하자마자 머리를 밀었어요. 바닥에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보며 제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름도, 집도, 기억도 함께 잘려나가는 것 같았어요.”   안복성씨의 선감학원 원아대장 기록. 사실관계의 기록이 아니라 조작된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40~50명쯤 되는 아이들이 한 방에 모여 있었다. 오래된 땀, 먼지, 그리고 체념 같은 것들로 뒤섞여 있는 방에 들어서는 순간, 시선이 쏠렸다. 누가 새로 들어왔는지, 얼마나 약해 보이는지,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눈빛들이었다. 한두 살 더 많아 보이는 아이들이 다가왔다. 말은 없었다. 대신 손이 먼저 움직였다. 첫 번째 손은 이유가 없었다. 두 번째는 확인이었다. 세 번째부터는 규칙이었다. 집단 구타는 짧고도 길었다. 몸은 금세 반응을 멈췄지만, 감각은 오히려 또렷해졌다. 바닥의 차가움, 귀를 울리는 소리, 입안에 고이는 피 맛. 누군가 웃고 있었고, 누군가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 그날, 배웠습니다. 여기는 ‘좋은 곳’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더 중요한 것 하나를.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여기서는 울어도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렇게 시립아동보호소에서의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그날 이후로 나는 기다리는 법을 잊어 버렸습니다. 대신 견디는 법을 배웠어요. 그게 시립아동보호소에서 내가 처음으로 배운 규칙이었습니다.” 그는 시립아동보호소에서 1년을 살았다고 기억한다. 계절이 한 바퀴를 다 돌았다. 봄에 들어갔고, 겨울에 나왔다. 그건 몸이 알고 있었다. 더위와 추위, 냄새와 공기의 질감이 시간을 대신 말해준다. 그런데 기록에는 5개월이라고 적혀 있다고 했다. 그가 살았던 시간과 종이에 적힌 시간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 그곳과 닮아 있었다. 거기서는 모든 게 그렇게 어긋났다. 맞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틀린 것만이 질서처럼 유지되던 곳이었다. 들어갔을 때는 봄이었고 나올 때는 추운 겨울이었다. 바람이 뺨을 베듯 스치던 날. 갑자기 이름이 불렸다. 안복성씨만이 아니었다. 몇 명이 더 불렸다. 다른 데로 보내준다, 그 말은 짧았고, 설명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다르게 들었어요. 이제 집에 가는 건가. 그 생각이 먼저 들었죠. 아니, 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외할머니 얼굴이 떠오르고, 용산역에서 나를 두고 사라졌던 그 순간 이후로, 나는 한 번도 그 얼굴을 다시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날, 나는 조금 들떠 있었을 겁니다. 그곳을 벗어난다는 것만으로도 숨이 조금은 쉬어지는 느낌이었죠.”   AI로 생성한 1970년대 당시 선감학원의 모습. 함께 간 아이들은 넷이었다. 해가 기울고 있었으며, 창밖이 점점 어두워졌다. 도시의 불빛이 아니라, 낯선 어둠이 깔렸다. 그때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다. 집으로 가는 길이라면, 이 방향일 리 없다는 걸 어렴풋이 알았다. 그래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질녘에 도착했다. 그곳의 이름은 선감학원이었다. 배를 타고 들어온, 처음 보는 곳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니었다.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다른 이름의 같은 곳으로 옮겨졌을 뿐이었다. 또 다시 버텨야 할 상황에 처해진 것이다. 그날 두 번째로 그가 배운 것은 ‘다른 곳’이라는 말이 결코 구원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1975년 11월, 그는 선감학원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은 줄 세워졌다. 그는 이미 한 번 겪은 적이 있었다. 누군가의 손짓에 따라 옷을 벗었다. 맨몸이 된 채 사진을 찍었다. 여긴 사람으로 기록하는 곳이 아니라, 물건처럼 남기는 곳이다. 이름이 아니라 몸을 찍는 곳이었다. 사진은 짧았고, 이후의 시간은 길었다. 그가 배치된 방에는 15명이 넘는 아이들이 있었다. 몸을 뉘일 자리조차 넉넉하지 않았다. 서로의 체온이 이불이었고, 서로의 숨이 공기였다. 선감학원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돼지막사에 끌려간 날이 있었어요. 돼지의 출산을 지켜보라는 지시였습니다. 한겨울, 입김이 허공에 얼어붙을 듯한 날씨였어요. 쭈그리고 앉아, 돼지가 새끼를 낳는 장면을 지켜봤어요. 그때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돼지도 새끼를 낳아 키우는데, 나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배는 늘 고팠다. 먹는다는 건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 한 달에 한 번 건빵이 나왔다. 그날은 모두가 긴장했다. 나눠 먹는 법은 없었다. 그는 건빵을 받자마자 입에 쑤셔 넣었다. 누가 뺏어갈지 몰랐기 때문에 씹는 건 사치였고, 삼키는 게 먼저였다. 배고픔은 사람을 바꿨다. 그는 칡뿌리도 캐먹었다. 땅을 파고, 흙을 털어내고, 질긴 뿌리를 씹었다. 생콩을 날것으로 뜯어 먹기도 했고, 몰래 무를 뽑아 먹은 적도 있었다. 단맛이 입안에 퍼질 때, 그는 잠깐 사람으로 돌아왔다. 뱀, 개구리, 갯벌을 기어 다니는 게도 먹었다. 처음에는 망설였다. 하지만 배고픔은 망설임보다 강했다. 그는 그것들을 잡아먹으며 살아남았다. 그것이 부끄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그는 한 가지 감각만이 또렷이 남아 있다. 배고픔. 밤은 또 다른 시험이었다. 연탄불을 꺼트리면 안 됐다. 그건 규칙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그걸 완벽하게 지킬 수는 없었다. 누군가 잠든 사이 불이 꺼지면, 곧 몽둥이가 날아왔다. 신발은 검정고무신이었다. 겨울에도, 여름에도 같았다. 발은 늘 시렸다. 그런데 외부에서 높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날이면 상황이 달라졌다. 양말이 지급됐다. 그날만큼은 밥상에도 변화가 있었다. 한 숟가락도 안 되는 돼지고기가 나왔다. 아이들은 그걸 바라보며 눈빛이 달라졌다. 그는 그런 날이 더 싫었다고 기억한다. 그게 진짜가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먹는 걸 포기하진 않았다. 그들이 떠나고 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선감학원 원생들의 당시 생활 모습. 선감학원 옛터에 들어선 선감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농삿일에는 할당량이 있었어요. 밭을 갈고, 작물을 심고, 수확하는 모든 과정이 숫자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 숫자를 채우기 위해 몸을 혹사시켜야 합니다. 모자라면 맞아야 하니까요. 선배들은 가끔 담배 심부름을 시켰어요. 맛을 알아서 피우는 게 아니라 허기를 잊기 위해서 했던 것 같아요.” 법적으로 그의 출생연도는 1966년이다. 그는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살아왔다. 외할머니와 이모의 기억 속에서도 그는 분명 1966년생이었다. 하지만 선감학원의 기록에는 1963년으로 적혀 있었다. 세 살을 올렸다. 머물렀던 기록도 그보다 훨씬 짧은 시간만이 남아 있다. 4개월이 전부다. 그는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잠시 말을 잃었다. 세 해라는 시간은 아이에게 단순한 숫자가 아니었다. 그 세 해는 키의 차이였고, 힘의 차이였고, 맞는 방식의 차이였다. 그는 왜 세 살이나 더 늙어버린 사람이 되어 있었을까. 그 안에서 그는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름은 같았지만, 나이는 달랐고, 시간도 달랐다. 그곳에서는 기록이 곧 사실이었고, 사실은 곧 권력이었다. 아이의 기억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선감학원은 ‘보호’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통제와 관리의 공간이었다. 아이들은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숫자로 다뤄졌다. 나이가 많을수록 노동에 투입하기 쉬웠고, 통제하기에도 유리했다. 세 살을 올린 것. 그건 그를 더 많이 부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어린아이였지만, 기록 속에서는 이미 노동이 가능한 나이로 분류되어 있었다. 누군가의 펜끝에서 나이는 조정되었고, 그 결과 그는 더 많은 일을 해야 했고,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했으며, 더 많은 폭력에 노출되었다. 그 사라진 시간은 설명되지 않았다. 누구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짐작할 수 있었다. 기록은 책임을 남기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책임은 최소화되어야 했다. 머문 시간이 길수록, 그 안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한 질문도 많아진다. 폭력과 노동, 굶주림과 통제. 그 모든 것들이 기록과 함께 남게 된다. 그래서 시간은 줄어들었다. 짧을수록 덜 묻는다. 짧을수록 덜 책임진다. 그는 어느 날 부천 ‘새소망 소년의 집’으로 전원조치되었다. 이유는 설명되지 않았지만, 그곳은 이전과 달랐다. 잠시나마 학교에도 다녔다. 음식은 좋아졌고, 어느정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그 단순한 일이 낯설 정도였다. 물론 폭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시립아동보호소나 선감학원에 비해 훨씬 나은 곳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 몇 명의 사진을 찍었다. 그도 그 줄에 섰다.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은 익숙했지만, 이번에는 이유가 달랐다. 해외입양 대상자라고 했다. 그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고개를 저으며, 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아직 남아 있는 사람이 있었다. 외할머니였다. 살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주소도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주소, 수원시 신풍동 30번지. 그는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시설 관계자들은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확인을 위해 인근 경찰서에 문의를 넣었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록은 남아 있었고, 사람은 존재했다. 다음 날, 외할머니가 그를 찾아왔다. 그는 그 장면을 잊지 못한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는 걸 알았어요. 그 일은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주소를 묻고, 확인하고, 연락하는 것. 그것뿐이었고, 그 단순한 절차를 통해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묻는 겁니다. 왜 시립아동보호소와 선감학원에서는 그걸 하지 않았을까요? 그곳에서도 같은 사람이었고, 같은 이름이었고,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무도 확인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단순해서 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단순함이, 더 잔인했습니다.” 시립아동보호소, 선감학원, 새소망 소년의 집에서 그는 3년 가까운 생활을 했다. 할머니도 3년동안 그를 찾으러 안 가본 곳 없이 전국의 고아원을 뒤졌다고 했다. 하지만 국가는 그의 존재를 감추었다. 그곳에서 살았지만, 기록 속에서는 잠깐 머물다 간 사람이었다. 생일도, 나이도, 시간도 모두 엉터리였다. 그렇게 그는 두 개의 인생을 갖게 되었다. 하나는 몸으로 겪은 삶. 다른 하나는 종이에 남겨진 삶. 문제는, 세상이 종이를 믿는다는 것이다. 그의 진짜 나이는 설명해야 했고, 그의 시간은 증명해야 했다. 하지만 증명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기억은 있었지만, 기록은 가짜였다. 그리고 기억은 언제나 기록보다 약했다. 국가의 기록은 그를 보호하지 않았고, 오히려 지워버렸다는 사실. 그의 나이와 시간은 그렇게, 누군가의 편의를 위해 바뀌어 있었다.   당시 선감학원과 인근 시설관련 지도. 선감역사박물관에 전시. 3년간의 기억은 제 인생을 통째로 흔들었습니다. 학교조차 제대로 다니지 못해 어린 시절부터 신문팔이 등 온갖 직업을 전전했지요. 성인이 되어서는 일반사기를 비롯해서 국제결혼 사기도 당했고, 하는 일마다 제대로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2025년 봄이었어요. 폐기물 수거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와중에 우연히 대부도를 거쳐 선감도를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잊고 싶었던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선감학원 옛터와 주변을 돌아보며 트라우마가 다시 몰려왔습니다. 지금도 당시 시설에서 맞은 흉터와 흔적이 어깨와 허리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국가에게 빼앗긴 제 인생은 단지 3년이 아니라 수십 년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국가가 사과하고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고아 수용시설 출신 피해자들의 거칠고 험난한 삶을 그도 역시 살아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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