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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다석의 한글철학 ㊵] 없이 계시는 ᄒᆞᆫ, 붓다예수

[다석의 한글철학 ㊵] 없이 계시는 ᄒᆞᆫ, 붓다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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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달 13날은 다석 나신 날입니다. 다석학회는 이날 갈모임(學會)을 엽니다. 1890해에 났으니 올해는 136돌입니다. 이 글은 글쓴이가 갈모임에서 입말로 튼 글입니다. 입말로 썼으니 입말로 터야 귀로 빨려 들어가 마음을 뒤흔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처음 쓴 글에 입을 좀 더 보태서 마무리 지었습니다. 날을 기리며, 여기에 그 자취를 남깁니다. 다석 류영모 ‘알맞이’는 우리말 숨결을 따라 앎을 삶으로 꽃피워내는 새뜸 공부입니다. ‘없이 계시는 ’으로 가는 이 길은 낡은 있꼴 틀을 깨고 텅 빈 바탕에 산알을 틔우는 일입니다. 몸을 바로 세우고, 마음을 보고, 바탈을 태우는 나날살이로 우리는 비로소 갇힌 나를 벗어던질 수 있습니다. 하늘땅사람이 하나로 꿰어지는 ‘줄곧뚫림’에서 나남 없는 사랑이 솟구칩니다. 끝에 비롯하는 ‘끄트머리’ 숨빛은 날마다 새로 비롯하는 ‘늘비롯’입니다. 이 자리로 여러분을 모십니다. [다석의 한글철학]에 가져다 쓴 노자 늙은이 풀이는 다석 류영모의 것이다. 있는 그대로 가져왔기에 띄어쓰기, 하늘아(), 이어쓰기를 그대로 두었다. 또한 이 글에 가져다 쓴 다석어록”은 1993년 홍익재에서 펴낸 『씨ᄋᆞᆯ의 메아리 다석어록: 죽음에 생명을 절망에 희망을』이 온통이다. 여기서 가져왔다. 열쇳말 : 붓다예수 – 온통 – 온새미로 – 있비롯 - 줄곧뚫림   그림1) 칼릴 지브란이 지은 ‘예언자’ 속 그림이다. 그가 손수 그린 그림이다. 다석 제자 함석헌은 1960해에 ‘예언자’를 한글로 옮겼다. 1976해에 고침판을 펴내면서 그림도 넣었다. 이 그림들이 다석 글에 맞붙어 한꼴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저 어울릴 수 있을 듯하여 7개를 글에 잇대어 붙인다. 손바닥 가온데 ‘눈’은 저 높은 하늘 꼭대기가 아닌 잘몬 빈탕(虛空) 속에 깃들어 온 우주를 꿰뚫어 보시는 ‘없이 계시는 ’을 드러낸다. 소용돌이치는 산알 흐름 한복판에 우뚝 선 이 손은 하늘땅사람을 한꼴로 묶어 온통으로 굴러가게 하는 거룩한 ‘가온찍기’처럼 보인다. #1. 다석 알맞이 가온꼭지 : 없이 계시는  반갑습니다. 오늘 저는 없이 계시는 -온통으로 굴러가는 늙은이 늘길”이라는 말이마(主題)로 다석 류영모 선생님 알맞이를 깊이 톺아보려고 합니다. 다석은 철학을 우리말로 알맞이라 했습니다. 알맞이는 앎을 맞이하여 몸에 배어나도록 하는 배움이요, 스스로 꿍꿍을 터서 저절로 깨우치는 갈(學:覺)이요, 그런 갈글로 영그는 ‘ᄋᆞᆯ’입니다. 알이 잘 영글어야 제소리로 난 ‘ᄋᆞᆯ’이 됩니다. ‘늙은이’는 익히 잘 아시는 노자(老子)를 빗댄 말이고, ‘늘길’은 노자 1월(章)에 나오는 상도(常道)를 다석이 그리 풀어 쓴 말입니다. 나날살이 하면서 늘길을 타고 가시기 바랍니다. ‘늙’이란 말도 다석풀이로는 늘+늑”인데, 이때 ‘늑’을 다석은 지천태(地天泰)라고 했습니다. 홀소리 ‘ㅡ’ 위에 누르는 땅(ㄴ)이 있고, 그 아래 오르는 하늘(ㄱ)이 있어 늘 한꼴로 맞붙어 돌아갑니다. 쪼개지지 않는 셈이죠. 이래야 온 우주가 고루 짓됨(造化)을 이룹니다. 한 마디로 궁궁(弓弓)이죠! 다석 알맞이에서 아주 종요로운 가온꼭지(核心)은 ‘없이 계시는 한아님()’입니다. 하나님 한아님(한ᄋᆞ님) 한울님 한얼님 하늘님 하느님 하는님이 다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ᄒᆞᆫ, 그러니까 검님(神)을 저 하늘 꼭대기에 앉아 계시는 ‘있꼴님(存在者)’으로 떠올리곤 합니다. 그 님은 땅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늘 따로 땅 따로 사람 따로입니다. 하늘땅사람이 다 따로입니다. 한꼴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바다 건너에서 들어온 낡은 ‘있꼴말(存在論)’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다석은 쪼개고 가르는 이런 ‘검님갈(神學)’을 아주 매섭게 꼬집었죠. ‘있꼴님’을 하늘 꼭대기에 앉혀두고는, 그분이 그저 아래로 내려오기만을 기다리며 바깥에서 찾고 있다는 거예요. 저는 ‘붓다예수’라고 부릅니다. 싯다르타는 제 있꼴에 ‘빈탕(空)’을 틔워 붓다가 되었고, 예수도 제 있꼴에 ‘홀씨(獨生子)’를 틔워 그리스도가 되었습니다. 그이들은 하늘이 일러준 제 꼴로 거듭난‘없이 계시는 님’이 되었고, 사는 동안 이 땅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제자리에서 제소리를 크게 울리며 걸었습니다. 그 자리는 지금도 여기입니다. 그러니 여기가 아닌, 저기에 계신 분은 헛꼴(偶像)입니다. 예수는 말합니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 퍼붓는 붓다로 여기 예서 예로 숨쉬는 예수가 아니면 다 헛꼴입니다. 단박에 깨어난 붓다예수로 숨돌리며 산알 불숨으로 으르렁 거려야 합니다. 온갖 삿된 것들을 다 사르는 불숨을 뿜어내며 산알을 깨워야 합니다. 여기 예서 솟는 수로 예수여야 하고 참을 퍼부어 깨끗이 씻어난 이로 붓다여야 합니다. 다석은 헛꼴로 그리는 이 있꼴 ‘검님’ 생각을 밑둥부터 가차 없이 깨부수었습니다. 다석은 신(神)은 본디 이름이 없다. 신에 이름을 붙이면 이미 신이 아니요, 우상이다”라고 혼냈잖아요. 하느님은 어떤 뚜렷한 꼴이나 그림으로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온갖 ‘잘몬(萬物)’이 저마다 제 꼴 스스로를 갖출 수 있도록 밑바탕이 되어주는, 끝없이 넓고 큰 빈탕(虛空)일 따름입니다. 있는 그대로 난 제 꼴에 참꼴(眞身)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빈탕은 쓸쓸한 훵(虛)이나 텅(空), 그러니까 죽은 빈 곳 따위가 아닙니다. 눈 귀 코 입 맨지로는 느껴 알아차릴 수 없는 아득한 낌새이며, 온갖 목숨(산숨:산알)을 품고 기르는 우주 (어미)이자, 텅 비어서 까마득히 돌아가는 아주 큰 바탕입니다. 다석은 그래서 단 하나밖에 없는 웬통 하나는 빈탕(虛空)이다”라고 벼락같이 말을 세웠습니다. 도마복음은 이렇게 써 놓았죠.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모든 것 위에 있는 빛이라. 내가 곧 만물이라. 나에게서 만물이 나왔고 나에게로 만물이 돌아왔느니라. 나무 한 가랑이를 쪼개 보라, 거기 내가 있느니라. 돌 하나를 들어 보라, 거기서 나를 찾으리라.’”(77) 그렇다면 이 끝없는 빈탕에서 ‘나’는 과연 무엇일까요? 다석은 참나는 없이 있는 하나의 긋이요 찰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참(眞) 깨는 날은 죽고 난 뒤, 그러니까 먼 훗날 오는 게 아닙니다. 아직 오지 않는 날들에 있지도 않습니다. 다석은 말합니다. 영원히 가고 가고 영원히 오고 오는 이 우주 한복판에 탁! 하고 찍는 ‘가온찍기’에 있다고 말이죠. 이 찰나 속에 영원을 만나는 참 깨우침이 있다고 말예요. 찍어야 ‘가온찌기/가온지기’가 됩니다. 이 ‘가온찍기’가 돌아가는 올은 한글에도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다석 풀이에 따 르면, 기윽(ㄱ)은 하늘이 땅을 그리워하여 내려오는 꼴이요, 니은(ㄴ)은 땅이 하늘 을 그리며 솟는 꼴입니다. 이 하늘땅, 땅하늘이 한꼴 둥구루움(一圓相)”으로 맞 물려 돌아가는 바로 그 한가운데, 그 자리에 하늘 숨 여는 깊은 산알 소리인 점(하 늘아)을 콕 찍는 것, 이것이 바로 가온찍기입니다. 숫타니파타 1119번째 노래는 이렇습니다. 항상 깨어 있어 세상을 빈 것으로 보라. 자아라는 고정관념을 버려라. 그러면 죽음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세상을 보는 사람을 죽음의 왕은 보지 못한다.” 우리가 거짓 몸나를 깨고 텅 빈 ‘’으로 이 한가운데를 콕 찍을 때, 비로소 내 속에 박힌 산알 홀씨가 터지며 참나로 솟구치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한ᄋᆞ님(하나님)이 낸 홀씨(ᄋᆞ:獨生子)입니다. 홀씨를 깨우고 틔워야 ‘모신하나님(侍天主)’이 됩니다. 그러니 애타게 하늘 꼭대기만 우러를 게 아니라, 끝없이 돌아가는 이 빈탕에서 지금 여기로 늘 새롭게 숨을 돌리는 것, 그것이 바로 ‘없이 계시는 님’을 깨우는 첫걸음입니다.   그림2) 끝없는 빈탕에서 내려와 물 위를 톡 건드리는 손가락은 ‘없’에 ‘있’이 한꼴로 얽혀 돌아가며 싱싱한 산알을 틔워내는 힘찬 우주 숨결을 느끼게 한다. 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아득한 낌새가 온갖 잘몬(萬物)을 품어 기르는 우주 어미인 ‘감 ’의 손길이자 산알 빛숨으로 가득 찬 ‘비움’을 드러낸다. ‘좀나’ 껍질을 깨고 이 한없는 빈탕으로 파고들 때 비로소 속알 속 홀씨가 터져 ‘큰나’로 솟구칠 수 있음을 저 고요한 파문이 웅변하고 있다. #2. 왜 없이 계시는가? : 온통 가득찬 빔 그렇다면 검님은 왜 ‘없이 계시는’ 걸까요? 다석이 말하는 ‘없’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다 써서 바닥 난 빈 곳이나 죽어있어 쓸쓸한 ‘안있(不在)’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말 ‘없’이 가진 참뜻을 깊이 톺아보면 놀라운 우주 올이 숨어 있습니다. ‘없’은 살아있는 산 싹이 돋아나는 ‘업’, 줄곧 있어 이어지는 ‘잇’이 하나로 갈마든 말입니다. 없=업+잇”이라는 이야기죠. 닿소리 미음(ㅁ), 비읍(ㅂ), 피읖(ㅍ)은 다섯 행길(五行) 한가온데 땅자리 흙자리 곧 토(土)입니다. 산알 품은 가온뎃자리입니다. 미음(ㅁ)이 넷녘(四方)으로 고루 번지는 바탕이라면, 비읍(ㅂ)은 그 바탕에 위아래로 싹이 돋아난 꼴이에요. 불, 비, 빛, 봄, 붐 같은 말을 떠올려 보세요. 비읍(ㅂ)이 든 말들은 모두 위로 치솟고 자라는 뜻을 가집니다. 또 ‘없’에 끝소리로 숨은 시읏(ㅅ) 역시 치솟아 이어지는 (잇) 숨빛 힘을 나타냅니다. 한 마디로 생명력이죠. 이렇듯 ‘없’이라는 글씨에는 이미 없(無)에 있(有)이 한꼴”로 얽혀 돌아가며 번쩍입니다. 싱싱한 우주 숨결이 가득 담겨 있죠. 우주는 텅 비어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있지 않은 데가 없고 싸지 않은 것이 없는” 오롯한 숨돌이 가득한 곳입니다. 『삼일신고』는 이 빈탕을 두고 한울은 얼굴과 바탕도 없으며, 첫끝과 맞끝도 없으며, 우ž아래와 넷녘도 없고. 겉은 황-(虛虛)하며 속은 텡-(空空)하여. 있지 않은 데가 없으며, 싸지 않은 것이 없나니라.”고 꿰뚫었습니다. 도마복음에도 예수께서 가라사대, ‘만일 너희 지도자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보라 나라는 하늘에 있다 한다면 하늘의 새들이 너희보다 앞설 것이요... 오히려 그 나라는 너희 안에 있으며 또한 너희 바깥에도 있느니라.’”(3)라고 써 있습니다. 다석이 말하는 ‘없’은 온갖 ‘있’을 움쑥불쑥 나들게 하는 끝없는 산알 밑둥이며, 살아있는 빛숨으로 가득 차 돌아가는 ‘가득 찬 빔’인 것입니다. 우주 잘몬(萬物)은 바로 이 빈탕에 나고 낳고 길러집니다. 늙은이(老子)는 이를 ‘감 (玄牝)’이라 불렀죠. ‘감’은 감아 돌아가는 님이 까마득히 크다는 뜻이고, ‘’은 산알을 내고 낳는 ‘(어미)’을 뜻합니다. 이 말에 검님 숨결인 히읗(ᄒ)이 있습니다. 므로, 까마득히 돌아가는 우주 바탕이 곧 온갖 잘몬을 내고 기르는 한없는 산알 우주 어미라는 뜻입니다. 붓다도 비구들이여, 태어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은 영역이 있다. 만약 태어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은 영역이 없다면, 태어나고 생겨나고 만들어지고 형성된 것들로부터의 벗어남은 불가능할 것이다.”[우다나 8:3 (파탈리가마 소경)]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다석은 참이란 허공밖에 없다. 없어야 참이다. 있는 것은 거짓이다”라고 벼락같이 꾸짖었죠. 세상 사람들이 거창한 ‘있’을 가지려고 좇아가면서 헐떡일 때, 그이는 이렇게 말을 세웠습니다. 나는 없(無)에 가자는 것이다. 없는 데까지 가야 크다. 태극에서 무극에로 가자는 것이다. 이것이 내 철학의 결론이다”라고 말이죠! 예수는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태10:39)라고 했어요. 우리는 너나를 사로잡는 ‘있’이라는 껍질을 깨야 합니다. 우주 어미인 이 한없는 빈탕으로 파고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속이 텅 비워져 안팎 곳곳에 있게 됩니다. 비로소 끝없이 큰 빈탕이 나를 삼키고 나도 빈탕을 품어서 하나로 뚫리게 됩니다. 오직 이 ‘가득 찬 빔’에서만, 우리는 속에 깊이 박힌 참 아름다운 산알 하나인 홀씨(獨生子)를 비로소 틔워낼 수 있습니다.   그림3) 이 그림 속 세 사람은 하늘(하나), 땅(둘), 사람(셋)이 나뉘지 않고 생긴 그대로 오롯하게 어우러지는 ‘온새미로’를 보여준다. 어느 하나가 앞서거나 뒤서지 않고 서로를 온전히 품어내는 우주 ‘둥구루움’ 꼴이다. #3. 하나둘셋 알맞이 : 오롯한 온새미로 이러한 알맞이는 바다 건너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아라비아 숫자가 들어온 13세기 고려말 앞부터 무려 여러 즈믄 해(수천 년)를 이어 온 우리말 수 헤아림에 이미 가르거나 쪼개지 않고 생긴 그대로를 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수 헤아림에 놀라운 온새미로 알맞이가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먼저 ‘하나’는 우주 잘몬을 내는 첫비롯 한울, 곧 하늘입니다. 하나는 안팎 없이 두루 계시며 나죽지 않는 텅 빈 찰나의 긋, 곧 ‘큰 한숨’이자 빛숨입니다. 텅 빈 자리에 움쑥불쑥 산알 틔우는 씨알 어버이며, 우주 앗숨이 터져 비로소 ‘말씀’이 살아있는 ‘말숨’으로 솟아오르는 가온입니다. ‘둘’은 하늘이 줄곧 그리워하며 내리는 곳, 그 하늘을 온전히 받아 산숨을 품고 키우는 두루, 곧 땅입니다. 하늘이 먼저고 땅이 나중인 것이 결코 아닙니다. 땅에 하늘이 들고, 하늘에 땅이 동그랗게 맞붙어 빈틈없이 돌아가는 ‘둥구루움’입니다. 하늘 불숨이 땅에 깃들 때 비로소 몸 안팎을 깨끗하게 채우는 숨빛이 우리를 살아 움직이게 합니다. 그리고 이 하늘땅∞땅하늘이 동그랗게 맞붙은 자리에 움쑥 솟아난 산숨이 바로 ‘셋’, 씨알 사람입니다. 사람은 싱그레 온 벙그레로 피어난 목숨입니다. 하나 하늘, 둘 땅이 어우러져 셋 사람으로 솟구쳐 오름으로써 마침내 천지인(天地人)이 한꼴로 돌아가게 하는 ‘세웃(세움)’이 너나들 우리입니다. 도마복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둘을 하나로 만들 때, 그리고 너희가 안을 겉과 같이 하고 겉을 안과 같이 하며, 위를 아래와 같이 할 때... 그때에 너희는 나라로 들어가리라.’”(22)고 쓴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셋으로 세워진 사람은 나를 내어 온 누리를 빚어내는 ‘넷(나라)’가 됩니다. 여기서 나라는 나랏집 국가(國家)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너와 나로 가르지 않고, 그러니까 ‘나남 없는 하나’가 되어 서로서로서로 얽혀 솟구치는 빛나는 누리, 곧 참 산알 마을(共同體)입니다. 예수도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한17:21)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아가 우리는 온갖 산숨이 고루 일어서게 하는 우주 다스림인 ‘다섯(다사리)’ 섭리로 나아갑니다. 다사리는 민세 안재홍 선생이 강조했듯, 세상 모든 목숨을 다 살리고 다 말하게 하는” 우주 저절로 섭리입니다. 숫타니파타는 살아 있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약하거나 강하거나 몸집이 크거나 중간이거나 작거나,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가까이 살거나 멀리 살거나, 이미 태어났거나 앞으로 태어날 것이거나,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숫타니파타 146~147번째 노래 (자애경)]이라고 썼어요. 그러니 누군가를 억누르는 게 아니라, 얼씨구 절씨구 강강술래 춤을 추듯 잘몬이 각자 산숨(生命)을 누리는 참 스스로요, 참 저절로입니다. 스스로가 저절로를 이루는 춤짓입니다. 그리고 여섯 이음, 일곱 이룸, 여덟 여닫음, 아홉 아우름을 거쳐, 마침내 ‘온 (백)’에 이릅니다. 온은 갈라짐 없이 고스란한 우주 온통입니다. 이 온통에는 길고 짧음도, 멀고 가까움도 없습니다. 때곳(時空)을 뛰넘어 참 우주 ‘온숨’으로 꿰뚫리는 놀라운 깨달음 자리죠.   그림4) 단단하게 땅을 딛고 선 큰 사람 뒷모습은 누리와 만나는 첫 자리이자 모든 깨달음을 받쳐주는 주춧돌인 굳건한 ‘몸’을 뜻한다. 이는 나날이 ‘땀-살림’으로 살알을 깨우고 몸 가온데를 바로 세우는 거룩한 ‘몸성히’ 실천이다. 뚜렷하게 세워진 몸에서만 비로소 마음 고요가 깃들 수 있기에, 그림 속 모양새는 참나로 가는 가장 낮은 곳이자 가장 종요로운 첫 주춧돌을 알아차리게 한다. #4. 첫 번째 디딤, 몸성히 : 몸을 바로 세우는 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참나로 깨어날 수 있을까요? 시원한 빈탕이 될 수 있을까요? 가장 낮은 자리인 ‘몸’에서 첫비롯을 일으켜야 합니다. 다석 꿰뚫움에서 가장 먼저 드러내는 것은 마음도, 높은 깨달움도 아닌 바로 ‘몸’입니다. 네온울(4백조) 살알(細胞) 모둔 몸은 우리가 세상, 곧 누리와 만나는 첫 자리이며 나날살이를 오롯이 받쳐주는 밑바탕이기 때문입니다. 몸이 지쳐 고달프면 판가름이 흐려지고, 지나치게 많이 먹으면 마음이 둔해지며, 나날이 뒤범벅으로 꼬이면 억지로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몸이 무너지면 그 위에 세운 마음 고요도 무너집니다. 도마복음은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육체가 영으로 인해 생겨났다면 그것은 기적이요, 만일 영이 몸으로 인해 생겨났다면 그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라. 그러나 나는 어떻게 이 커다란 부유함(영)이 이토록 가난함(몸) 속에 깃들게 되었는지 놀라울 뿐이로다.’”(29)라고 썼죠. 첫 번째 디딤은 저절로 흐르는 우주 숨결에 맞추어 몸을 가지런히 바로 세우는 일, 곧 ‘몸성히’입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디딤돌이 있습니다. 첫째는, ‘녘’에 맞추어 걷고 점심(點心)으로 먹고픔을 다스리는 일입니다. ‘녘’은 아침저녁이 아니라, 해가 뜨고 지는 하루 바큇살입니다. 해 뜰 때 일어나고 해 질 때 쉬는 이 숨결에 맞추어 꾸준하고 어수룩하게 걷다 보면, 복잡했던 생각이 느려지고 바싹 굳었던 몸이 무르게 풀립니다. 또한, 하루 한 끼를 먹는 ‘점심’은 배를 곯자는 게 아닙니다. 지나친 먹고픔을 다스려 몸을 가볍고 맑게 비워내는 일이죠. 다석은 끼니를 두고 한아님께 예배드리는 극치는 하루에 한끼씩 먹는 일이다. 그것은 정신이 육체를 먹는 일이며 내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내는 일이기때문이다”라고 무섭게 꾸짖었어요. 숫타니파타는 감각기관의 문을 지키고, 음식에 있어서 적당한 양을 알고, 깨어 있음(覺)에 전념하며, 평온함 속에서 부지런히 정진하라.”(70~71번째 노래)고 읊습니다. 둘째는, 땀 흘려 일함으로써 몸에 숨을 돌리는 ‘땀-살림’입니다. 나날이 찬물로 몸을 씻어 살알 하나하나를 여울처럼 깨우고, 뫼 디딤돌을 힘차게 오르내리며 몸 숨돌림을 세차게 돌려야 합니다. 땀 흘려 일하는 걸 삶에 곁붙여야 합니다. 다석은 농부를 여름지기라 했습니다. 열매를 맺으려면 여름지기로 살아야 합니다. 이마에 땀 흘려 일하는 것이 하나님 뜻을 따르는 일입니다. 땀 흘린 뒤에 솟구치는 가벼움과 기쁨을 가리켜 기가 솟는 ‘기뿜’이라고 하셨어요.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요한5:17)라고 써 있습니다. 셋째는, 고르게 숨 쉬며 ‘속알(丹田)’에 불숨을 모아 가온 ‘’을 굳건히 세우는 일입니다. 속알 든 곳이 ‘숨밭’입니다. 코로 깊고 고르게 숨을 쉬어 배꼽 아래 숨밭, 곧 ‘속알’에 산알이 빛나는 불숨을 모아야 합니다. 허리를 곧게 펴고 앉는 ‘앉음(一座)’으로 한 가온데를 바르게 가누어야 합니다. 몸 가온데가 바로 섰을 때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다석은 이를 두고 내가 숨을 쉰다는 것은 성령의 숨을 쉬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또 코로 숨 쉬는데도 몸을 곧이 곧게, 정신이 숨 쉬는데도 곧이 곧장, 이것이 양기법(養氣法), 양생법(養生法), 양심법(養心法)이다”라고 가르치셨어요. 이처럼 때맞춰 우주 숨결을 고르고, 먹고픔을 비워내며, 뚜렷하게 몸 가온데를 세우는 ‘몸성히’야말로, 뒤이어질 ‘맘놓이’와 ‘바탈태우’를 가능케 하는 든든한 첫 바탕입니다. 나날살이로 내 ‘몸’을 쥐어 잡아 바꾸는 이 첫걸음이 바로 참나로 가는 주춧돌입니다.   그림5) 양손을 가볍게 벌리고 눈길을 아래로 둔 채 고요히 서 있는 이 사람은, 밀려오는 온갖 생각에 매달리지 않고 저절로 흘러가게 두는 단단한 ‘맘놓이’ 평온과 흔들림 없는 ‘가온’ 경지를 잘 그려내고 있다. 이는 걱정과 집착을 비워내는 ‘밀’로 있꼴 ‘밑’을 터 열고, 스스로 끊임없이 되묻는 ‘물·불·풀’ 과정을 거쳐 마침내 다다른 속알 모습이리라. #5. 두 번째 디딤, 맘놓이 : 마음을 바로 보는 일 몸을 가지런히 세우는 ‘몸성히’로 밑바탕이 굳건해지면, 다음은 마음을 바로 세우는 ‘맘놓이’로 나아갑니다. 지쳐 고달픈 몸꼴(身體)로는 제아무리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그 고요가 오래갈 수 없기에, 몸성히 다음에 반드시 맘놓이가 이어져야 합니다. 흔히 우리는 ‘마음을 놓는다’, ‘마음을 비운다’고 하면 멍때리기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다석이 말하는 맘놓이는 ‘생각없!’ 그것이기도 하지만, 더 정확히는 어떤 느낌이나 생각이 북받쳐 올라도 거기에 끌려가거나 ‘매달림’이 없는 단단한 힘을 뜻합니다. 우리 마음은 늘 움직입니다. 기쁨에 슬픔이 오가고, 들끓음에 하고픔이 오갑니다. 이 뒤바뀌는 마음을 억지로 멈추려 들면 도리어 탈이 커집니다. 맘놓이는 생각이 달라지는 까닭을 오래 뚫어보며, 마음이 아랑곳하지 않게 다스리는 ‘바로 봄’입니다. 붓다는 마음은 흔들리고 불안정하며, 지키기 어렵고 억제하기 어렵다.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바로잡는다. 마치 활 쏘는 사람이 화살을 곧게 펴는 것처럼.”(법구경 3:33)라고 했습니다. 다석은 이 맘놓이를 위해 세 가지 디딤돌을 밟았습니다. 첫째는 ‘생각불꽃’입니다. 그이는 세상 시끄러운 소리가 아직 마음을 채우기 앞인 새벽을 귀하게 여겼죠. 그이는 사람이 새벽에는 높은 생각을 가질 수 있다. 낮은 이 땅을 떠나 영원한 절대로 올라야 한다”고 했어요. 큰비롯을 가진 알맞이가 아니더라도 ‘오늘은 성냄을 줄이겠다’, ‘고마운 마음으로 살겠다’는 작은 다짐을 마음 마당에 피우는 것입니다. 오늘을 밝히는 이 첫 생각불꽃을 세운 뒤, 내 몸에 닿아 일어나는 느낌, 곧 오온(五蘊)과 나나(私私)가 단지 스쳐 지나는 ‘헛꼴’임을 알아차리고 끌려가지 않아야 합니다. 도마복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길을 지나가는 사람이 되어라’”라고 써있다.(42) 둘째는 마음을 뚫어내는 ‘밀·믿·밑’ 징검다리입니다. 걱정과 쓸데없는 생각들을 억지로 누르지 않고 저절로 흘러가게 놓아주는 비움이 곧 ‘밀음’입니다. 비운 자리가 나면 비로소 줏대가 서게 되는데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속이 비어 튼튼한 대나무처럼 무르고 단단합니다. 그런데 이 대나무만 붙잡으면 딱딱하게 죽어 버립니다. 그럴 때 밑을 터 여는 ‘밑음’으로 깊어져야 합니다. 다석은 믿(信)이라는 말은, 밀(推)다는 말이 믿이 되었다. 어서 터지도록 하라는 것이 믿이다”라고 하시며, 밑을 깊이 터서 솟구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셋째는 속알을 굴리는 ‘물·불·풀’ 되물음입니다. 스스로 끊임없이 묻고(물음), 그 물음에 번뜩이는 깨달음을 크게 불리며(불음), 끝내는 그 깨달음이 다 풀린 바다로 나아가야(풀음) 합니다. 이 물·불·풀의 되물음을 거칠 때, 우리 마음은 좁은 ‘좀나(小我)’에서 하늘 숨 쉬는 ‘큰나(大我)’로 거듭납니다. 다석은 내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 점(點)이 하나 찍혀 있다. 이것이 참을 찾고 빛을 찾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징검다리를 거치고 나면 우리 마음은 이내 가벼워지고 굳건한 ‘가온데’를 갖게 됩니다. 기쁜 일이 있어도 잘난 척하거나 들뜨지 않습니다. 슬픈 일이 닥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예수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라고.(마태6:34) 안팎이 따로 없는 ‘생각없!’ 그 자리에 고요히 이르는 것, 흔들림 없는 가온에 깊이 다다른 자리가 다석이 이끄는 맘놓이 참뜻입니다.   그림6) 서로를 껴안으며 하나로 녹아드는 듯한 두 사람 모습은 저만 옳다는 ‘갇옷’의 껍질을 불살라 제나를 부수고 뛰어넘는 ‘바탈태우’의 힘찬 사랑을 상징한다. 이는 몸과 세상에 사로잡히지 않고 생사를 뛰넘어 늘길로 솟구치는 ‘뛰넘-용오름’ 신비를 보여준다. 어둠과 빛이 맞닿아 훤히 밝아지는 저 숭고한 높오름은 나와 너를 가르지 않고 온 누리 잘몬을 거룩한 성소로 받아들이는 너른 눈의 성취이리라. #6. 세 번째 디딤, 바탈태우 : 있꼴을 밝히는 꿰뚫기 몸이 꼿꼿하게 서고 마음이 빈 바탕에 고르게 놓였다고 해서 꿰뚫움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고요해졌다고 해서 이제 나는 진리를 안다”는 알음알이나, 내가 옳다”고 우기는 앙버팀과 저를 가둔 제 틀에 갇히기 십상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세 번째 디딤인 ‘바탈태우’로 반드시 나아가야 하죠. 우리말 ‘바탈’은 하늘이 본디 일러준 맑고 참된 속알, 곧 본성(本性:天性)을 뜻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맑은 바탈 위에 낡은 버릇과 저만 옳다는 생각 껍질을 겹겹이 덧씌웁니다. 한마디로 제 바탈에 몸때가 끼어서 만들어진 ‘갇옷’입니다. 저가 저 스스로를 가둔 갇힌 옷이죠. 바탈태우는 바로 이 갇옷 껍질을 낱낱이 불살라 제 고픔을 없애는 불꽃입니다. 숫타니파타에 뱀이 낡은 허물을 벗어버리듯, 분노를 가라앉히고, 탐욕을 물리치고, 집착을 끊어버린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리고 떠난다.”(1:1)고 했습니다. 낡은 생각 틀과 매임을 벗고 오롯이 깨어나는 깨끗한 ‘참나’입니다. 저가 저를 말미암으니, 참 제절로(自由)입니다. 바탈태우를 이루기 위해서는 스스로 세운 ‘깨달움’이라는 틀을 가차 없이 뛰넘는 ‘뛰넘-용오름’으로 휘감겨야 합니다. 뒤흔들려야 합니다. 다석은 위로 끌린다는 것은 몸을 초월하고 세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생사(生死)를 초월하면 그것이 자유요, 진리요, 사랑이요, 영원이요, 믿음이다”라고 힘주어 말씀하셨어요. 이때 말을 잘 새겨야 합니다. 몸을 초월하라는 게 죽으란 이야길까요? 세상을 초월하라는 게 여기를 버리란 걸까요? 생사를 초월하라는 건 무슨 뜻일까요? 사로잡히지 말라는 거예요. 몸에 사로잡히지 말고 세상에 사로잡히지 말고 생사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야 자유잖아요. 그 자리가 참이잖아요.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서는 늘 ‘지금 여기’를 보아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용솟음, 용오름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예수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12:24)라고 외쳤습니다. 때로는 훤히 깨달은 것 같다가도 새날이 밝으면 캄캄해집니다. 제아무리 깨어 알아차려도 으스대지 않고 ‘모름직이/모름지기’여야 합니다. ‘있꼴’에 ‘없․빔․텅(無․虛․空)’을 훅 터서 난 그대로 ‘난꼴’로 살아갈 때 나는 빛이 됩니다. 낡은 제나를 부수고 뛰넘으면, 비로소 눈길은 끝없이 넓어집니다. 커집니다. 도마복음도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내놓으면, 너희가 가진 그것이 너희를 구원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 안에 그것이 없다면, 너희가 갖지 못한 그것이 너희를 파멸시킬 것이다.’”(70)라고 했습니다. 나와 다른 생각, 다른 모습을 가진 ‘있꼴’조차도 각자 빛나는 우주임을 오롯이 받아들이는 너른 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나무 한 그루, 작은 산 몬지(物) 하나까지도 한 가온데를 품고 돌아가는 거룩한 성소(聖所)이자 우주 그 스스로입니다. 다석은 머리를 하늘에 두고 곧곧하게 땅을 딛고 반드시 서야 우리는 산다”고 했습니다. 하늘을 이고 걷는 사람은 다른 이의 다름에서도 각자 살아가는 까닭과 제 우주를 찾아냅니다. 부드러운 마음으로 세상을 봅니다. 깊은 어둠 속에서 저절로 빛이 들어 올려지는 힘이 ‘높오름’입니다. 바탈태우는 삶을 더욱 깊이 끌어안고, 너나 우리를 오롯한 올로 사랑하는 가장 높이 높오르는 맨꼭대기 내리오름입니다. 갇옷 껍질을 낱낱이 불사름으로써 도리어 이 세상 잘몬과 내가 오롯한 하나로 꿰뚫리는 놀라운 솟구침, 이것이 세 번째 디딤을 이루는 사랑이요, 참뜻(眞意)입니다.   그림7) 맑고 깊은 응시를 담은 저 얼굴은 몸-맘-얼이 하나로 꿰어져 삶과 앎이 어긋나지 않는 ‘줄곧뚫림’의 참꼴이며, 끝이 곧 머리가 되는 ‘끄트머리’ 신비 속에서 날마다 새 몸으로 솟아나는 ‘사생(死生)’의 장엄한 숨빛처럼 보인다. 이는 죽음이라는 꽃묻엄 위에서 피어난 영원한 늘길의 향기이자, 낡은 껍질을 깨고 찰나마다 새롭게 피어나는 ‘늘비롯’의 삶이 다다른 오롯한 평화가 아닐는지. #7. 꿰뚫기의 길과 끝에 ‘있비롯’: 줄곧뚫림의 참 삶 이제 마지막 디딤돌, ‘줄곧뚫림’에 다다랐습니다. 몸을 세우는 ‘몸성히’, 마음을 비우는 ‘맘놓이’, 낡은 틀을 불사르는 ‘바탈태우’를 거쳐 마침내 다다른 이‘줄곧뚫림’은 그러나 마침표가 아닙니다. 다석이 말하는 줄곧뚫림은 닫힌 말이 아니라 끝없이 열린 말이며, 삶을 온통 뒤바꾸는 날벼락입니다. 참(眞)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줄기차게 뚫리는 것입니다. 산알은 끊어지지 않고 줄곧 이어가는 것이니까요. 이 줄곧뚫림에서는 우리 몸맘에 얼이 나뉘지 않고 하나로 뚫리게 됩니다. 몸-맘-얼이 한 뚫림이요, 하나로 꿰어진 한 줄입니다. 우리는 종종 쪼개진 채 살아갑니다. 몸은 지쳐 고달픈데 마음은 억지로 밝은 척을 하거나, 머리로는 훌륭한 깨달음을 말하면서도 나날살이는 작은 부딪힘에도 쉽게 무너지고 성냅니다. 꿰뚫움과 삶이 따로 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줄곧뚫림에 이르면 이 모든 쪼개짐이 비로소 사라지고, 앎에 삶-잚-찲”이 솟아 어긋나지 않고 꼭 맞게 됩니다. 줄곧뚫림을 이루는 이는 그럼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세상을 등지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홀로 고요한 삶을 살아야 할까요? 그럴 수도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더불어 밥을 먹고, 서로 말을 섞고, 땀 흘려 일하는 브들므릇한 나날 삶이 아름답습니다. 이것이 더 세차게 삶으로 들어가는 힘입니다. 억지로 애쓰지 않고, 일부러 꾸미지 않아도 몸-맘-얼이 어긋나지 않는 삶, 남다른 깨달움을 터서 꿰뚫어도 그저 삶이 저절로 참이 되는 길, 그 삶과 길이 참 무늬입니다. 터 무늬 하나 없는 ‘없자리’입니다. 저절로가 좋습니다. 억지로 하려고 말아야 합니다. 우주 자연은 제 돌아가는 대로 두어두고 그것을 조금조금 매만져 가야 합니다. 억지로 착해지지 말아야 합니다. 일부러 낮추려 하지 않아야 합니다. 가온마음을 잃지 않으면 탁 트인 그대로 살아집니다. 이 공부는 끝을 향해 가지 않습니다. 끝이 아니라 ‘끄트머리’입니다. 끄트머리는 끝에 머리가 달린 꼴입니다. 꽁무니가 꼭대기란 이야깁니다. 끝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마침내 새 산알 머리가 되는 놀라운 숨빛(神祕)입니다. 도마복음은 이렇게 써 놓았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여쭈었다. ‘우리의 종말이 어떻게 될지 말씀해 주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시작을 찾아냈기에 종말을 묻는 것이냐? 보라, 시작이 있는 그곳에 종말이 있느니라. 시작 안에 서 있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는 종말을 맛보지 아니하고 시작을 알리라.’”(18)라고 말예요. 사람들은 시작과 끝을 말하며 시종(始終)이라 하고, 살고 죽는 것을 생사(生死)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석은 거꾸로 종시(終始)이며, 사생(死生)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끝남이 먼저고, 죽음이 먼저입니다. 고픔에 갇힌 ‘몸’을 끝내야만 비로소 날마다 새 몸이 납니다. 죽음을 지나 솟아나는 사생(死生)의 숨빛입니다. 다석은 마지막 숨 끝 그것이 꽃이다. … 인생의 끝은 죽음인데 죽음이 곧 끝이 요, 꽃이다”라고 꽃묻엄(華嚴)을 뿌리셨습니다. 꽃묻엄은 살아나는 묻엄입니다. 묻엄은 무덤이요, 무늬요, 얼룩이요, 휩싸이는 일입니다. 끄트머리에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캄캄한 끝이 아니라, 까마득히 돌아가는 늘길입니다. 늘길에 핀 꽃입니다. 이 꽃내가 얼마나 좋은지요? 공부와 꿰뚫움은 마침이 없습니다. 오직 날마다 새로 비롯하는 일만 있을 뿐입니다. 오늘살입니다. 나날살이요, 이제살이요, 지금살이입니다. 맛지마 니까야에는 지나간 과거를 쫓지 말고, 오지 않은 미래를 바라지 말라.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오직 현재의 법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 깊이 관찰하라. 흔들림 없이, 굴복함 없이 그것을 꿰뚫어 보라. 오늘 할 일을 부지런히 하라. 내일 죽음이 닥칠지 누가 알겠는가.”(131)라고 써 있어요. 나날로 갇옷 껍질을 깨고 깨끗이 솟나기를 바랍니다. 나날로 가온찍기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늘 가온찌기로 삽니다. 가온찌기로 사는 삶에 ‘늘비롯’이 있습니다. 그 자리가 다 열리는 자리입니다. 요한은 계시록에 써 놓았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요한계시록21:5~6)라고요. 때를 잊고 더불어 말씀-말숨-말슴”을 세우고 이 소리를 붙잡아 주어 고맙습니다. 이제 고만입니다. 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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