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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개구리 홀, 김민기와 싱어송라이터 시대를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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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7월 20일이었다. 1970년대가 아니라 2000년대라는 사실을 기억해 두자. 서울 명동의 서울YWCA 1층 마루홀에서는 30대까지만 해도 생소한 이름의 콘서트, ‘청개구리 포크 콘서트’가 열렸다. 첫 초대 손님은 1970년대 여성 첫 싱어송라이터 방의경. 33년 전인 1970년 6월 29일 바로 그 자리에 문을 연 청년문화 공간 ‘청개구리 홀’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여성 가수로는 처음으로 자작(自作) 앨범을 발매하고, 발매 직후 방송 및 판매 금지를 당한 기록도 갖고 있었다. 김민기와 방의경, 양희은은 1970년대 싱어송라이터 시대를 열었다. 사진 왼쪽은 1971년 청개구리홀 무대에서 김민기와 방의경(완쪽)이 노래를 하는 모습.사진:학전제공 . 오른쪽 사진은 방의경과 양희은이 청개구리 홀에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 사진출처: 한겨레신문  ‘청개구리’의 부활을 시도한 건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희한하게도 이런 시도는 10년에 한 번씩 되살아나곤 했다. 1988년엔 ‘청개구리 마당’이란 이름의 부활 시도가 있었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뒤에도 대중음악 평론가 이백천과 가수 이정선이 청개구리 홀의 부활을 꾀하는 콘서트가 열렸다. 이런 시도는 몇몇 흘러간 가수나 기획자들의 회고담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여전히 대중음악의 소비자 가운데 큰 축을 이루고 있는 7080세대의 열렬한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이제는 장년이 되어 대중문화의 주변부에 머물고 있지만, 1970년대 초엔 ‘한국 포크’를 앞세운, 이른바 ‘청년문화’로 기성 문화에 도전했고 신생의 ‘새로운 노래’를 주류 음악으로 끌어 올리는 데 성공한 세대였다. 이들이 1970년대 활동했던 포크 가수들을 소환한 이유는 물론 향수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디 음악’으로 획일화되어 가는 대중음악계에서 다시 한번 ‘새로운 노래’ 운동의 필요성을 환기하고 싶은 욕망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들은 아이돌의 댄스 일변도 속에서 자신의 노래를 되찾고 싶었다. 2003년의 시도는 특별했다. 당시 매월 마지막 주 금요일 오후 8시가 되면, 서울YWCA 1층 마루홀은 100석 규모의 공간에 180∼200여 명의 중장년이 몰려들었다.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때론 객석에 서 있을 공간마저 없어 무대 앞으로 나와, 주저앉아 듣기도 했는데 2시간여 동안 불평 한마디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공연은 서유석, 이용복, 김광희, 방의경, 김의철, 윤연선, 현경과 영애, 박영애, 양병집, 이정선 등 청개구리 시절의 주역부터 김두수, 이원재, 이성원, 나팔꽃 동인, 이정미, 전경옥, 손지연, 박강수, 손병휘, 손현숙 등 2000년대 싱어송라이터로 이어지며, 1년 6개월간 지속됐다. 1985년 33살에 요절하고 23년 만에 열린 김정호 헌정 공연(11월 29일)은 지상파 방송으로도 소개되며 대성황을 이뤘다. 청개구리 부활 콘서트의 이런 성황으로 말미암아, 1970년대의 열광까지는 아니어도 포크 음악에 관한 관심은 전례 없이 커졌다. 그러면 ‘1970년의 청개구리 홀’은 어떠했길래, 30여 년이 지난 뒤에도 중장년들에게 ‘청개구리 홀’은 변함없이 문화적 아이콘으로 남아 있었고, 또 많은 이들이 그 부활을 간절히 염원했을까? 그러니까 1970년 6월 수유리 지하실에서 김민기의 ‘아침이슬’이 탄생할 무렵이었다. 6월 29일 서울 명동 서울YWCA에는, 박정희 정권의 잇따른 정치적 퇴행과 물리적 억압 속에서 마음 둘 데 없었던 청춘들이 노래하고 이야기하고 끼를 발산하는 공간이 생겼다. 여성 청년운동을 하던 YWCA가 마련한 청년들의 쉼터 ‘청개구리 홀’이었다. 얼마지 않아 이곳은 ‘젊은이들의 양지’로 장안의 명소가 되었다. 그곳을 드나든 많은 젊은이 가운데 그곳에서 새로운 문화운동이 탄생하리라 기대하거나 내다본 이는 거의 없었다. 그저 숨 한번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청개구리’의 시작은 그렇게 참으로 소박했다. 말 그대로, 버들잎 한 장이면 충분한 청개구리의 거처 혹은 쉬는 곳 정도에 불과했다. 훗날 부활을 바라는 중장년의 열망에 압도돼 특별한 무대를 상상하면 오산이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 통제와 억압의 엄혹한 시절에 ‘청개구리’라는 이름부터 범상치 않았다. 민담 속 청개구리는 권위에는 무조건 엇나가고 보는 반항의 상징. 실제로 이 홀의 조성을 추진하는 이들은 버드나무의 푸른 이미지와 젊은이의 저항정신 그리고 도약의 이미지를 담았다고 했다. 이 홀이 들어서기 전 서울YWCA 안뜰 구석 버드나무 아래에는 단층 슬라브 가옥이 있었다. 구내식당이었다. 서울YWCA는 식당의 활용도가 낮아 고민하던 터에 이 건물을 없애고 유스호스텔과 같은 숙소를 지으려 했다. 저소득층의 젊은이와 외국에서 여행 온 젊은이들 그리고 지방에서 온 젊은이들에게 싼값으로 잠자리를 제공하자는 것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재원을 마련하지 못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있을 때 이백천 동양방송 피디가 임원진을 설득했다. 그의 사주(?)를 받은 YWCA 청소년 활동가(Y-틴)와 지도교사들도 조직적으로 나서서 호소했다. 청소년들이 수도 없이 오가는 명동에 이들이 앉아 있을 만한 공간이 하나도 없는 게 말이 되는가.” 서울YWCA는 식당 건물을 젊은이의 공간으로 내주기로 했다. 개조하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었다. 휴게공간으로서 시설은 형편없었다. 60평이 넘는 넓은 실내에 녹색 카펫을 깐 게 거의 전부였다. 양희은이 기억하는 ‘카펫’이란 딱딱한 깔개였다. 콘크리트 바닥에 깔판만 깐 것이었다. 의자도 테이블도 없었고, 손님에게는 방석만 제공됐다. 손님은 모두 신발을 벗고 입장해야 했다. 음향, 조명시설도 없었다. 공연이 늘면서 무대장치가 하나둘 늘었다. 다음은 당시 ‘Y-틴(YWCA 청년 활동가)’이었던 양희은의 기억이다. 처음엔, 그러니까 앉아서 노는 좌식 다방이었다. 손님들은 입장할 때 신발주머니 하나씩 받아 아무 데나 철퍼덕 앉아 쉬거나 놀았다. 안에는 장기판이나 바둑판이 있었다. 공간 앞쪽에 무대랍시고 있긴 했지만, 중고교 교실 선생님이 가르치는 교탁처럼 두 뼘 정도 돋워 만든 것이었다. 그것도 이동식이었다. 무대 옆에는 피아노 한 대가 있었고, 무대와 마주 보는 홀 구석의 천장에는 셀로판지를 씌워 만든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의 수동 조명이 있었다.” 1970년 문을 연 서울 명동 YWCA 청개구리 홀은  방황하던 청춘들의 해방구이자 만남의 장소였다.  사진출처:네이버블로그 (추억의 편린들 ) 이후 실내 장식에 신경을 쓰면서 천장과 벽이 모두 푸른색으로 칠해졌고 유리창마다 온통, 청개구리가 뛰어노는 연꽃잎이 그려졌다. 나름 연못 속의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하려 했다. 입장료는 100원이었는데 1원을 거슬러 줬다. 옆에는 유리병 모금함이 있었다. 메뉴는 단 한 가지 콜라뿐이었다. 콜라 한 잔 값으로 99원을 내면 누구나 입장할 수 있었던 셈이다. 오후 7시에 문을 열어 9시에 문을 닫았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었다. 초기 그곳을 찾는 손님들은 바둑 둘 사람은 두고, 장기 둘 사람은 장기를 두며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가면서 손님 중에 기타를 들고 와 노래하는 친구가 생겼고, 그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노래판이 벌어졌다. 어떤 이는 무대(교탁)에 올라가 연기도 했다. 작고한 개그맨 전유성은 그곳에서 팬터마임을 선보였다. 누군가 노래하고 연기를 할 때, 다른 누군가가 먼저 무대에 올라가 소개하거나 재담을 늘어놓으면 그 사람이 그날의 진행자가 됐다. 젊은이 중엔 ‘Y-틴’ 출신이 많았고, 대부분 입소문이 빠른 학생들이어서, 청개구리 홀은 곧 대학생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서울YWCA 임원진을 설득하는데 앞장섰던 이백천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동양텔레비전 음악 프로그램을 맡고 있었다. 워낙 대중음악 특히 팝송과 포크 쪽에 지식과 정보가 많았고 그 분야에 발도 넓어 1970년대 초중반 통기타 군단의 담임선생님으로 통했다. 젊은이의 광장을 만들자고 했더니, 마당에 의자를 놓자는 것이냐고 반문해요. 그래서 구내식당 자리에 그냥 카펫만 깔아놓으면 된다고 했죠. 처음엔 노래할 사람 노래하고, 놀 사람 노는 그런 공간이었는데, 심심하잖아요. 그래서 가수들을 불러 콘서트를 열자고 했죠. 그래서 나오기 시작한 게 도비두(김민기와 김영세), 서유석, 송창식, 라나에스포 등이었죠.” 1970년이면 그 ‘허황한 거리’에서 방황하던 청춘들 사이에 이른바 ‘청년문화’란 것이 싹트기 시작할 때였다. 물론 1968년부터 폭발하기 시작한 유럽과 미국 청년 학생들의 저항정신에 기반한 청년문화와는 근본부터 달랐다. 당시 유럽에선 정치권력과 자본의 새로운 통제와 억압에 맞서 청년 학생들이 봉기하고 있었고, 미국에선 베트남 전쟁을 둘러싼 반전운동이 기성의 것들을 모두 거부하는 히피 문화와 함께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고 있었다. 이에 비해 한국에서 싹트던 청년문화는, 현실도피 혹은 일탈의 성격이 강했다. 독재 혹은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자유와 정의와 평화를 향한 민주화의 노력이 잇따라 좌절되고, 오히려 폭압이 강화되는 데 따른 절망감은 이들에게 현실을 외면하고 잊고 현실에서 벗어나도록 부추겼다. 이때 그들의 거의 유일한 탈출구가 대중음악이었다. 1960년대는 음악다방의 전성기였다. 4‧19 민주혁명의 꿈이 5‧16쿠데타에 의해 좌절되고, 6‧3항쟁마저 허무하게 진압되고 난 뒤였다. 당시 학생들의 선택은 거리에서 저항하든가, 음악다방에서 개기든가, 둘 중의 하나였다고 할 정도로 음악다방은 성행했다. 잘나가는 음악다방 디제이는 은막의 스타만큼이나 열광의 대상이 되었고 이들과 함께 록, 재즈, 블루스 등 서구의 팝 음악이 쏟아져 들어왔고, 거기에 일부 모던 포크가 끼어 있었다. 그런 음악다방 가운데 대표적인 곳이 ‘쎄시봉’이었다. 지금도 70~80대의 마음속에 문화적 고향으로 남아 있다는 곳이다. 다음은 이백천과 함께 쎄시봉 프로그램의 기획자이자 진행자였던 ‘한국의 연예기자 1호’ 정홍택 당시 기자의 기억이다. (당시 유명했던 음악다방이) 충무로에 있다가 1963년 무교동에 문을 연 쎄시봉이 하나이고, 1970년 명동에 문을 연 ‘오비스캐빈(OB’s 캐빈)’이 다른 하나였다. 두 곳은 해외의 최신 대중음악을 감상할 수도 있고, 무대도 설치해 라이브 공연도 가능했다. 물론 두 무대는 일정한 심사 과정을 통과한 이들만 설 수 있었다. 한대수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조영남 이장희 등 김민기보다 한발 먼저 가요계에 진출한 이들이 주로 무대에 섰다. 쎄시봉의 경우 오비스캐빈과 달리 기성 가수들이 추천만 하면 무명이나 신인도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쎄시봉은 1969년 임대료를 내지 못해 문을 닫았다. 그러자 그곳에 출연했던 가수들은 오비스캐빈이나 금수강산으로 무대를 옮겼다. 두 곳은 문화운동보다 상업적 공간이었다. 아무래도 수익과 효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중음악의 새로운 조류를 소개하거나, 새로운 가객을 키우는 무대가 아니었다.” 포크를 애청하고 애창하던 젊은이들 사이에는 쎄시봉의 분위기를 잇는 공간이 나타나기를 열망했다. 그 정신을 잇되, 쎄시봉보다 더 개방적이고 진취적이며, 창조적이기를 바랐다. 그런 바람에서 조성된 곳이 ‘청개구리 홀’이었고, 그런 열망에 불을 지른 이들이 김민기, 방의경, 김광희, 양희은 등이었다. YWCA는 소식지를 통해 청개구리 홀을 이렇게 소개했다. 청개구리는 젊은이들이 대화 통해 인생 경험과 생활 철학을 배우고, 창의적인 예술 활동을 통해 꿈을 가진 생활인으로 살아가도록 돕는 데 그 의의가 있다.”(1970.7.1.) 김민기는 그곳에서 자작곡 ‘친구’를 처음 세상에 알렸다. 그것이 방송을 타고 또 유행하면서 젊은이들 사이에 남의 나라 노래, 남의 이야기를 할 게 아니라 우리도 우리 얘기를 해보자는 움직임이 싹텄다. 물론 김민기가 주도하거나 이끌지는 않았다. 그는 판만 깔았다. 자작 노래의 계기가 마련되자, 청개구리 홀은 뜻하지 않게 노래 공작소가 됐다. 누군가 자기 이야기를 자신의 멜로디에 실어 노래하면, 듣던 이들이 뭐가 좋다느니 뭐가 아쉽다느니 이야기를 나누고, 그 이야기를 받아서 고치고 다시 노래하는 식이었다. 어떤 사람은 간밤에 고생해서 지은 것을 갖고 와 ‘이거 어때?’라며 소개했다. 또 어떤 이가 ‘가사는 없는데 한번 들어’보라며 기타 줄을 튕기며 흥얼거리면 누군가가 가사를 써서 건네기도 했다. 의기투합하면 그 자리에서 노래 한 곡이 완성됐다. 또 ‘이건 네가 부르는 것보다 쟤가 부르는 게 낫겠다’라는 의견이 나오고, 또 동의가 이루어지면 가수도 정해졌다. 당시는 그곳에선 저작권이란 개념이 없었고, 노래를 팔고 산다는 생각은 아예 없었다. 노랫말은 감성이 맞는 사람(작곡자)에게 가고, 노래는 목소리가 맞는 사람에게 갔다. 1970년 6월 29일 서울 명동 YMCA 청개구리 홀 개관식 행사 참석자들의 면면. 사진 앞줄 가운데 양희은과  세번째줄 두번째에서 청년 김민기의 풋풋했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사진 출처:네이버블로그(추억의 편린들)    청개구리 홀은 곧 창작곡 공연 중심의 무대로 바뀌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가요평론가 이백천이 진행하는 포크 살롱 ‘아베크 李’가 열렸다. 이 프로그램을 전후로 목요일엔 연극 프로 ‘목요 극장’이 상설 운영됐고, 언더그라운드 시네마 상영, 클래식 음악 강습회, 명사와의 만남, 젊은이의 광장 토론회, 세계 여러 나라의 민속축제 공연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등장했다. 요리 강습까지 생겼다. 그러나 중심은 포크, 특히 창작 포크 발표였다. 의자도 없는 불편한 공간이었지만 세상의 청개구리들은 자기가 원하는 노래를 짓고 노래하고 듣거나, 연극과 영화를 즐기고 문학과 시국을 토론했다. 주목을 받게 되면서, 김민기는 단순한 참가자에 머물 수 없었다. 프로그램 기획도 하고, 초청 가수 섭외도 했다. 다른 이들이 노래할 때 반주도 하고, 가끔은 저의 노래도 불렀다. 그는 그곳에서 당시 가요계를 주름잡는 피디 형님들도 만나고, 서유석,송창식 등 선배 가수들도 만났다. 또 방의경, 김광희, 이정선, 김의철, 양병집, 한돌 등 창작 포크에 열정적인 동료나 후배와 협업을 하기도 했다. 청개구리 홀은 그렇게 창작 포크 즉 ‘한국 포크’의 문을 열기 시작하고, 싱어송라이터 시대를 열어젖혔다. 김민기는 그런 청개구리 홀과 함께 삶의 중심이 그림에서 노래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양희은을 만났다. 초기 청개구리 홀의 풍경과 작풍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김민기와 양희은의 만남과 협업이었다. 김민기가 김영세와 함께 몇 차례 무대에 올랐을 때였다. 김민기는 도비두라는 이름의 듀엣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언젠가 무대에서 미국 포크그룹 피터 폴 앤 메리의 ‘난 로큰롤 음악이 좋아(I dig rock and roll music)’를 부르는 걸 봤습니다. 김민기가 기타를 굉장히 잘 친다고 생각했죠.” 얼마나 인상이 깊었던지, 양희은은 김민기를 제 노래의 반주자로 삼기 위해 나름 수를 썼다. 양희은은 고교(경기여고) 시절 학교 최고의 가수였다. 그가 재수할 때(1970년)도 친구들은 양희은을 들들 볶아 노래를 시키곤 했다. 재수하면서도 청개구리 홀에 들락거린 건 그 때문이었다. 그 모습이 기독교방송 김진성 피디의 눈에 띄어 그의 목소리가 전파를 타기도 했다. 제가 처음 그 무대에서 노래할 때 거기 CBS PD(김진성)가 와 있었는데, 내 노래를 듣고는 녹음하자고 청했어요. ‘나는 재수생이라 안 된다고, 어머니도 안 된다고 하셨다’라며 거절했는데, 한 번만 (방송국에) 와서 간단하게 피아노 반주에 맞춰서 한번 부르면 된다고 하길래, 서양 노래를 두서너 곡 릴 테이프에다 녹음했죠. 그 노래가 젊은이들이 많이 듣는 오후 시간대하고 밤 시간대에 전파를 타기 시작했는데 반응이 ‘말도 못 할 정도’였어요.” 양희은이 무사히 재수를 끝내자, 친구들은 사은회를 겸한 ‘양희은 리사이틀’을 밀어붙였다. 문제는 기타 반주였다. 1971년 초 어느 날 고교 친구 임문일이 양희은을 동반하고 김민기를 찾아왔다. 방송에서 음악 프로 진행을 하고 있던 친구였다. 두 사람이 절친인 것을 알고, 양희은이 소개를 부탁한 것이었다. 김민기는 그를 보자마자 아는 척했다. ‘너 아버지 없지?’ 유복자로 자란 김민기의 사정을 알 턱이 없는 양희은에게 참으로 생뚱맞은 물음이었다. 사실 양희은은 일찍부터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고교 시절 어머니가 하시던 가게까지 불에 타, 소녀 가장까지는 아니어도 동생들을 돌봐야 할 일이 많았다. 부탁하러 온 처지에 뭐라 하겠는가? 뻘쭘하게 있다가 용건을 말했다. 김민기는 두말하지 않고 그의 청을 수락했다. 알고 보니 양희은은 김민기의 서울 재동초등학교 1년 후배였다. 양희은은 1971년 2월 청개구리 홀에서 양희은은 김민기의 기타 반주로 생애 첫 리사이틀을 열었다. 김민기는 양희은의 첫 공연에 기타 반주를 하는 등 아낌없는 지원을 했다.  사진은 1970년 김민기가 양희은의 노래에 맞춰 특유의 자세로 기타 반주를 하는 모습. 사진출처: 국제신문(김영찬 제공)    당시 양희은이 노래하는 모습을 처음 본 이백천은 당시 모습을 이렇게 전했다. 양희은이 리사이틀을 했던 날, 경기여고 동창생들이 몰려와 대성황을 이뤘죠. 공연 후 양희은이 ‘어땠냐?’라고 묻길래 ‘너무 흥분한 거 아냐? 좀 들떠 보였어’라고 대답했죠. 그러자 양희은은 ‘나 이제 노래 안 해! 다신 노래 안 해’라며 울음을 터트렸죠. 주위 사람들이 그런 양희은을 달래느라고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나는 양희은이 스타로 떠오를지는 꿈에도 생각 못 했죠.” 하지만 공연이 얼마나 성황이었는지, 대중음악계의 갑 중의 갑이었던 방송사 관계자들도 자리를 못 잡아 뒤에서 까치발을 하고 서서 볼 정도였다. 공연 후 양희은은 ‘방송 관계자 선생님’들에게 엄청나게 혼났다.” 귀한 몸을 앉을 자리도 없이 서서 듣게 만들었다는 이유에서였다. 양희은은 그날 고은 시인의 시에 김광희가 멜로디를 붙인 ‘세노야’를 불렀는데, 그를 처음 방송에 태웠던 김진성 피디는 그것이 얼마나 인상적이었던지, 양희은에게 한동안 기독교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세븐틴’의 디제이를 맡겼다. 이후 김민기와 양희은, 임문일은 경희대 응원단장이었던 김윤태를 포함해 늘 붙어 다니는 친구가 되었다. 제 노래를 부르기가 쑥스러운 김민기는 양희은에게 제 노래를 부르게 했고, 양희은은 김민기의 노래와 함께 일약 한국 포크의 디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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