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로그인   회원가입   초대장  
모니터링&뉴스레터   페투미X사회혁신
페투미X사회혁신   서비스 소개   아카이브   이야기   이용 안내
페이지투미는 사회혁신분야의 새로운 정보를 일주일에 3번, 메일로 발송해드립니다.

link 세부 정보

정보 바로가기 : 언더그라운드 김민기, 금지와 감시속 더 깊어진 노래

언더그라운드 김민기, 금지와 감시속 더 깊어진 노래
[사회혁신]
‘새로운 노래’로 열아홉에 방송을 타기 시작하고, 스무 살에 가요사에 이정표가 될 앨범을 내고, 노래 ‘주여, 이제는 여기에’로 한국의 밥 딜런이라는 이름까지 얻었다. 김민기가 이렇게 대중가요계는 물론 청년문화와 민주화운동의 기린아로 주목받을 무렵, 그를 더 유명하게 한 사건이 일어난다. 1972년 4월 정부는 뒤늦게 그의 앨범에 실린 한 곡(‘꽃 피우는 아이’)을 트집 잡아 앨범 발매를 금지하고, 출시된 앨범을 회수해 파기하도록 조치했다. 한참 송출되던 그의 노래들은 모두 한순간 방송에서 사라졌다. 일본 관동군 장교 출신의 출세주의 친일파라는 자신의 행적을 가리고, ‘민족주의자’를 표방하기 위해 일본 대중음악의 수입을 금지하고,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 등을 ‘왜색 가요’라는 이유로 금지곡 처분을 내렸으며, 서구의 반전 저항가요가 유통되는 것을 막긴 했다. 그렇다고 국내에서 ‘예윤’의 사전심의를 거쳐 출시한 앨범을, 뒤늦게 발매 금지하고 수록곡을 몽땅 방송 금지한 건 일제 이후 처음이었다. 당시 대중 가요계는 좁았다. 한창 노래할 청년들이 부를 노래도 많지 않았다. 더군다나 시위 현장에서는 더욱 그랬다. 김민기를 지하로 밀어 넣은, 꽃을 피우는 아이가 수록된 1993년 제작된 김민기 전집 1 표지 사진 이 소식은 삽시간에 가요계와 대학가로 퍼졌다. 게다가 정권이 아무리 폭력적이라 해도 숨 쉬는 걸 막을 수는 없듯이, 노래하는 입을 틀어막을 순 없었다. 비록 방송과 무대에서는 사라졌지만, 그의 명성은 그의 노래와 함께 사뭇 높아졌다. 그는 김지하처럼 서서히 ‘전설’이 되어가고 있었다. 자초지종은 이렇다. 1972년 봄 김민기는 김영세와 함께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 초대받았다. 신입생이라지만, 공릉동 캠퍼스에서 교양과정을 마치고 소속 학과로 진학하는 2년생들이었다. 1학년 때 이미 선배들에게 단련이 되었으니, 조금 더 조직적으로 ‘의식화’가 이루어지는 자리였다. 학생회의 요청은 노래도 몇 곡 함께 부르며 분위기도 고양하고, 또 앞으로 부르게 될 노래 몇 곡 가르쳐달라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김민기가 함께 부르고 가르친 노래는 ‘우리 승리하리라’와 ‘해방가’ 그리고 그가 지은 노래 ‘꽃 피우는 아이’였다. 대학생이던 김민기(사진 왼쪽)가  김영세(오른쪽) 의 요청으로 1970년 도비두를 결성, 음악활동을 시작했을 때의 모습. 물감 값을 벌려고 시작한 화실 밖 활동은 그를 전혀 다른 삶 속으로 이끌었다. 김민기와 김영세가 1972년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부른 꽃을 피우는 아이가  금지곡이 되면서 앨범 김민기 수록곡 전체가  금지곡이 되었다.  사진: 김영세 제공 발칙한 노래들이었다. ‘우리 승리하리라’는 원래 흑인영가였던 게 찬송가로 불리었는데, 그것을 미국의 전설적 포크 싱어송라이터 피트 시거가 편곡하고 포크 가수 존 바에즈가 각종 집회나 시위 현장에서 부르면서 반전운동의 주제가가 되어버린 노래였다 ‘해방가’는 해방 직후인 1946년 소설가 박태원이 작사하고 김성태가 작곡한, 해방의 기쁨을 노래한 것이었다. 작사자 박태원이 월북한 뒤부터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사라지고, 대학가에서나 모임, 집회, 시위할 때 불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구전 가요로 알려지게 되었고, 함께 부를 노래가 별로 없던 4·19혁명 시기 가장 많이 불렸던 노래 가운데 하나였다. 따라서 이제 와 시비를 걸 노래는 아니었다. 문제는 ‘꽃 피우는 아이’였다. 나라를 한입에 말아먹고 싶은 자들이 보기에 불쾌하기 짝이 없는 노래였다. 무궁화꽃이 시들다니, 몽땅 떨어져 버렸다니, 꽃밭을 망쳐버렸다니!” 무궁화 꽃을 피우는 아이 이른 아침 꽃밭에 물도 주었네 날이 갈수록 꽃은 시들어 꽃밭에 울먹인 아이 있었네 …… 꽃은 시들어 땅에 떨어져 꽃피우던 아이도 앓아 누웠네 누가 망쳤을까 아기의 꽃밭 그 누가 다시 또 꽃피우겠나 …… 당시 문리대의 모임이나 행사는 모든 것이 사찰과 감시의 대상이었다. 1960~1970년대 시국 관련 집회나 사건은 열이면 예닐곱, 문리대에서 시작해 문리대에서 끝나다시피 했다. 거의 모든 모의가 문리대에서 이루어졌고, 선언이 나왔고, 시위와 농성이 시작됐고, 전투도 그곳에서 벌어졌으니, 당국으로선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김민기는 이미 주목, 관찰 단계를 넘고 있었다. 시위 현장에선 어디에나 그의 노래가 불리고 있었다. 김민기는 이튿날 새벽 문을 박차고 들어온 경찰에 붙잡혀 동대문경찰서로 끌려갔다. 그가 끌려간 며칠 뒤, ‘꽃 피우는 아이’가 포함된 앨범 는 발매 금지됐고, 시중에 깔린 음반은 모두 수거돼 폐기됐다. 그로부터 그의 노래는 어느 방송에서도 송출할 수 없었고, 콘서트에선 그의 노래를 부를 수 없었으며, 당연히 그가 설 수 있는 무대는 없었다.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를 제외하곤 어딜 가든 두리번거리고, 말을 조심해야 했다. 그는 타고나기를 다툼이 싫었다. 누가 누구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걸 싫어했고, 그런 판에 끼는 것을 피했다. 뒷전에서 서성거리는 그의 모습은 이런 성격 탓이 컸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친구들이 잇따라 체포되고, 징집되고, 수감되고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그의 노랫말에 서릿발이 섞이기 시작했고, 은유는 풍자로 바뀌기 시작했다. 아쉬움과 안타까움, 그리움, 연민 등의 정조가 바탕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썩어가는’ ‘아무것도 살 수 없는’ ‘망친’ ‘시들어’ 등의 절망과 비탄과 분노의 말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자유를 향한 그의 갈망은 더 커졌다. 그렇다고 그의 노래가 비판과 저항의 맥락 속으로 빠진 것은 아니었다. 타고난 바탕인 연민과 서정성은 버릴 수 없었다. 아무리 분노하고 절망적이어도 그것을 서정적으로 풀어내지 않으면 안 됐다. 처절하면서도 잔잔했고, 분노하면서도 연민하고, 비판하면서도 성찰적이어야 했다. 그의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이런 비극적 서정성 혹은 서정적 비극성은 그의 노래를 민주화 혹은 운동 가요에 그치지 않고, 당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노래로 만든 비결이었다. 그는 ‘나가자’라고 외치는 게 아니라 ‘나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성찰과 고뇌’를 그렸다. 외치지 않고, 그림 그리듯 시대적 상황과 ‘나의 감각’을 통해 걸러진 이미지로 세상을 은유했다. 벽에도 귀가 있고, 천장에는 엿보는 이가 있던 시절이었다. 참았던 말 벽에 대고도 할 수 없고, 천정에다 쑥떡을 먹일 수 없었다. 이불 뒤집어쓰고 외쳐도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는 세상이었다. 일터에선 같은 노동자들이 감시하고, 학교에선 사복 ‘짭새’가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모임에도 ‘망원’이 끼어 있었다. 부모 형제지간에도 고발하지 않으면 처벌받았으니, 가족 친지도 의심해야 했다. 만인이 만인을 감시하고 불신해야 하는, 더러운 세상이었다. 꽃 피우는 아이, 두리번 거린다가 실려 있는 김민기 전집 후면 사진. 두리번 거린다는 1983년 양희은 작사 작곡으로  양희은 앨범에 실려 처음으로 세상에 나왔다.   그런 현실에 대한 한탄이 노래 ‘아무도 아무 데도’였다. 어디에도 속 편히 말할 사람 하나 없고, 친구는 종적을 감췄고, 언제 밝은 세상 오리란 기약도 없으니, 돌아서 슬퍼할 뿐이다. 아니오 아무도 찾아볼 이 하나 없소. 찾아갈 곳 하나 없소. 기다릴 이 하나 없소.” 그리하여 세상엔 사람도 많고 말도 많지만, 길은 드넓고 쭉쭉 뻗어 있다지만, 어디로 가야 하나 그저 ‘두리번거릴’ 뿐이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로 가는 걸까, 어디로 가야 하는가? 뙤약볕 가려줄 그늘 하나 없고, 기대어 쉴 곳 하나 없다. 가야 할 곳, 가야 할 길을 일러주는 이정표 하나 없으니, 어찌할거나. 헐벗은 내 몸이/ 뒤안에서 떠는 것은 …말없이 찾아온 친구 곁에서/ 교정 뒤안의 황무지에서/ 무너진 내 몸이 눌리어 우는 것은 …하여 나는 바람 부는 처음을 알고파서 두리번거린다/ 말없이 찾아온 친구 곁에서/ 교정 뒤안의 황무지에서’ 두 노래의 운명도 정해졌다. 찾아갈 곳 하나 없는 황무지라니, 어떻게 그런 불온한 말을 하는가! 노래 ‘두리번 거린다’는 태어나고 10여 년 지난 1983년에야 그것도 ‘양희은 작사, 작곡’으로 양희은 앨범에 수록됐다. 노래 ‘아무도 아무 데도’는 1993년 발매된 ‘김민기 전집’에나 수록된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다. 어디선가 바람은 불어오고, 어디선가 노랫소리 들려오고, 밤하늘엔 별들이 반짝인다. 처음 그곳은 어디일까. 사방이 벽인 ‘이곳’에서 ‘그곳’으로는 갈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떻게 갈 수 있을까?, 지하에도 햇살이 비집고 들어오는 ‘틈’이 있고, 감옥에도 바람 스며드는 ‘사이’가 있고, 쥐구멍에도 볕들 그런 ‘날’은 있는 법. ‘이리저리 부딪히고 채이고 밟히는 그 사이, 비껴가고 스쳐 가는 작은 빈틈, 그 사이’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 틈, ‘그 사이’를 따라가면 별들이 반짝이는 곳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해 저무는 들녘 하늘가 외딴곳에 호롱불 밝히어둔 오두막 있어 노을 저 건너의 별들의 노랫소리 밤새도록 들리는 그곳에 가려네 이리로 또 저리로 비껴가는 그 사이에 열릴 듯 스쳐 가는, 그 사이 따라” (노래 ‘그 사이’) 바람이 부는 곳을 향한 간절함은 열망도 갈망도 아니었다. 질식할 듯 닫힌 공간에서 숨 쉴 틈을 찾아가려는 생존 본능일 뿐이다. 사회 상황을 시인의 감각으로, 가객의 가슴으로 그리고 표현한 것도 아니다. 김민기는 더는 관찰자가 아니라 이미 그런 현실을 살아가는 당사자가 되어 있었다. 수십, 수백만 명이 고향을 버리고 상경했지만, ‘서울’이라고 먹고 살기 쉬운 건 아니었다. 한두 푼 돈벌이의 기회는 더 있었지만, 몸과 영혼을 갈아 넣어야만 하는 정글이었다. 정글이라고 숨 쉴 구석마저 없는 건 아니다. 밟히는 풀이라고 새벽이슬이 매달리지 말라는 법도 없다. 노래 ‘새벽길’은 도시 서민의 애환을 구둣방 할아범의 일상을 통해 드러낸다. 힘겹고 고단한 노동을 흥겨운 선율에 얹어, 그 빛과 그림자를 표현한다. 땅을 디딘 두 발은 고되지만, 동터오는 새벽을 맞아 설레는 그 마음을 노래한다. 김민기가 늘 하는 말이 있었다. 아무리 사자 밥을 꺼내 먹는 광부라도, 뼈 빠지게 농사지어도 영농비조차 못 건지는 농부라도, 동료들과 한잔할 때는 즐거웠고 아이들 곁에 있으면 행복했다. 그들이라고 항상 불행하고 절망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한 면만 보여주거나 강조하지 않았다. 온전함을 보여주려 했다. 빛과 그림자를 함께 보여줬고, 어둠 속의 밝음, 시름 속의 희망을 드러내려 했다. 정치권력이 그에게 어떤 짓을 하건, 분노에 휩싸이지도 상실감에 빠지지도 않고, 이쪽으로 치우치거나 저쪽으로 기울지 않고, 묵묵히 저의 길을 갔다. 1972년 그의 노래는 형식과 구성에서도 달라지고 있었다. ‘새벽길’은 대표적이다. 선율에서는 서양의 음계보다는 한국 전통 민요 특유의 꺾임 음과 시김새를 활용했고, 계면조의 느낌을 살렸다. 노랫말은 두부 장수 종소리 등 토속적인 소재를 이용했다. 민초 사이에서 태어나 민초의 삶을 노래하는 민요를 연상시키는 작법이었다. 창법에서는 판소리 평조의 가창 방식처럼 인위적인 꾸밈을 최소화하고 무심한 듯 툭 던지는 발성을 했다. 정형화된 비트보다는 숨과 여백을 활용해 가사의 의미 전달에 집중하기도 했다. 앨범 김민기 수록곡이 모두 금지곡이 된 가운데 맷돌공연에서 김민기가 선보인 새벽길은 전통의 장단과 창법으로  민중적 형식을 창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진은 새벽길이 실려있는 1993년 제작된 김민기 전집 2 후면 이미지. 폰트라가 추구했던 ‘민중적 형식’을 창조하기 위한 김민기 나름의 고민이 음악적으로 조금씩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이런 노력이 운동 차원에서 하나의 결실을 이룬 것이 1972년 6월과 9월 두 차례 열린 ‘맷돌 공연’이었다. 김민기는 이 공연에서 전통 음계와 선법 그리고 장단과 창법을 살린 ‘새벽길’과 ‘서울로 가는 길’을 선보였다.  1972년 9월 26일 맷돌 특별공연 실황을 담은 앨범 사진. 김민기를 포함해 4월과 5월, 송창식, 신창균, 서유석, 양희은 등이 출연했다. 김민기는 공연에서 새벽길을 불렀다.  김민기가 민속악이나 국악에서 새로운 음악적 형식을 찾고자 했던 것은 ‘폰트라’의 영향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와 관련한 질문을 받으면 그는 주저하지 않고 떠올리는 이가 있었다. 국악에 눈을 뜨게 해준 사람은 김구한이었다!” 조선의 주먹 김두한의 8촌 동생이라는 이다. 김민기를 두고 ‘의식 있는 고삐리’라고 인정했던 눈 밝은 선배이기도 했다. 김민기에게 단소를 가르쳐준 김구한은 훗날 도예가가 되었다. 사진은 독일 중앙박물관에 영구 보존 ,전시된 김구한의 망향 이미지. 그는 김민기가 자생적으로 의식화된 고삐리였다고 회고 했다. 김구한은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 양성소(지금의 국립국악고등학교)를 나와 서울대 음대 국악과(대금 전공)에 진학했다가 중퇴하고 1969년 다시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다. 가난이라면 지긋지긋했던 그에게 밥벌이가 신통찮을 것 같아서였다고 한다. 미술이나 국악이나 돈벌이엔 ‘도긴개긴’이었지만, 아무래도 미술 쪽이 더 적성에 맞았던가 보다. 김민기보다 4살 위지만 미대 학번은 같았다. 둘은 대학이 아니라 종로 파고다공원 부근의 미대 입시학원(향림미술학원)에서 만났다. 한 사람은 음대 자퇴생으로서 만화가를 꿈꾸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고교 3학년으로 미술을 천직으로 알던 이였다. 음악에서 출발해 미술에 터를 잡은 김구한과 미술에서 출발해 장차 노래에 터를 잡게 될 김민기의 만남이었으니 묘했다. 그래서 그런지 둘은 만나자마자 곧 마음이 통했다. 서로 미대에 가더라도 ‘선생질은 하지 말자’라고 약속했다고 한다. 서양 음악에 대해서는 나름 ‘한 가락’ 하는 김민기는 그때 김구한으로부터 틈틈이 ‘단소’를 배우며 국악의 기본을 익혔다. 당시 김구한이 보기에 김민기는 단순한 화가 지망생이 아니었다. 다음은 훗날 과의 인터뷰에서 한 이야기다. 민기는 그때도 기타를 아주 잘 쳤어요. 그림 실력은 말할 것도 없었고. 저한테 ‘형! 딴따라 했어? 우리 같이 미대 가면 이거 하자’고 하는 거예요. 민기가 말하는 ‘이거’라는 게 노래로 부조리한 사회현실을 고발하는 문화 운동이었어요. 당시 나는 우리 사회가 국민교육헌장이나 외워서 그렇게 사는 곳인 줄 알았었거든요. 때리면 맞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면 하고 하는 곳 말이죠. 그런데 민기는 그런 게 아니라는 거였어요.” 그저 이른바 ‘순수’ 미술에 빠져 세상 물정 모를 것만 같았지만, 김구한이 본 김민기는 일찌감치 자생적으로 의식화된 ‘고삐리’였다. 그가 영면한 뒤 ‘불순한’ 의도로 ‘순수’ 논쟁을 일으킨 이들이라면 꼭 새겨둬야 할 이야기다.곽병찬 언론인 chankb1957@naver.com


최근 3주간 링크를 확인한 사용자 수

검색 키워드


주소 : (12096) 경기도 남양주시 순화궁로 418 현대그리너리캠퍼스 B-02-19호
전화: +82-70-8692-0392
Email: help@treeple.net

© 2016~2026. TreepleN Co.,Ltd. All Right Reserved. / System Updated

회사소개 / 서비스소개 / 문의하기 /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