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현의 탄소시장 브리핑】SBTi 2.0이 바꾸는 탄소시장의 판도 [환경] 과학기반감축목표이니셔티브(SBTi)의 기업 넷제로 기준 2.0 발표에 자발적 탄소시장이 술렁이고 있다. SBTi는 비영리 글로벌 이니셔티브로 기업의 탈탄소 목표에 관한 가이던스와 목표 검증 및 인증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번 개정은 단순한 목표 설정을 넘어, 기업의 넷제로에 이르기까지의 전환 과정 전반을 관리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탄소시장의 기대를 불어놓고 있는 것은 지속적 배출 책임(Ongoing Emissions Responsibility, OER) 프로그램이다. 넷제로 달성 이전까지 계속 발생하는 배출량에 대해 기업이 자발적으로 책임지는 구조로, 미참여 시 사유를 이니셔티브에 제출해야 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준의무적 성격을 띤다. 현재 국내 등록 기업 118개사 중 단기 목표를 철회한 15개사를 제외하면 103개사가 참여 대상이며, 개정 기준은 2027년 2월 1일부터 적용되고 2028년 1월 1일부터는 버전 2.0만이 유효하다.
OER 프로그램은 기업의 기여 수준에 따라 세 가지 등급을 부여하며, 등급은 이니셔티브 공개 대시보드(공개 현황판)에 게시된다. 기업은 탄소크레딧과 탄소가격으로 조성된 기여금으로 기후 기여(climate contribution) 활동을 인정받을 수 있다. 기준에 부합하는 탄소크레딧은 검증된 감축 성과 로 분류된다.
기본 등급인 적극 참여(Engaged)는 최근 5년간 누적된 전체 배출량(스코프 1+2+3)의 1%에 해당하는 검증된 감축 성과에 기여하거나, 동 누적 배출량에 상응하는 기금을 조성해야 한다. 중간 등급인 선도적 참여(Advanced)는 스코프 1과 스코프 2 누적 배출량의 100%, 전체 배출량의 최소 10%에 해당하는 검증된 감축 성과를 활용하거나, 해당 배출량을 탄소 1톤당 20달러로 환산한 기여금을 마련해야 한다. 최상위 등급인 선도자(Leadership)는 전체 배출량의 100%를 탄소 1톤당 80달러로 계산하여 기여금을 조성할 뿐만 아니라 기여금을 검증된 감축 성과에 이용하고, 잔여 기여금은 검증된 감축 활동 또는 제시된 기준에 맞는 기후 관련 활동에 사용해야 한다. 이 체계로 조성된 기여금은 검증된 감축 성과, 저탄소 기술·연구 지원, 적응 관련 재원, 재생에너지 및 조림과 같이 실제 감축이 발생하기 전 단계(사전적, ex-ante)의 감축 활동 등에 활용될 수 있다.
세 등급 모두 탄소크레딧을 목표 달성 범위 밖 활동으로 분류하여 감축량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상쇄 크레딧과 구별된다. 특히 기업 소재 국가의 소득 수준과 기업 규모에 따라 분류되는 카테고리 A에 해당하는 대기업 또는 고소득 국가의 중견기업은 2035년부터 OER 프로그램에 의무 편입되고 넷제로 목표 연도 이후 잔여 배출량은 100% 탄소 제거를 통해 탄소 중립을 달성해야 한다.
이번 발표가 탄소시장의 호재로 해석되는 것은, 위축되어 있던 자발적 탄소시장의 크레딧 수요에 예측 가능성과 명확한 유인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주요 기술 기업들의 탄소크레딧 구매가 둔화되고 있는 시점에, 이번 기준은 기업이 크레딧을 얼마나, 왜 구매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근거를 제시한다.
기존에는 1천 톤을 구매하든 1만 톤을 구매하든 기여 수준과 크레딧 단가에 따른 차등 유인이 없었다면, 세 가지 등급 체계는 기업의 탄소 비용을 기여도에 비례하여 차등화한다. 공개 대시보드를 통해 참여 기업들은 자사의 기여도를 타 기업과 명확하게 비교할 수 있어, 기후 대응 분야에서의 기업 평판 관리 수단으로도 활용될 수 있다.
전략적 투자 관점에서 이 체계는 실질적인 감축 및 적응 금융 메커니즘(재원 조달 수단)으로도 기능한다. 예컨대 항공 관련 기업이 탄소 1톤당 20~80달러의 내부 탄소 가격제를 도입하여 조성한 재원으로 대기 중 탄소 직접 포집 기술에 투자하면, 장기적으로 사업 단가를 낮추는 동시에 기술 발전에도 기여 가능하다. 업종과 사업 구조에 따라 이 체계를 전략적으로 설계하는 방식은 기업마다 다를 수 있으며, 실제 활용 방법과 마켓팅(Claim) 기준에 관한 지침은 내년에 배포될 예정이다.
SBTi뿐만 아니라, 배출량 산정 및 보고의 기준이 되는 온실가스 프로토콜의 감축 활동 및 시장 수단 지침(Actions and Market Instruments)도 활발히 개발되고 있다. 이 지침은 배출량 산정 시 탄소크레딧, 재생에너지 인증서와 같은 시장 수단을 어떻게 반영할지를 다루며, SBTi의 목표 수립 및 이행과도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 탄소시장에서는 ICVCM, 기준을 만드는 ISO등의 다양한 이니셔티브도 지침 개발에 협력하고 있다. 이처럼 기업의 배출량 산정과 목표 설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기관들의 변화는, 산업계 기후 대응이 선언의 시대에서 이행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파리협정 당시 많은 기업들이 야심찬 목표를 수립했지만, 이후 전 세계적으로 약 1,341개 기업이 목표를 철회했다. 지난 10년을 거치면서 산업계는 탈탄소가 사회 구조적 혁신과 장기간의 시간, 막대한 재원을 요하는 과제임을 절감했다. 탈탄소 기술의 더딘 발전, 높은 감축 비용, 화석연료 의존적 전력 구조로 인한 재생에너지 전환의 어려움 등 크고 작은 장애물이 그 배경에 있다.
이런 맥락에서 기존에 파리협정 1.5도 경로를 엄격히 고수하며 탄소 제거 크레딧 사용을 넷제로 달성 이후로만 한정했던 SBTi가 이번에 한층 유연한 접근을 택한 것은, 10년간의 현실을 반영한 자연스러운 변화라 할 수 있다. OER프로그램 외에도 이번 기준은 스코프 3 배출량 목표 설정 방식과 1.5도 외 기타 감축경로 도입 등 다양한 개정을 포함하고 있어, 기업 ESG관계자들의 주의가 필요하다. 기후 목표 이행의 시대에 탄소시장이 기후 재원의 핵심 수단으로 재평가받는 흐름이 본격화될지 함께 주목해보길 바란다.
☞박소현 매니저는
박소현 매니저는 클라이밋 아크(Climate Arc)의 아시아 파트너십 매니저로, 전환금융과 자발적 탄소시장(VCM), 국제 탄소 기준 및 거버넌스 분야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에서 환경정치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VCMI(Markets and Standards) 선임연구원으로 근무하며 기업 기후 클레임과 탄소시장 무결성 기준 개발에 참여했다. ICVCM 파리협정 제6조 상응조정 전문가 그룹과 Climate Action Data Trust 상응조정 태스크포스 및 유저 포럼 전문가로 활동하며 국제 탄소시장 제도 설계와 데이터 거버넌스 논의에 관여했다. 에코아이 해외감축사업팀 연구원을 거쳐 탄소시장, 국제감축사업, 기업 거버넌스 관련 다수의 국제 보고서와 가이드라인 집필에 공동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