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 안양천변 칼산에 천막교실 세우고 새 길 모색 [사람들] 손학규는 1960년대 조영래, 김근태와 함께 서울대 운동권 삼총사로 꼽혔다. 모두 경기고 동기동창이었다. 그는 1972년 제대한 뒤 구로공단에서 소설가 황석영과 자취하며 뒤늦게 노동운동에 발을 들였다. 이때 박형규 목사를 만났고, 박 목사가 이끌던 도시빈민운동에 합류해 청계천으로 자리를 옮겼다. 문제의 ‘모택동 노트’가 임진택의 집에서 발견됐을 때는 청계천에서 빈민들과 함께 살고 있을 때였다.
공안 당국은 손학규를 통해 ‘부활절 사건’의 배후가 드러나리라고 기대하긴 했다. 그러나 손학규는 사건의 자초지종을 전혀 몰랐다. 박 목사는 남삼우-진산전으로 이어지는 부활절 플래카드 제작팀에서 문제가 생겨 체포됐다. 손학규는 ‘악성 운동권’으로 찍혀 있던 터에 집에서 모택동 노트 등 ‘불온 출판물’이 발견돼, 체포되고 반공법 위반 혐의로 실형을 살았다.
박 목사 등 부활절 사건 관련자들은, 사실 미리 준비한 플래카드를 단상에 설치, 게시하거나 유인물을 연합예배 현장에서 배포하지도 못했다. 유인물만 이튿날 귀가하던 신도들에게 소량 전해졌을 뿐이었다.
그런 사건에 대해, 그리고 목사에게 내란음모 혐의를 뒤집어씌웠으니, 개신교계나 한국 천주교 등 국내외 기독교계의 항의가 빗발쳤다. 박 목사와 권호경 목사 등 관련자들이 9월 27일 선고가 나고 사흘 뒤 병보석으로 석방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손학규는 별건이었던 만큼 혜택을 받지 못했다. 다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듬해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될 겨를이 없었다. 그는 체포 후 10개월 뒤 항소심에서 무죄를 받고 석방됐다.
김민기가 자책에 빠져 있던 그해 가을 고교 후배 김한(전 JB금융 그룹 회장)이 찾아왔다.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진학의 기회를 줄 수 있는 야학을 세우려고 하는 데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김한은 이미 김민기의 절친 이도성에게 동의를 받은 터였다. 이도성은 당시 동숭동 베다 교회 야학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김민기는 고민할 게 없었다. 노래는 하기 싫고, 할 수도 없었다. 자책에서 벗어나려면 일도 필요했다.
김민기가 미술 교사를 한 영등포구 신정동 안양천변에 위치한 신정학원(신정야학) 천막교실 내부 모습. 사진출처: 한겨레신문( 장남수 작가 제공)
이도성과 김한은 야학 터까지 물색해 두고 있었다. 당시 행정구역으로는 영등포구 신정동 ‘칼산’이었다. 지금은 양천구(1977년 강서구에 편입됐다가 1988년 양천구로 분구) 목동의 갈산근린공원 자리이다. 그들은 앞으로 교실로 쓸 대형 군용 텐트를 3동 구입했고, 야학의 이름도 지어 두었다. ‘신정학원’. ‘야학’이 아니라 ‘학원’이었다.
노동자 전태일 분신 이후 대학가에선 야학의 설립과 운영이 성행하고 있었다. 전태일은 학교에 다니며 공부하고, 대학생 친구를 사귀고 싶었다. 그는 몸에 불을 사르고 떠났지만, 남아 있는 수많은 ‘전태일’의 꿈을 그런 식으로라도 풀어주고자 했다. 안정된 삶이 보장된 ‘명문대생’이 가졌을 법한 마음의 빚도 덜고 싶었을 것이다.
당시 야학은 두 종류로 나뉘었다. 하나는 집안 사정으로 중학교 진학을 못 한 채 일하는 아이들에게 중등 과정 학교 교육을 하면서 노동자로서 자각을 일깨우는 야학이었다. 자체적으로 제작한 교재에는 초보적이지만 생산자와 고용자, 정부와 노동자 사이의 모순 관계, 부익부 빈익빈 현상 등을 담았다. 다른 하나는 아이들의 상급학교로 진학을 도와주는, 계층 이동의 사다리로서 학교 교과과정에 충실한 형태였다. 신정학원 초기 설립자들은 후자를 목표로 삼았다. ‘야학’이 아니라 ‘학원’이라고 명명한 까닭은 여기에 있었다. 이념이 아니라 인도적 배려를 앞세웠던 것이다. 1980년대로 넘어오면서 후배들은 노동 현실을 더 고민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며 ‘신정야학’으로 바꿨다.
신정동 안양천 변은 여름만 되면 안양천이 범람해 삽시간에 펄이 되는 곳이었다. 비가 조금만 많이 오고, 그 물이 한강 하구에서 밀려오는 서해의 밀물과 합세하게 되면, 안양천은 있으나 마나 한 둑을 넘어 밀물에 섞인 개흙을 신정동 일대에 쏟아냈다. 천변은 자기 땅에서 쫓겨난 이들, 도대체 세상천지에 등 기댈 곳 없는 이들이나 모여 살 수 있는 곳이었다.
1972년 무렵 안양천변을 따라 늘어선 판자촌과 천막촌 모습. 사진출처: 매일경제( 국가기록원 제공)
1960년대 말 박정희 정권은 도시미관 정화를 위해 청계천변 등 도심 빈민가 판잣집이나 움막을 일제히 철거하기 시작했다. 집을 잃은 이들은 모래내 천변이나 문화촌, 봉천동‧신림동 산동네에 짐짝처럼 부려놓았다. 그곳은 그래도 변두리지만 서울시 안이었다. 그곳으로도 가지 못한 이들이 떠밀려온 안양천변 신정동은 원래 김포군 관할로, 당시 영등포구로 편입됐다지만 한강과 안양천에 가로막혀 ‘서울’ 취급도 받지 못하던 곳이었다.
서울시나 정부가 철거민에게 해준 것이라곤 군용 텐트를 잇대어 만든 천막뿐이었다. 그것도 턱없이 부족해 많은 철거민은 각목이나 판자때기, 종이 박스를 구해 바람과 비를 겨우 막을 수 있는 움막이나 판잣집을 스스로 지어야 했다.
안양천의 범람을 막겠다며 안양천 둑을 수리하고 그 높이를 조금 높이긴 했다. 그러나 제방이 너무 허술하고 낮아 큰물이 나면 범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게 어디인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야 하는 이들이, 별이 뜨고 달이 떠야 돌아오는 이들에게는 당장 몸을 누일 곳이 필요했다. 게다가 안양천을 가로지르는 오금교를 건너면 문래동, 신도림동 등 소규모 공장들이 빼곡한 구로공단이었다. 저임금에 장시간의 가혹한 노동 조건이지만 일자리 구하기가 쉬웠고, 출퇴근도 편했다,
김한의 훗날 아내가 될 여대생까지 포함해 네 사람이 지금의 신정7동 오금교 건너편 ‘칼산’에 텐트를 친 건 이듬해 초였다. 해발 76m의 둔덕이었던 탓에 안양천 범람으로 펄에 묻히는 걸 피할 수 있는 자리였다. 책걸상을 구해서 놓고, 전기를 끌어왔다. 교과서는 다른 곳에서 쓰던 것을 가져오지 않고 직접 제작했다. I’m a labor. You are an employer.” 등 계급적 색채를 뺀 교과서였다.
박석준, 정병호 등 후배들을 끌어들였다. 준비를 끝내자마자 이들은 직접 돌아다니며 전봇대나 담벼락에 학생 모집 광고를 붙였다. 이도성은 관할 경찰의 허락을 받기 위해 영등포서 보안과로 출근하다시피 했다. 당시 담당자는 국회의원 출마하려고 이런 일 하느냐”라고 빈정대며, 차일피일 시간을 끌었다. 그러나 쇠심줄 같은 이도성의 고집에 결국 도장을 찍어주더란다.
다음은 ‘영광스럽게도 김민기의 제자였다’고 하는 작가 장남수씨의 회고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가난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채 서울로 왔을 때 안양천 주변은 모두 판잣집이었다. 신정동 과자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모집 광고를 보고 찾아갔더니 군용 천막이 있었다. 비록 천막이었지만 우리는 다른 것 필요 없이 몸만 가서 공부하면 됐다.”
야학 수업은 1974년 봄에야 시작할 수 있었다. 처음 학생 수는 20~30명이었다고 한다. 해가 바뀌면서 더 많은 후배가 강사로 참여했다. 훗날 사회에서 한 자리 했던 이들도 많이 포함됐다. 김한 JB금융그룹 회장을 비롯해 정병호 전 한양대 교수, 박석준 전 한샘 사장, 김준규 전 검찰총장, 채정석 전 부장검사, 김봉렬 전 한예종 총장, 이인용 삼성전자 사장, 출판계의 김종수, 김준묵, 이상준 골든브릿지금융그룹 회장 등등. 웬만하면 자랑스러워할 만도 한데, 그중에는 김민기의 시선에 그렇게 곱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공안검사…그건 아니잖아?”
그러나 대부분 신정야학 강학들은 학교를 떠나고 나서도 그 시절 마음에 새겼던 것들을 평생 잊지 않고 살았다. 김민기와 특히 각별했던 정병호(전 한양대 교수)는 신정야학에서 시작해 도시빈민 아이들 돌봄 운동으로 발을 넓혔다.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 신림동 난곡에 세운 해송유아원을 시작으로 도시빈민 아이들 돌봄을 육아협동조합, 공동육아 운동 등으로 확장했다.
어린들에게 관심이 많았던 김민기. 이 사진은 김민기 사후 영정 사진으로 사용됐다. 사진: 학전제공
김민기와 각별했던 정병호 교수의 생전 모습. 정병호 교수는 김민기 못지 않게 아이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는 1980년 난곡에 해송보육학원을 만들었고, 협동조합형 어린이집을 설립해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김민기가 세상을 떠난뒤 4개월후인 2024년 12월 8일 사망했다. 사진: 어린이어깨동무제공
언제는 안 그랬을까마는 도시빈민에게 먹고사는 일 못지않게 큰 문제는 아이의 돌봄과 교육이었다. 부모가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는 아이들은 영양 상태나 학습과 사회적 관계 모두 엉망이었다. 많은 아이가 일찍부터 곁길로 빠졌다. 따라서 당장의 노동 조건이나 복지 제도 개선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아이들에게 적절한 돌봄을 제공하는 일이 중요했다. 이에 따라 정병호는 당시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였던 난곡에 해송유아원을 설립했고, 이후 창신동에 해송아기둥지를 세워 운영했다. 또 여러 부모가 품앗이로 아이들을 돌보는 공동육아를 조직하고, 실천했으며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정병호는 김민기 못지않은 관심사가 하나 있었다. 아이들이었다. 그는 평생 빈민 아이들 돌봄, 공동육아, 탈북 청소년 대안 교육, ‘어린이 어깨동무’ 등 ‘아이들’ 문제에 천착하다가, 김민기가 떠나고 5개월 뒤 그 역시 세상을 떠났다. 일제 병탄기 강제징용 희생자의 유골 발굴 및 송환 문제는 그의 또 다른 과제였다.
김민기는 ‘학원’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학생들은 놀랐다. 노래하는 김민기가 미대생이라니! 김민기는 수업이 끝날 때면 조용조용 이렇게 말하곤 했다고 한다. 절망이란 희망이 없을 때, 희망을 잃었을 때를 두고 하는 말이다. 배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희망이다.”(작가 장남수의 회고) 이렇게도 말했다고 한다. 꿈은 얻는 게 아니다. 꿈은 만들어가는 것이다.” 계산적으로 살지 말고 느끼는 삶을 살아라.”(훗날 사법시험에 합격한 변호사 이공재)
장남수는 당시 신정동의 과자 공장에 다니며 학원에 다녔다고 한다. 그에게는 이런 기억도 있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손을 그리라고 하셨죠. 나는 거친 손을 보이기가 싫어서 도저히 못 그리겠다고 했어요. 그러자 선생님이 곁에 오시더니 편하게 그리면 된다고, 일하는 손이야말로 진실로 아름다운 거라고.” 장남수는 대학을 졸업해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일단 시작은 했지만, 야학을 운영하기란 쉽지 않았다. 필요한 물품은 아르바이트로 충당하거나 용돈을 모아 마련했으니 큰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학부모와 경찰 양쪽에서 생겼다.
하루는 한 학부모가 낫을 쥐고 야학 교실로 쳐들어왔다. 교사를 불러 세워놓고는 다짜고짜 삿대질하며 항의했다. 공장에서 일하면 돈을 벌 수 있는데, 왜 아이들 꼬드겨 돈도 안 되는 공부나 시키고 있느냐.” 학부모의 항의도 힘들었지만, 그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그렇게라도 해야 먹고 살 수 있는 그들 가족의 현실이었다. 이야기가 오가면서 부모의 분도 풀리고 긴장도 풀렸지만, 부모나 교사나 모두 가슴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경찰은 더 큰 골칫거리였다. 관내에 야학이 생기는 건 우범지대가 하나 생기는 것보다 경찰에겐 더 귀찮았다.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투신할 행동대를 양성하는 훈련소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비록 ‘학원’이라고 했지만, 대학생이 어린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니 감시의 눈길을 거둘 수 없었다. 참다못한 경찰은 안면이 있는 이도성에게 야학의 폐쇄 혹은 다른 지역으로 이전할 것을 요구했다. 이도성은 버텼고, 결국 영등포경찰서는 아예 텐트를 걷어갔다.
경찰은 한동안 텐트를 오금교 아래에 방치했다. 학생들은 하루 일이 끝나면 제방 밑 그곳에 모여 김민기 선생님이 가르쳐준 노래도 부르고, 놀기도 하다가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도성은 다시 경찰서로 출근하다시피 했다. 다시 쇠고집을 발휘하고, 고교 및 대학 인맥까지 동원했다. 경찰은 텐트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김민기의 야학 강학(교사)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경찰이 텐트를 걷어가고, 폐쇄를 압박하고, 야학 주변을 감시하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요시찰 인물 김민기의 존재였다. 학생들까지 시달리는 것을 보다 못해 김한이 말했다. 형님이 그만두셔야겠는데요.”
김민기는 1971년부터 도시산업선교회에서 노동자들에게 연극을 지도하는 등 문화운동을 했다. 사진은 1970년대 인천도시산업선교회 모습. 이 곳은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큰 족적을 남긴 민주인사들을 배출한 곳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진출처: 국민일보(인천도시산업선교회 존치협의회 제공)
김민기는 당시 야학과 별도로, 도시산업선교회(이하 ‘산선’), 가톨릭노동청년회와 연을 맺고 있었다. ‘산선’은 예장통합, 감리교, 기장 등 개신교 교단의 산업선교 조직이 통합해 세운 선교회였다. 공식 약칭이 ‘산선’인데도 정부는 ‘도산’이라고 불렀다. 소름 끼치는 이름이었다. ‘도산이 들어오면 기업이 도산한다’라고 기업주나 정부 기관은 선전했다.
‘산선’은 1970년대 유신체제 아래서 가톨릭노동청년회와 함께 대표적인 노동자 지원단체였다. 산선은 노동운동에 대한 외부의 지원을 철저하게 차단하던 그 시절, 3개 교단 및 교회협의회(KNCC)를 방패막이 삼아, 노동조합 조직 및 육성, 노동쟁의에서 노동자 대변 등의 역할과 함께 노동 관련법과 노동자의 권리, 정부와 기업의 범죄 행위 등을 교육했다. 또 노동 의식을 심어주는 각종 소모임 활동도 지원했다. 김민기는 인천 ‘산선’에서 노동자의 모둠 활동을 지원했다고 한다.
김민기를 보면 시인 윤동주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윤동주 역시 남들 앞에서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는 수줍은 청년이었다. 식민지 조선과 동포의 고난에 대한 연민, 일제에 대한 분노 그러면서도 인간 보편 나아가 모든 생명에 대한 사랑만큼은 온몸에 가득한 청년이었다. 앞장서 외치지 못하고, 앞장서 이끌지는 못해도, 빼앗기고 짓밟히고 차별당하는 이들의 아픔과 슬픔과 절망과 분노를 온전히 저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이였다. 언제나 저를 저 낮은 자리에 두었기에, 그의 눈에는 모든 게 귀하고, 새롭고, 아름다웠다. 김민기도 그랬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윤동주의 시 ‘새로운 길’)
청년 김민기는 매일 그렇게 새로운 길이었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곽병찬 언론인 chankb195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