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여년 전 눈 먼 시인이 쏘아 올린 불꽃이...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400년 전의 영국 선비, 한국의 광장에 서다
존 밀턴(John Milton, 1608~1674). 그 이름을 들으면, 우선 서구 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한 시인으로 먼저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정치인이며 동시에 사상가였다. 무엇보다 신의 대리인을 자처하던 국왕의 목을 댕강 자르는 청교도 혁명의 논리를 제공한 이론가였으며, 검열에 정면으로 맞선 투사였다. 밀턴의 생애를 관통하는 키워드 ‘자유’, ‘저항’, ‘책임’, 그리고 ‘극복’은 놀랍게도 21세기 대한민국이 직면하고 있는 여러 사회적 갈등과 맞닿아 있다.
오늘날 표현의 자유와 가짜뉴스 사이에서 길을 잃은 한국사회, 그리고 권력의 비대화와 시민의 주권이 충돌하는 정치적 현장에서 밀턴의 목소리는 여전히 유효한 울림을 준다.
케임브리지 크라이스트 칼리지에 있는 존 밀턴(1608-1674)의 초상화.(위키피디아)
‘금수저’가 청교도 혁명에 앞장 선 이유
밀턴은 런던의 부유한 공증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요즘으로 치면 ‘금수저’이자 강남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인물이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하고 6년의 유럽 여행을 통해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등 7개 국어에 능통했던 수재였다.
그의 초기 삶은 학문적 성취와 개인적 교양을 쌓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1630년대 후반, 찰스 1세(1600~1649)의 전제 정치에 신음하자 그는 상아탑에서 걸어 나온다. 밀턴은 자신이 가진 지식을 개인적인 영달을 위해 쓰지 않았다. 그는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지식인이 침묵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믿었다.
이 대목은 오늘날 한국 지식인들에게 뼈아픈 질문을 던진다. 학벌과 전문지식을 갖춘 이들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침묵하거나, 오히려 권력에 기생하여 논리를 곡해하는 현상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밀턴의 삶은 지식인이 가져야 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보여준 사례다.
런던 브레드 스트리트 1번지에 있는 파란색 명판은 밀턴이 이곳에서 태어났음을 알려준다.(위키피디아)
검열의 시대에 언론 자유를 묻다
1644년 발행된 밀턴의 팸플릿 아레오파기티카 (Areopagitica)는 표현의 자유를 옹호한 가장 위대한 문헌으로 꼽힌다. 당시 영국 의회는 출판물에 대한 사전 허가제를 실시하여 정부 입맛에 맞지 않는 글을 탄압했다. 이에 밀턴은 진리를 가두는 것은 이성을 죽이는 것과 같다”며 사상의 자유 시장 이론을 설파했다. 진리와 허위가 맞붙어 싸우게 하라. 공정한 대결에서 진리가 패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이 논리는 현재 ‘가짜뉴스 심의’와 ‘언론중재법’ 논란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허위정보의 유해성을 막겠다는 명분으로 국가가 정보의 흐름을 통제하기 시작할 때, 그 칼끝은 결국 권력을 비판하는 목소리로 향하기 마련이다. 밀턴은 시민들의 판단력을 믿으라고 조언한다. 비록 혼란스럽고 무질서해 보일지라도, 다양한 목소리가 부딪히는 과정에 진리는 스스로의 빛을 발한다는 믿음이다.
우리가 혐오 표현이나 왜곡된 정보에 대응하는 방식이 과연 ‘국가에 의한 삭제와 처벌’이어야 할지, 아니면 ‘더 많은 토론을 통한 정화’여야 할지 밀턴의 거울에 비춰볼 필요가 있다.
코르넬리스 얀센스 반 쾰렌이 그린 초상화. 버킹엄셔 주 챌폰트 세인트 자일스에 있는 오두막에서 10살 때 밀턴을 담았다.(위키피디아)
왕권신수설을 무너뜨린 인민주권론, 촛불과 법치 사이
1649년 1월 30일, 찰스 1세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유럽 전체가 충격에 빠졌을 때, 밀턴은 처단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글을 썼다. 그는 왕이 하늘로부터 권력을 받았다는 왕권신수설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밀턴은 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며, 왕의 권력은 인민이 공공의 이익을 위해 위탁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만약 왕이 그 신뢰를 저버리고 폭군이 된다면, 인민은 그 권력을 회수하거나 처벌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의 정신과 궤를 같이한다.
한국 현대사는 이 밀턴이 추구했던 가치를 실천에 옮긴 과정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4·19 혁명부터 1987년 6월 항쟁, 그리고 촛불집회와 빛의 혁명 에 이르기까지 한국인들은 ‘주권은 국민에게 있음’을 거리와 광장에서 증명해 왔다.
그런데 밀턴은 동시에 ‘법의 지배’도 강조했다. 왕이라 할지라도 법 위에 있을 수 없다는 그의 주장은 현재 우리 정치권에서 목격되는 ‘법치주의의 도구화’나 ‘내로남불’ 식 법 집행에 경종을 울린다. 권력자가 법을 사유화할 때, 밀턴은 그것을 ‘폭정’이라 규정했다.
버크셔주 호튼의 버킨 매너 농장에 있는 파란색 명판. 존 밀턴은 1632년부터 1638년까지 이곳에 살았습니다 라고 안내돼 있다.(위키피디아)
실명(失明) 구렁텅이에서 일궈낸 실낙원
밀턴의 위대함은 사상뿐 아니라 고난을 견뎌낸 삶의 자세에서도 드러난다. 1652년, 그는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 44세의 나이에 두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는다. 지식인에게 시력 상실은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뒤이어 1660년 왕정 복고로 그의 정치적 꿈은 풍비박산 났다. 동료들은 처형당했고, 밀턴 본인도 투옥되었다가 전 재산을 몰수당한 채 은둔 생활을 해야 했다. 신체적 어둠과 정치적 어둠이 동시에 닥친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인류 최대의 서사시 실낙원 (Paradise Lost, 1667)을 집필한다. 딸들에게 시구를 구술하여 기록하게 한 이 작업은 7년 넘게 이어졌다. 이 작품에서 사탄은 권위에 불복하는 매력적인 반역자로 묘사된다. 지옥에서 지배하는 것이 천국에서 노예가 되는 것보다 낫다.”
이 문장은 억압받는 모든 이들의 심장을 뛰게 했다. 실패한 혁명가였던 밀턴은 문학을 통해 자신의 혁명정신을 영속시켰다. 이것은 시련 앞에 쉽게 무릎 꿇거나 변절하는 한국의 일부 명망가들에게 큰 교훈을 준다. 진정한 신념은 환경이 좋을 때가 아니라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증명된다는 사실 말이다.
밀턴의 저서 아레오파기티카 1644년판(위키피디아)
21세기 한국, 왜 다시 밀턴인가?
우리는 지금 밀턴이 살았던 17세기와 완전 다른 격동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정보는 넘쳐나지만 진실은 오히려 가리고, 정치적 양극화는 대화의 통로를 막아버렸다. 그가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명확하다.
첫째,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인내다. 불편한 진실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목소리를 힘으로 누르려 하지 말고, 자유로운 논쟁의 장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민주주의 기본 원칙을 회복해야 한다.
둘째, 시민주권의 엄중함이다. 선거 때만 주인이 되는 국민이 아니라, 위정자가 법과 상식을 벗어날 때 언제든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깨어있는 시민정신이 필요하다.
셋째, 지식인의 비판정신이다.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진리를 말하는 용기, 그리고 고난을 창조적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불굴의 의지가 곳곳의 지도자들에게 절실하다.
눈 먼 시인 밀턴은 육체의 눈은 잃었지만, 마음의 눈으로 자유 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꿰뚫어 보았다. 400년 전 그가 쏘아 올린 불꽃은 이제 한국의 시민들에게 전달되었다. 그 불꽃을 꺼뜨리지 않고 민주주의의 길을 밝히는 것,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밀턴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다.
세인트 자일스 위드아웃 크리플게이트 교회의 남쪽 통로에 있는 존 밀턴의 동상.(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