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니어링, 무엇을 줄이면 자유로워지나 묻다 [사람들] 헬렌 노스 니어링(Helen Knothe Nearing, 1904~1995)이라는 이름은 한 탁월한 인물과 함께 산 여인의 이미지로 먼저 다가온다. 하지만 그가 남긴 발자국은 지금도 서양 곳곳의 산골마을에서 밟히고 있다. 미국 뉴저지의 부유한 신지학자(Theosophist) 집안에서 태어나 바이올린 신동으로 기대를 모으던 여자가, 어느 날 갑자기 도시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돌집을 쌓고 채소를 길렀다. 신지학자란 신성한 지혜나 영적인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종교적 운동인 신지학(Theosophy) 을 연구하고 따르는 사람을 말한다. 헬렌은 자신의 산 경험을 책으로 써서 세계 곳곳의 젊은이들을 산으로 불러들였다. 요즘 말로 하면 귀촌 인플루언서 의 원조쯤 되겠다.
1920년대 헬렌 니어링(위키피디아)
신동, 구루를 만나다
헬렌은 옷감 장사로 돈을 모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집안 자체가 별났다. 채식을 하고 신지학을 공부하는 지식인 가정이었으니, 1900년대 초 미국에서는 상당히 튀는 축에 속했다. 헬렌은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에 재능을 보여 대학 대신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 정도면 순탄하게 음악가로 살았을 법한데, 인생은 늘 다른 길로 샌다.
스무 살 무렵 헬렌은 인도 출신의 젊은 영적지도자 지두 크리슈나무르티(Jiddu Krishnamurti, 1895~1986)와 연애에 빠진다. 신지학 교단이 미래의 세계 스승 으로 떠받들던 인물이었다. 몇 년을 그와 함께 다니며 구도자의 삶을 살았지만, 결국 갈라섰다. 훗날 크리슈나무르티는 스스로 메시아 딱지를 떼어버리고 독자적인 철학자의 길을 걸었으니, 헬렌은 어쩌면 한 시대를 풍미하던 구루 문화에서 일찌감치 발을 뺀 셈이다.
1920년대 크리슈나무르티.(위키피디아)
스무 살 연상의 퇴출당한 사회주의자 만나
1928년, 헬렌은 스콧 니어링(Scott Nearing, 1883~1983)이라는 남자를 만난다. 나이는 스무 살이나 많고, 이미 사회주의 경제학 교수 자리에서 두 번이나 쫓겨난 전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반전운동을 하다가 대학에서 해고당하고, 미국 공산당에서도 노선이 다르다는 이유로 제명당했다. 요즘으로 치면 블랙리스트에 두 번 오른 교수 다. 보통사람이라면 피해 다닐 이력이지만, 헬렌은 오히려 이 남자에게서 자신이 찾던 진짜 삶의 방식을 발견했다.
둘은 정식으로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함께 살기 시작했다. 스콧의 전처가 세상을 뜬 뒤인 1947년에야 혼인신고를 했으니, 거의 20년을 사실혼 상태로 지낸 셈이다. 당시 보수적인 미국 사회에서 이런 관계를 유지한 것 자체가 이미 작은 반란이었다.
헬렌과 스콧 니어링.(Nearing Enough: Simple Living Lessons – Mother Earth News)
뉴욕을 버리고 돌을 나르다
1932년, 대공황이 한창이던 때 두 사람은 뉴욕의 셋집을 정리하고 버몬트 산골의 낡은 농가로 들어간다. 이유가 걸작이다.
가난하게 살 거라면 시골에서 채소를 기르며 가난한 게, 도시에서 굶는 것보다 낫다.
이 한마디로 뉴욕의 화려한 지식인 사회를 등진 것이다. 두 사람은 손수 돌을 쌓아 집을 짓고, 단풍나무 수액을 받아 메이플 시럽을 만들어 팔며 생계를 꾸렸다. 스키장이 들어서면서 산이 관광지로 변하자 1952년에는 다시 메인주 바닷가로 옮겨 처음부터 새로 시작했다. 여든이 다 된 나이에도 돌집을 짓겠다고 나선 남편 곁에서, 헬렌은 끝까지 삽과 곡괭이를 놓지 않았다.
헬렌과 스콧 니어링(https://blogger.googleusercontent.com)
조화로운 삶 이 불러온 파장
1954년 두 사람이 함께 쓴 책 『조화로운 삶(Living the Good Life)』은 처음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1970년 재출간되면서 상황이 뒤집혔다. 베트남 전쟁과 매카시즘, 소비문화에 지친 미국 젊은이들이 이 책을 성경처럼 끼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헬렌은 하루아침에 귀농운동의 대모 라는 별명을 얻었다. 아흔 살까지 손님을 맞고 글을 쓰던 그는 1995년,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남편 스콧은 그보다 앞서 1983년, 백 살 생일을 지낸 뒤 스스로 곡기를 끊고 담담하게 삶을 마감했다.
Helen Knothe Nearing (1904-1995) - Find a Grave Memorial
한국에서 다시 읽는 니어링 부부
지금 한국을 돌아보면 이 부부의 이야기가 남 일 같지 않다. 서울 아파트 값은 하늘을 뚫고, 은퇴를 앞둔 세대는 여전히 부동산과 자산 걱정에 밤잠을 설친다. 영혼까지 끌어모으다 의 약자인 영끌 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될 만큼, 빚을 내서라도 도시에 붙어 있으려는 강박이 사회 전체를 짓누른다. 하지만 헬렌과 스콧은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 가진 것을 줄이고, 필요한 만큼만 벌고, 나머지 시간은 이웃과 나누는 삶을 택했다.
물론 이 부부에게도 그늘은 있다. 훗날 밝혀진 바로는 두 사람 다 상당한 유산을 물려받아 그 돈으로 땅을 샀다. 완전한 무일푼 자립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이 대목은 오늘날 귀촌 로망 을 파는 콘텐츠들이 종종 감추는 불편한 진실이기도 하다. 시골살이도 결국 어느 정도의 밑천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 이 점은 한국의 귀촌·귀농 담론에서도 곱씹어볼 대목이다.
그럼에도 이 부부가 남긴 핵심은 여전히 유효하다. 성공을 자산 크기로 따지는 사회에서, 하루하루의 노동과 자족을 삶의 척도로 삼겠다는 선언. 은퇴 이후를 준비하는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에게, 니어링 부부의 삶은 돈이 얼마나 있어야 은퇴할 수 있는가 가 아니라 무엇을 줄이면 자유로워지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100년 전 뉴욕의 바이올린 신동이 도끼를 든 이유가, 지금 한국의 아파트 숲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으로 남아 있다.
헬렌 니어링.(Women and Mountains: Helen Knothe Nearing)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