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 하나로 영국 미술사 다시 쓴 시골 청년 게인스버러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18세기 영국 미술계를 뒤흔든 토머스 게인스버러(Thomas Gainsborough, 1727~1788). 옷감 장수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난 이 시골 청년은 평생 자신을 귀찮게 만든 초상화 주문을 받으면서도, 진짜 그리고 싶었던 건 풍경화였다. 마치 생계형 직장인이 퇴근 후 취미에 몰두하듯, 그는 귀족들 얼굴 그리기에 시달리면서도 틈만 나면 나무와 들판을 화폭에 담았다.
자화상 (1759).(위키피디아)
학벌 없어도 됩니다, 실력만 있다면
열세 살에 런던으로 올라가 은세공사 밑에서 도제 생활을 시작한 게인스버러는 정규 미술교육이라고는 받은 게 없었다. 당시 미술계 거물들이 이탈리아 유학을 다녀오며 학벌을 자랑할 때, 그는 그냥 런던 거리에서 실전으로 배웠다. 요즘으로 치면 명문대 대신 독학으로 승부한 셈이다.
1746년 보퍼트 공작의 사생아인 마거릿 버(Margaret Burr, 1728~1797)와 결혼했는데, 이게 재미있다. 아내가 받는 연간 200파운드 연금이 있었기에 가난한 화가는 그림에 전념할 수 있었다. 배우자 덕에 예술가의 꿈을 이룬 케이스다. 물론 게인스버러도 나중에 크게 성공해서 본전을 뽑았지만.
로이드 부인과 그녀의 아들 리처드 새비지 로이드, 서퍽 주 힌틀샴 홀(1745년), 게인스버러 그림. (위키피디아)
영원한 라이벌 레이놀즈와의 한판 승부
18세기 영국 초상화계는 게인스버러와 조슈아 레이놀즈(Sir Joshua Reynolds, 1723~1792) 양강 구도였다. 둘의 차이는 극명했다. 레이놀즈는 학구적이고 직업의식이 투철한 완벽주의자였던 반면, 게인스버러는 여유롭고 자유분방해서 약속 시간을 자주 어기곤 했다 . 그는 그림 그리기와 시간 약속은 기름과 식초처럼 섞이지 않는다 고 당당히 말했다.
레이놀즈는 여러 조수를 두고 옷 전문 화가까지 고용했지만, 게인스버러는 조카 게인스버러 듀퐁(Gainsborough Dupont, 1754~1797) 외에는 혼자 작업했다. 하청 안 주고 혼자 다 하는 장인 정신이랄까.
두 사람은 경쟁자였지만 서로를 존중했다. 게인스버러가 암으로 죽음을 맞을 때 레이놀즈를 찾았고, 레이놀즈는 그의 장례식에서 직접 운구를 했다. 게인스버러의 딸에 따르면 그의 마지막 말은 반 다이크(Van Dyck) 였다고 한다. 죽는 순간까지 존경하던 선배 화가를 떠올린 진정한 예술가였다.
마가렛 버, 게인스버러가 그린 아내 초상화, 1770년대 초.(위키피디아)
초상화는 싫지만 잘 그렸던 남자
게인스버러는 초상화가 직업이지만, 풍경화가 낙이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초상화에 지쳤다. 첼로를 들고 조용한 시골 마을로 가서 풍경화나 그리며 여생을 보내고 싶다 고 푸념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초상화를 정말 잘 그렸다. 그의 대표작 푸른 옷의 소년(The Blue Boy, 1770년경) 은 반 다이크에 대한 그의 찬사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주문자들은 게인스버러의 그림이 자신을 가장 매력적으로 표현해준다는 걸 알았고, 귀족과 왕실에서 앞다퉈 그의 붓을 원했다.
1759년 배스(Bath)로 이주한 뒤 반 다이크의 작품을 연구하며 세련된 고객들을 끌어 모았다. 1774년 런던으로 진출해서는 1781년 국왕과 왕비로부터 주문을 받는 등 최정상 화가가 되었다.
그의 대표작 푸른 옷의 소년(The Blue Boy, 1770년경).(위키피디아)
왕립미술원과의 애증 관계
1768년 왕립미술원(Royal Academy) 창립 회원이 된 게인스버러였지만, 그와 미술원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다. 1773년 자기 그림을 어떻게 걸어놓을지를 두고 미술원과 다투고는 전시를 중단했다가 1777년에야 재개 했다. 그러다 1784년 또다시 같은 이유로 싸우고는 아예 왕립미술원 전시를 포기하고 자기 작업실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요즘으로 치면 대형 갤러리와 결별하고 독립 공간에서 전시한 셈이다. 그림 걸어놓는 위치 하나로 권위와 싸운 이 고집쟁이 예술가의 자존심이 가상하다.
체스터필드 백작부인 앤의 초상화(1777).(위키피디아)
영국 풍경화의 문을 열다
게인스버러의 진짜 역사적 의의는 풍경화에 있다. 그는 리처드 윌슨(Richard Wilson)과 함께 18세기 영국 풍경화파의 창시자로 평가 받는다. 당시 영국 미술계에서 풍경화는 돈 안 되는 장르였다. 초상화나 역사화가 훨씬 고급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게인스버러는 개의치 않았다. 런던에서 시골을 떠난 뒤에도 계속 풍경화를 그렸는데, 때로는 나뭇가지나 조약돌 같은 재료를 작업실에 배치해서 상상력을 자극했다. 1780년대에는 쇼박스(Showbox) 라는 장치를 만들어 유리에 풍경을 뒷면에서 비춰 작품을 구성하고 전시했다. 요즘으로 치면 실험적인 설치미술가 기질도 있었던 셈이다.
그의 풍경화 사랑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1776~1837)과 조지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 같은 19세기 영국 풍경화의 거장들이 게인스버러의 길을 따라갔다.
돼지와 함께 있는 소녀, 1781년. (위키피디아)
음악 애호가였던 화가
게인스버러는 음악광이었다. 친구이자 작곡가였던 윌리엄 잭슨(William Jackson)은 그가 문학인들을 혐오했고 그들의 모임을 피했다... 책 읽는 걸 싫어했다 고 증언했다. 대신 그는 첼로를 사랑했고 음악가 친구들 초상화를 자주 그렸다.
레이놀즈가 이론과 강연으로 미술계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게인스버러는 붓과 음악으로 자신의 세계를 표현했다. 둘 다 옳았고, 둘 다 위대했다. 그저 방식이 달랐을 뿐.
수확 마차(1767).(위키피디아)
변방을 중심으로 만든 남자
게인스버러가 살던 18세기는 영국 미술이 유럽 대륙에 비해 한참 뒤처진 시절이었다. 프랑스나 이탈리아가 미술의 중심이었고, 영국은 변방이었다. 그런데 게인스버러와 레이놀즈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영국 미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미술사학자 마이클 로젠탈(Michael Rosenthal)은 게인스버러를 당대 가장 기술적으로 능숙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실험적인 예술가 라고 평가했다. 정규 교육 없이, 해외 유학 없이, 오직 실력과 열정만으로 미술 강국의 토대를 만들었다.
1788년 8월 2일 61세의 나이로 암으로 세상을 떠난 게인스버러는 자신이 원했던 대로 친구 곁에 묻혔다. 그의 무덤은 2012년 복원되었고, 그가 유년기를 보낸 집은 지금 박물관이 되어 그를 기념한다.
메리 그레이엄 부인의 초상화(1777).(위키피디아)
우리가 배울 것
게인스버러의 삶에서 우리는 몇 가지를 배운다.
첫째, 학벌보다 실력이다. 명문학교 졸업장 없어도 끈기와 재능으로 정상에 오를 수 있다.
둘째, 하기 싫은 일도 최선을 다하되,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지 마라. 그는 생계용 초상화를 그리면서도 사랑하는 풍경화를 멈추지 않았다.
셋째, 권위와 타협하지 않는 고집도 때론 필요하다. 왕립미술원과 두 번이나 싸우며 자기 방식을 지킨 그의 뚝심이 없었다면, 그저 그런 화가로 남았을지 모른다.
넷째, 경쟁자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레이놀즈와의 우정은 예술가들에게 경쟁이 증오가 아닌 발전의 동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18세기 시골 출신 청년이 붓 하나로 영국 미술사를 다시 쓴 이야기.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가 아닐까. 학벌이나 배경이 아닌 실력과 열정으로 승부하는 이들에게 게인스버러는 여전히 살아있는 영감이다.
그가 임종 직전 남긴 반 다이크 라는 마지막 말처럼, 진정한 예술가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예술을 잊지 않는다. 초상화로 먹고 살았어도 마음속엔 항상 풍경이 있었던 남자, 토마스 게인스버러. 그는 그렇게 영국 미술을 변방에서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공원에서의 대화 (1746).(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