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아래 사라진 그의 목소리 달빛 아래 울려퍼졌다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역사적 전설의 시작
그는 열아홉에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고, 스물에 전설적인 앨범 ‘김민기’를 발매했고, 스물하나에 ‘금표’가 붙었다. 앨범은 수거돼 폐기됐고, 그의 목소리는 방송에서 사라졌다. 햇빛 아래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웬걸, 달빛 아래 그는 없는 곳이 없었다. 일하는 이들의 작업장이나 가난한 젊은이들의 차가운 자취방, 불의와 맞서는 거리나 침침한 선술집 목로엔 언제나 그가 있었다. 구슬땀 흘리는 노동자의 벗이 되었고, 의를 위해 핍박당하는 이들에겐 위로가 되었다. 전설이란 언제나 그런 것일까?
1987년 7월 9일, 이한열 열사 서울시청 앞 노제. 김민기는 이 자리에서 백만 명의 군중이 부르는 ‘아침이슬’을 들으며 ‘이제 이 노래는 내 노래가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 사진 출처 : 6월항쟁 공식 홈페이지
그를 찍어 누르던 박정희, 전두환 정권이 비명에 갔다. 다시 햇빛 아래 등판할 법도 했지만, 그는 여전히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스무 살에 나온 앨범 표지 그림뿐이었으니, 그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민중가요나 대중가요, 연극판이나 뮤지컬, 심지어 영화판 어디에도 그의 그림자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지상에는 조용필, 지하에는 김민기’라는 표현은 음악평론가 사이에서만 도는 게 아니었다. ‘조용필은 역사, 김민기는 전설’이라는 말은 그에 대한 일종의 비문이었다.
그런데 20대 초 새파란 청년이 전설의 주인공이라니! 찬탄이 아니라 안타까움이다. 역사 속에서 청년이 주인공인 전설은 언제나 불온했다.
조선의 남이 장군과 정여립의 전설이 그렇고, 민담 속의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의 전설이 그랬다. 서구의 프로메테우스 신화도 그랬다. 억압자들에게는 불온했고, 따라서 이들은 참혹한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우리가 잘 아는 남이는 17살에 무과에 급제하고, 26살에 공조판서, 27살에 병조판서가 되었다가 그해 모함을 받아 능지처참당했다. 밤하늘의 혜성을 보고,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다”라고 한 말이 빌미가 되었다. 정여립은 천하는 공물이거늘, 어찌 주인이 따로 있겠는가” 혹은 누군들 섬기면 임금이 아니겠는가”라고 대놓고 주장했다. 혼군과 권력자들의 역린을 잡아 흔드는 것이니, 참화를 피할 수 없었다.
흔치 않은 이 불온한 전설은 그러나 시대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판본으로 등장했다. 시대가 어둡고 춥고 고통스러울 때면 여지없었다. 이들을 소환하는 건 빼앗기고 짓눌리고 쫓겨난 이들의 원망과 비원. 그것은 민담이나 전설 혹은 신화로 부활했다. 그들은 어둠 속의 별빛이었고, 혹한 속의 화톳불이었으며, 아득한 동녘의 여명이었다.
흔히들 김민기 하면 칠레의 빅토르 하라를 떠올린다.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이라고 했던 칠레의 역사이자 전설. 그가 뿌린 ‘누에바 칸시온(새로운 노래)’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힘센 자들에게 당한 폭력을 따진다면, 또 그가 민중들에게 받은 사랑을 떠올린다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하라와 그는 전혀 달랐다. 산과 바다만큼이나 거리가 멀었다. 김민기는 그저 밑으로 흘러 지하수가 되었고, 하라는 안데스를 내달리는 산맥이었다.
김민기도 1960년대 폭정의 아르헨티나, 칠레 등 남미의 저항운동을 알고 있었고, 그 속에서 전개된 ‘누에바 칸시온’ 운동의 의미를 새기고 있었다. 그가 즐겨 부른 것은 미국의 민중가수 우디 거스리나 반전 가수 밥 딜런이나 조안 바에즈 등의 프로테스트 포크였다. 그러나 그는 노래를 했을 뿐,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에겐 말 못 할 불행한 가족사가 있었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청춘 남녀들의 사랑 타령이나 질질 짜는 노래에는 질색했다. ‘지금 여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남의 나라 노래를 적당히 윤색해 부르는 것은 생리에 맞지 않았다. 판타지나 희롱하는 노래는 더 지긋지긋했다. 그는 그저 한 시대를 살아가는 나의 이야기를 노래하고 싶었고, 우리의 음악적 전통이 살아있는 노래를 짓고 싶었으며, 그런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그런데 그것이 당대를 힘들게 살아가는 친구나 이웃에게 위로가 되고, 불빛이 되었을 뿐이었다.
전설적인 역사의 시작
그는 한국전쟁 중 유복자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인민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난무하던 국가 폭력 속에서 자랐다. 그가 어떤 형태의 억압이나 폭력, 강요를 증오했던 건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그는 앞장서 저항할 생각도 없었고 의지도 없었다. 하라처럼 통기타를 총으로 생각한 적도 없었고, 그 기타를 들고 변혁의 전선에 선 적도 없었으며, 불의한 자의 총구에 제 가슴을 들이민 적도 없었다. 빼앗기고 짓눌린 이들만을 염두에 두고 시를 짓고 노래하지도 않았다.
그는 시대의 뒷골목에서 두리번거리며 방황하던 많은 청년 가운데 하나였다. 다만 무언가 더 근원적인 것을 찾아 고민하던, 재능이 특별한 청년이었다. 게다가 그의 곁에는 고초를 겪던 친구가 많았고, 이들의 부름에는 빠짐없이 따른 인정 많은 친구였다. 따라서 그가 약관의 나이에 ‘불온한 전설’의 주인공이 된 것은 팔 할이 박정희 정권의 폭력이었다.
초중고교 시절에 그가 파묻혀 지낸 것은 그림. 미대에 진학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중고교 때 음대 다니던 누나의 영향으로 우쿨렐레를 불고 기타도 독학하고, 습작 삼아 노래를 짓거나 불렀을 뿐이다. 대학 초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가 사람들 앞에 얼굴을 드러낸 것은 순전히 푼돈 때문이었다. 대학 입학 후 그림에 몰두하면서 화구 값이 버거웠다. 세차장 아르바이트도 했지만, 빚은 쌓여만 갔다. 그때 들려온 ‘노래도 돈이 된다’라는 친구의 말에 솔깃해 그를 따라 대학 행사에도 가고, 음악다방 무대에도 섰다. 당시 신세대 가수의 요람인 쎄시봉의 오프닝에도 출연했다.
1971년 서울 명동 YWCA 청개구리 홀에서 김민기가 마이크도 없이 기타반주에 노래를 하고 있다. 사진출처: 학전
그런 그의 삶을 결정적으로 바꾼 것은 ‘청개구리 홀’ 무대였다. 1970년 여름이었다. 서울 명동 YWCA 한 귀퉁이에 청년들의 쉼터가 생겼다. 오갈 데 없는 청년 군상들은 그곳에서 위로를 구했고, 이 홀은 자연스럽게 청년들의 문화공간으로 바뀌었다. 즉석 공연도 벌어지고, 콘서트도 생기고, 진행자도 나섰다. 그곳에서 김민기는 친구와 가벼운 팝송을 부르거나 친구의 노래에 기타 반주를 했다. 그리고 제가 지은 노래를 제가 부르는 경우가 생겼다. 해외 포크 음악계에선 흔했지만, 당시 우리 가요계에선 진풍경이었다.
처음 선보인 자작곡이 ‘친구’였다. 3년 전 고교 3년 때 작곡한 노래였다. 마침 그 자리에 있던 한 귀 밝은 음악평론가(이백천)에게 발견됐고, 이백천은 이 노래를 자신이 진행하는 동양방송 음악 프로그램에서 단골로 송출했다. 그해 말 또 다른 귀 밝은 음악평론가(최경식)의 눈에 띄어 ‘아침이슬’이 CBS를 통해 송출되기 시작했다. 최경식은 이듬해 가을 그의 자작곡만으로 앨범을 만들자고 했다. 김민기로서는 몹시 부담스럽고 객쩍은 일이었다. 그러나 하늘 같은 선배의 강권과 맥주를 양껏 사겠다는 회유에 넘어가 음반 제작에 동의했다. 훗날 한국 포크의 원조로 평가받으며,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이정표이자 분수령이 된 앨범,‘김민기’이었다.
김민기는 1971년에 1집 앨범 를 발표했다. 이 음반은 한국 대중음학사의 이정표가 되었다. 사진은 1987년 재 발매된 비공식 음반.
음울한 시대, 고민하는 청춘들은 솔깃했다. 수록된 노래들은 모두 저의 이야기, 저의 처지를 토로하거나 하소연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자 서유석, 송창식, 이장희 등 가요계 선배들이 뒤늦게 저마다의 감성으로 저마다의 이야기를 무대에 올랐다. 싱어송라이터의 봇물이 터졌다. 정치적으로는 암울한 시대였지만, ‘한국 포크’ 나아가 한국 대중음악으로서는 찬란한 ‘역사적 시간’이었다.
음반 발매 이후, 졸지에 명사가 된 김민기는 1972년 서울대 문리대 진학생 환영회 무대에 초청받았다. 교양과정을 끝내고 본과로 진학한 문리대 학생들과 선배들이 만나는 자리였다. 당시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게 문리대였으니, 그 자리의 성격은 자명했다. 김민기는 학생들에게 몇 가지 노래를 가르치고, 아는 노래들을 함께 불렀다.
이번에 정보기관에서 그를 주목했다. 이튿날 동대문경찰서로 끌려갔고, 이후 그의 노래는 모든 방송, 모든 무대에서 사라졌다. 앨범 ‘김민기’는 모든 매대에서 사라졌고, 녹음 원본도 압수당했다. 음악 프로그램 진행자들이 송출하던 그의 노래는 일시에 종적을 감췄다. 1972년 4월, 앨범이 출시되고 불과 6개월 만이었다.
참으로 위태로운 시기였다. 6개월 전인 1971년 10월 15일엔 위수령이 발동돼 군대가 학원에 진주했고, 대학가는 쑥대밭이 되었다. 6개월 후인 1972년 10월 17일엔 비상계엄령과 함께 친위쿠데타가 일어나 유신체제가 등장했다. 한국 사회는 거대한 병영 혹은 판옵티콘(원형 감옥)으로 바뀌고 있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을 쥐가 들었고, 쥐도 새도 모르게 병영이든 감옥이든 어디론가 끌려갔다. 요즘 ‘민주주의’에 무임 승차해 삼권분립, 사법 독립을 외치는 판검사들은 독재 권력의 수족에 불과했다. 정권의 주문에 따라 정찰제 구형, 정찰제 선고를 남발하던 이들이었다.
그러나 권력이 제아무리 주도면밀하다 해도, 스미는 물을 막을 수 없고, 불어오는 바람을 되돌릴 수 없는 법. 물처럼 바람처럼 마음에서 마음으로 파고드는 그의 노래를 권력이라고 봉쇄할 순 없었다. 막으면 막을수록 더 널리 퍼지고 누르면 누를수록 더 깊이 스며들었다. 청년들은 물론이고 ‘고딩’ ‘중딩’까지 ‘팬’이 되었다.
당시 경찰은 그의 노래를 알고 있는지로 데모꾼 여부를 가렸고, 시위 가담의 적극성과 소극성을 그의 노래를 얼마나 불렀는지로 가렸다. 그러니 학생들 사이에서 김민기 노래를 모르면 ‘간첩’이 되었다. 막아서 키우고, 억눌러 부풀게 한 ‘유신 정권과 김민기’의 희한한 동행이었다. 결국 그의 노래를 파묻으려는 자는 피살당하고, 그의 노래는 전설이 되고 역사가 되었다.
소설가 이병주는 대하소설 ‘산하’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산하는 햇살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찬란하지만 알쏭달쏭한 이 비유는 김민기의 삶에 대입하면 그 뜻이 선명해진다.
이병주는 역사가 산맥을 기록한다면 자신의 소설은 골짜기를 기록한다고 했다. 김민기의 노래가 떠내려간 곳은 바로 그 골짜기, 역사의 그늘이었다. 폭압 앞에서 이도 저도 못하는 이들이 웅크리고 두리번거리던 곳, 물러설 곳 없는 노동자가 새벽을 기다리는 곳이었다, 정보기관에 쫓기고 경찰에 쫓기는 이들이 조심조심 숨 쉬는 곳이었다.
그렇다고 ‘김민기의 전설’이 순전히 ‘박정희, 전두환 권력의 작용(폭력)’ 덕만은 아니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권력은 그를 이전처럼 노골적으로 억압하진 못했다. 그해 10월 금지가요 해금 이후에도 10년이나 더 질기게 살아남은 한국공연예술윤리위원회(공윤)가 한사코 그의 작품을 칼질했지만, 방송이나 판매까지 금지할 순 없었다. 김민기는‘연이의 노래일기’를 담은 음반, ‘엄마,우리엄마’ 도 내고, ‘김민기 전집’도 냈다. 팔자에도 없는 극장장도 되고 극단 대표가 되기도 했다. KBS의 간판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전설이 되고 역사가 되었다
햇살 아래 고스란히 노출됐으니, 이쯤 되면 전설은 역사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능선 혹은 봉우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한사코 무대 뒤를 고집하며 한국 공연예술의 비고 여린 곳을 채우고 키웠다. 그리하여 뮤지컬 불모지 시절 관객 스무 명 남짓으로 출발한 ‘지하철 1호선’은 4000회 소극장 공연이라는 신화를 만들었다.
록뮤지컬 지하철1호선 역대 출연자들이 2006년 3월 학전그린에서 3000회 공연을 앞두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는 라이브 콘서트의 전설이 되었고, 김광석 콘서트는 한국 대중음악의 신화가 되었다. 극단 학전 출신 연기자, 설경구 황정민 김윤석 장현성 이선민 등은 이 나라 영화와 공연 예술계의 대간을 이루었다. 소극장 ‘학전’에서 나고 자란 가객들은 ‘한국 팝’의 저변이 되고, 바다가 되었고, 급기야 K-팝 신화의 뿌리가 되었다. 학전의 ‘한살림’은 한국 공연 예술계 종사자들의 로망이 되었다. 그는 달빛이 아니라 햇빛 속에서도 역사가 되고 또 전설이 되었다.
그러면 그를 시대의 전설, 혹은 역사적 전설로 이끈 것은 무엇일까. 1973년 신정동의 천막 학원(야학) 시절이었다. 당시 몇몇 어린 노동자들은 ‘김민기 선생님’의 이런 이야기를 아직도 기억한다. 계산하지 말고, 마음이 느끼는 대로 살아라”
절망할 시간도 없이 가난에 쫓기고 일에 파김치 된 어린 노동자들에게는 쉽사리 공감하기 힘든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짧은 시간 그와 함께 천막에서 보낸 이들은 이 말을 잊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살려고 했다. 도대체 그의 마음이 어떠했길래, 세상을 어떻게 느꼈길래, 그는 롤러코스터와도 같은 굴곡진 역사 속에서 전설이 되었고, 전설적인 역사가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