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동혁 대표 단식, 무모함과 지켜야할 민주주의의 선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종교인의 단식은 음식을 끊는 금욕적 행위가 아니라 욕망을 낮추고 자신을 비워 신 앞에 서는 영적 실천이다. 단식은 인간이 스스로 생존의 주인이 아니라 의존적 존재임을 몸으로 고백하는 행위이며,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선언을 말이 아니라 신체로 드리는 고백이다. 그래서 단식은 무엇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무엇을 내려놓기 위한 결단이다. 요구가 아니라 고백이며, 압박이 아니라 무력함의 인정이다. 이 대목에서 단식은 언제나 윤리적 긴장을 전제한다. 단식이 존중받기 위해서는 그 행위뿐 아니라 그 행위가 향하고 있는 방향 역시 정당해야 한다.
통일교·공천헌금 쌍특검 수용을 요구하며 단식 7일 차를 맞은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21일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 홀 단식 농성장에서 물을 마시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오늘 한국 정치의 풍경 속에서 단식은 점점 본래의 의미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특히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단식은 극단의 선택이 어떻게 정치적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압박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다. 문제는 단식이라는 형식의 과잉만이 아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그 단식이 겨냥하고 있는 요구 자체가 민주주의 기본 원리와 법치 질서를 정면으로 침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치적 요구는 모두 같은 무게를 갖지 않는다. 어떤 요구는 민주주의를 확장하지만, 어떤 요구는 민주주의를 잠식한다. 장동혁 대표의 요구는 후자에 가깝다. 그가 단식을 통해 관철하려는 바는 수사와 사법의 영역에 정치가 개입해 방향을 바꾸라는 요구다. 이것은 단순한 정책 이견이 아니라 헌법 질서의 근간을 이루는 삼권 분립 원리에 대한 도전이다.
삼권 분립은 권력을 나누기 위한 장식적 원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권력이 언제든 오만해질 수 있다는 불신 위에 설계된 민주주의의 안전장치다. 입법, 행정, 사법이 서로를 견제하지 않을 때 권력은 반드시 사유화된다. 정치인은 법을 만들고 제도를 고치는 위치에 있지만, 개별 사건의 수사 과정이나 결과에 개입할 권한은 없다. 그것이 불편하다고 정치적 압박을 가해 사법의 결정을 흔들려 한다면, 그 순간 정치는 민주주의의 수호자가 아니라 파괴자가 된다.
장동혁 대표의 요구는 바로 이 대목을 건드린다. 그는 자신의 요구를 ‘정의’나 ‘정치적 신념’의 언어로 포장하지만, 그 실질은 특정 사안에 대한 사법 절차를 정치적으로 재단하라는 요구다. 이것은 공공의 이익을 위한 요구가 아니라 정치 권력이 사법 위에 서려는 오래된 유혹의 반복이다. 민주주의는 바로 이 유혹을 막기 위해 헌법과 제도를 세웠다.
정당한 정치적 요구는 시민 전체의 권리와 안전, 정의의 확장을 향해야 한다. 그러나 장동혁 대표의 요구는 그 방향에서 벗어난다. 그것은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도 아니고, 제도의 구조적 불의를 바로잡기 위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정치 세력의 이해관계를 법 위에 올려놓으려는 시도에 가깝다. 정치가 법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법을 자기 편의에 맞게 재배치하려는 요구다.
이런 요구가 위험한 이유는 단지 지금의 사안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만들어낼 선례 때문이다. 한 정치 지도자가 단식을 통해 사법 절차에 영향을 미치려 한다면, 앞으로 어떤 정치인도 같은 방식을 쓰지 말아야 할 이유가 사라진다. 정치적 경쟁은 정책과 비전이 아니라 누가 더 극단적인 몸의 투쟁을 벌이느냐가 좌우하게 된다. 이때 민주주의는 설득과 토론의 체계가 아니라 고통의 경연장이 된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쌍특검’(통일교·공천헌금) 수용을 촉구하는 단식투쟁을 시작한 지 닷새째 되는 19일 밤 국회 로텐더 홀 농성장 앞에 배달된 응원 꽃바구니 주변을 걷고 있다. 연합뉴스
고통은 언제나 도덕적 면죄부를 동반한다. 저 정도까지 하는데 진정성이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민주주의에서 진정성은 고통의 크기로 증명되지 않는다. 진정성은 논리와 원칙, 그리고 책임으로 증명된다. 역사적으로 가장 위험한 정치 세력일수록 가장 처절한 몸짓을 앞세워 왔다. 고통은 쉽게 동정을 불러일으키지만, 동정은 판단을 흐리게 만든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고통이 아니라 절차를 신뢰한다.
장동혁 대표의 요구는 바로 이 민주주의의 신뢰 구조를 흔든다. 그는 제도의 판단을 존중하기보다 그 판단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극단적 압박을 통해 방향을 바꾸려 한다. 이것은 정치가 책임을 지는 방식이 아니라 책임을 회피하는 방식이다. 정치는 결과 앞에서 설명하고 설득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설명 대신 단식을 선택했다. 이것은 정치적 언어의 포기이며 민주적인 토론의 중단이다.
종교 전통에서 단식은 회개와 전환의 표지였다. 잘못된 길을 인정하고, 이전과 다른 삶으로 들어가겠다는 몸의 선언이었다. 그러나 장동혁 대표의 단식에는 회개의 언어가 없다. 방향 전환의 징후도 없다. 오히려 기존의 정치적 입장을 더욱 강경하게 밀어붙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에 가깝다. 이것은 잘못을 멈추는 단식이 아니라 잘못을 정당화하려는 단식이다.
또 그의 요구는 정치적 책임의 방향을 거꾸로 돌린다. 정치인의 책임은 제도를 지키고, 그 제도가 낳은 결과를 시민에게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동혁 대표는 제도의 결과를 문제 삼으며, 그 제도 자체를 압박한다. 이것은 정치가 제도 위에 서려 할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태도다. 법이 나에게 유리할 때는 존중하고 불리할 때는 흔들려는 태도는 민주주의에 반한다.
정치는 힘의 논리가 아니, 규칙의 논리 위에서 작동해야 한다. 규칙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규칙을 바꾸는 정당한 절차를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장동혁 대표의 요구에는 그런 대안적 상상력이 없다. 그는 법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 제도를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단식이라는 극단적 행위로 압박을 가한다. 이것은 정치의 기술이 아니라 정치의 실패다.
종교인의 단식은 자신을 비우는 수행이다. 고통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깨닫고 타인의 고통 앞에 더 민감해지는 과정이다. 그러나 정치적 단식, 특히 부당한 요구를 관철하려는 단식은 자신을 비우지 않는다. 오히려 제도와 원칙 위에 자신을 올려놓는다. 신 앞에 서는 대신, 법과 헌법 위에 서려 한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21일 페이스북에 올려놓은 글.
단식은 질문을 동반해야 한다. 이 단식은 공공의 이익을 향하는가, 아니면 정치적 방어를 정당화하는가. 장동혁 대표의 요구는 이 질문 앞에서 설득력을 잃는다. 그의 단식은 민주주의를 향한 고통의 기도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압박하는 정치적 몸짓이기 때문이다.
정치인에게 필요한 것은 단식이 아니라 책임이다. 굶기 전에 먼저 요구의 정당성을 증명해야 한다. 단식은 마지막 수단이어야 하며, 그 요구가 헌법 질서와 민주주의 원리를 훼손할 때 단식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고통은 언제나 존중받아야 하지만, 고통을 앞세운 부당한 요구는 거부되어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가 스스로를 지키는 방식이다.
지금 한국 정치에 필요한 것은 고통을 앞세운 정치가 아니라 원칙 위에 선 정치다. 단식으로 제도를 흔드는 정치가 아니라 제도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는 정치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분명하다. 정치가 사법 위에 서려는 요구, 민주주의 기본 질서를 흔드는 요구는 어떤 형식으로든 정당화될 수 없다는 단호한 합의다. 그것이 우리가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소한의 윤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