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루터 킹 뒤를 이은 제시 잭슨 목사 84세로 영면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틴 루터 킹(오른쪽 두 번째)이 암살되기 하루 전인 1968년 4월 3일(현지시간) 멤피스 호텔 발코니에 호사 윌리엄스(왼쪽), 제시 잭슨(왼쪽 두 번째), 랄프 앨버너시와 함께 서 있다. AP 자료사진
미국 흑인 민권 운동에 앞장섰던 제시 잭슨 목사가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족은 17일(현지시간) 성명을 통해 고인이 이날 아침 가족들에 둘러싸인 채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고 전하며 우리 아버지는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억압 받고 목소리 없는 이들, 그리고 전 세계에서 소외된 이들을 섬기는 리더였다 고 안타까워했다.
제시 잭슨 목사. 뉴욕타임스 2월 17일
잭슨 목사는 1960년대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민권을 위해 싸웠고, 1984년과 1988년 두 차례나 민주당 대선 후보 지명 경쟁에 뛰어들었다. 앤서니 저커 BBC 기자는 고인이 킹 목사의 애제자로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삶을 정치적으로 조직하고 개선하는 데 힘쓰는 일로 경력을 쌓았으며, 두 차례의 백악관 선거운동 기간 동안 전국적인 지도자가 됐다고 적었다.
잭슨 목사가 1984년 첫 대선 유세 당시 뉴올리언스의 루이지애나 슈퍼돔에서 흑인 교회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연설하고 있다. 그는 그해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나의 지지층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 저주받은 사람들, 상속권을 박탈당한 사람들,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들, 멸시받는 사람들 이라고 말했다. 뉴욕타임스 2월 17일
그는 2017년 파킨슨씨 병 진단을 받았으며 지난해 11월 퇴행성 진단을 받은 뒤 입원 치료 중이었다.
잭슨 목사는 멘토였던 킹 목사가 주도한 1960년대의 민권 운동 시절부터 흑인과 소외 계층의 권익 향상에 앞장서 왔다. 시카고를 기반으로 1971년 흑인 민권 단체 ‘오퍼레이션 브래드바스켓(푸시)’을, 1984년에는 여성 권익과 성소수자 권익까지 아우르는 단체 ‘전미 레인보우 연합’을 각각 설립했다. 두 단체는 1996년 ‘레인보우푸시연합(RPC)’으로 합병됐다.
잭슨 목사는 2023년 RPC 회장 직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50년 이상 단체를 이끌며 인권 운동에 투신했다. 공식 직함은 없었지만 시리아, 쿠바, 이라크, 세르비아 등 해외에 억류된 미국인과 다른 나라 사람의 석방을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가장 최근 민권 관련 운동에 참여한 것으로는 2020년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시위를 촉발한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때 경찰의 가혹 행위를 강력 규탄하기도 했다.재작년에는 위스콘신주 라신을 방문해 젊은이들의 대선 투표 참여를 독려했다. 지난해에는 타깃 (Target)이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DEI) 프로그램을 축소하자 해당 기업 불매운동에 동참했다.
2016년의 제시 잭슨 목사. 연합뉴스
본명은 제시 루이스 번스. 1941년 10월 8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그린빌에서 태어났다. 모친 헬렌 번스는 열여섯 살이었고, 부친 노아 루이스 로빈슨은 프로 권투 선수 출신 유부남이었다. 제시가 두 살 때 헬렌은 찰스 잭슨과 결혼했다. 제시는 열세 살 때까지 조모 매틸다와 함께 살았다. 그러고나서 제시는 찰스 잭슨의 집에 1957년 의붓아들로 입양됐다.
그린빌의 스털링 고등학교에서 잭슨은 마이너리그 야구선수 계약과 빅텐 미식축구 장학금을 받기로 하고 졸업했다. 그는 쿼터백으로 활약하고, 노스캐롤라이나 농업·기술 대학으로 전학가기 전에 일리노이 대학 어배너-섐페인에서 1년을 보냈다. 1964년 사회학 학위를 받고 졸업할 무렵, 동급생 재클린 브라운과 결혼해 다섯 자녀 가운데 첫째를 맞았다.
잭슨은 1966년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열린 남부 기독교 지도자 회의(SCLC)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했다. 2년 뒤 킹 목사가 암살당하자 그의 뜻을 이어받고자 했다. 뉴욕타임스 2월 17일
대학을 마친 뒤 시카고의 신학교에서 신학 전공들을 시작했고 킹 목사를 지원하는 학생들을 조직했다. 1965년 3월 잭슨은 킹 목사와 함께 역사적인 셀마 몽고메리 행진을 위해 앨라배마주로 여행을 떠났다. 1년 후 그는 남부기독교지도회의를 전담하겠다며 신학교를 그만 뒀다.
1968년 킹 목사가 암살돼 스러졌을 때 그 곁을 지켰다. 당시 함께 한 랄프 앨버너시와 함께 남부기독교지도회의를 누가 이끌지를 놓고 경쟁했다.
인질 석방에 그가 기여한 것을 높이 산 빌 클린턴 대통령은 1997년 잭슨을 아프리카 특별 교섭인으로 임명했다. 일각에서는 잭슨이 세 번째 대선 출마를 포기한 데 대한 보상으로 2000년 대통령 자유 훈장이 수여됐다고 보기도 했다. 2001년 잭슨은 직원의 불륜 행각과 공금 유용 등의 혐의를 인정한 뒤 잠시 남부기독교지도회의를 물러나기도 했다.
오바마의 정책들을 비판하긴 했어도 잭슨은 오바마의 2008년 대선 승리를 이끈 주인공 중 한 명이었다. 오바마 선거의 밤에 잭슨은 무대에 올라 킹 목사와 민권운동을 위한 분투에서 숨진 이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혀 화제가 됐다.
잭슨 목사는 2008년 11월 4일 밤, 시카고 그랜트 파크에서 군중들과 함께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버락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이 유력시되는 소식을 축하하며 눈물을 흘렸다. 잭슨 목사는 두 번이나 대통령직에 도전했다. 뉴욕타임스 2월 17일
일간 뉴욕 타임스(NYT)는 언어의 힘과 비범한 에너지, 그리고 야망을 통해 인종적으로 모호했던 시대, 짐 크로우 법이 여전히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고 흑인의 정치적 권력이 현실보다는 열망에 가까웠던 시대에 도덕적,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고인을 탐탁치 않게 봤던 이들은 그가 킹 목사처럼 되고 싶어 안달했다고 봤다. 자신의 삶을 신화로 만들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 사회의 주변부에 있던 유색인종과 소외 계층을 포용하는 연합체가 이제 전면에 나서서 사회를 변화시킬 것이라는 비전을 설파했다. 미국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에 맞서기 위해 적극적인 정부의 지원을 받는 다인종 연합이라는 그의 비전은 민주당 진보 진영의 핵심 사상으로 남아 있으며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같은 단체에 영감을 줬다.
자만심, 카리스마, 언론의 관심을 끌어모으는 능력은 남부기독교지도회의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그의 야망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켰고 킹 목사와의 갈등으로까지 이어졌다.
스탠퍼드대 역사학과 클레이본 카슨 교수는 잭슨이 두 시대 사이에 끼어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즉, 킹 목사처럼 명실상부 영웅적인 인물이 되기에는 너무 늦었고, 버락 오바마처럼 정치 최고위직에서 성공하기에는 너무 일렀다는 것이다. 정치 지도자보다는 도덕적 지도자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잭슨 목사는 1986년 전두환 정권에 민주화를 촉구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고, 32년 만인 2018년 두 번째로 찾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트루스소셜에 나는 대통령이 되기 훨씬 전부터 그를 잘 알았다 며 그는 강한 개성과 투지, 실용적 지식(street smarts)을 지닌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사교적이었으며, 진정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고 적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특히 제시는 그 이전에도 보기 드문 자연 같은 존재(force of nature)였다 고 칭송했다. 대자연처럼 거스르기 힘든 영향력을 갖춘 인물이었다는 뜻인 것 같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과 관련해 그(잭슨 목사)는 오바마의 당선에 큰 역할을 했으나, 인정받거나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다. 오바마는 제시가 견딜 수 없었던 인물 이라고 했다.
또한 자신이 잭슨 목사에게 여러 도움을 준 것도 소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극좌의 악당과 미치광이들, 모든 민주당원들이 나를 거짓으로 일관되게 인종차별주의자라고 했지만, 나는 항상 제시를 돕는 게 기뻤다 며 월스트리트 40번지의 트럼프 빌딩에 수년간 그와 그의 레인보우 연합을 위한 사무 공간을 제공했다 고 했다.
민주당 출신 전직 대통령들도 당연히 추모 행렬에 동참했다.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은 엑스(X)에 올린 성명을 통해 수십년에 걸친 우리의 우정과 협력 속에서 나는 잭슨 목사를 역사가 그를 기억하는 대로 알고 있다 며 신의 사람이자 국민의 사람, 단호하고 끈질긴, 우리나라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분이었다 고 밝혔다.
지난 2024년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맞붙은 카멀라 해리스 전 부통령은 엑스에 젊은 법대생 시절 자신의 차에 제시 잭슨을 대통령으로 (Jesse Jackson for President)라고 쓰인 스티커를 붙이고 다녔다는 일화를 전했다. 해리스 전 부통령은 내 경력을 통틀어 그와 함께 협력하며 배울 수 있어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올해 1월 함께한 시간에 매우 감사하다 며 잭슨 목사는 저와 다른 많은 이들에게 이타적 지도자이자 멘토, 친구였다 고 회상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아내) 미셸과 나는 진정한 거인, 잭슨 목사의 별세 소식을 듣고 깊은 슬픔에 잠겼다 며 그는 두 차례에 걸쳐 역사적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며 내가 이 나라 최고위 직책에 도전하는 캠페인의 토대를 깔았다 고 애도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60년 이상 잭슨 목사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 운동을 이끌었다 면서 우리는 그의 어깨 위에 서 있다 고 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공동으로 낸 성명에서 두 사람이 잭슨 목사와 리틀 록 센트럴 고등학교가 백인 전용에서 흑인 학생을 통합하는 학교로 바뀐 지 20년이 되던 해인 1977년에 처음 만나 거의 50년 간 친구로 지냈다고 돌아봤다.
클린턴 부부는 또 잭슨 목사는 인간 존엄성을 옹호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 기회를 창출하는 데 기여했다 며 더 나은 미국과 더 밝은 미래를 위한 일을 절대 멈추지 않았다. 흑인, 라티노, 아시안, 그리고 저소득 백인 미국인의 문제를 위해 싸웠다 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