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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죽어서야 빛을 본 빚쟁이 에드거 앨런 포

죽어서야 빛을 본 빚쟁이 에드거 앨런 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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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식은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하겠지만 슬퍼할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죽은 사람에게 이런 독설을 퍼붓다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1849년 10월 7일,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 1809~1849)가 숨을 거둔 지 이틀 만에 신문에 실린 부고 기사의 첫 문장이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이 글을 쓴 사람이 루퍼스 윌모트 그리스월드(Rufus Wilmot Griswold, 1815 ~ 1857)라는 사실이다. 그는 포의 유고를 관리하게 된 평론가였다. 두 사람이 1841년 처음 만났을 때는 우호적이었다. 그리스월드가 1842년 펴낸 시 선집 미국의 시인들과 시 에 포의 작품 세 편이 실렸고, 포도 호의적인 서평을 써주었다. 하지만 관계는 곧 틀어졌다. 1842년 포가 그레이엄 매거진 편집장을 그만두자 그리스월드가 후임으로 들어왔는데, 문제는 포보다 높은 급여를 받았다는 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포는 공개강연에서 그리스월드의 선집을 좋은 시가 아니라 친구 시인들만 실었다 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게다가 두 사람은 여성 시인 프랜시스 사전트 오스굿(Frances Sargent Osgood, 1811~1850)을 두고 경쟁했다. 그런 원수가 유언 집행인이 된 셈이니 이보다 더 끔찍한 비극이 어디 있겠는가. 포는 미국 보스턴에서 배우 부부의 둘째아이로 태어났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가 한 살 때인 1810년 가정을 버리고 떠났고, 어머니는 1811년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두 살짜리 고아가 된 포를 거둔 이는 존 앨런이라는 부유한 상인이었다. 하지만 양아버지는 포를 정식 양자로 입적하지도 않았고, 늘 최소한의 생활비만 지원했다. 요즘 말로 하면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간섭은 다하면서 정작 실질적 지원은 인색했던 셈이다.   1849년의 포(위키피디아). 술과 빚과 문학, 절망의 삼각관계 포의 인생은 마치 그가 쓴 공포소설처럼 어두웠다. 1826년 버지니아 대학에 입학했으나 도박 빚으로 1년 만에 중퇴했고,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도 양아버지와의 불화로 퇴학당했다. 1833년 단편소설 병 속의 수기 가 공모전에 당선되면서 작가의 길이 열렸고, 1836년에는 13살 사촌 여동생 버지니아 클렘과 결혼했다.(결혼 문서에는 버지니아의 나이를 21세로 허위 신고했다). 1839년부터 1845년 사이 모르그 가의 살인 , 검은 고양이 , 까마귀  등 걸작들을 쏟아냈다. 하지만 성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1847년 아내가 24세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자 포는 술과 아편에 빠졌다. 1849년 9월에는 청년 시절 첫사랑이었던 사라 엘미라 로이스터 셸튼(Sarah Elmira Royster Shelton, 1810~1888)과 약혼했다. 10월 17일로 예정된 결혼식을 앞두고 리치먼드를 떠나 볼티모어로 가던 중 실종됐는데, 알고 보니 그 달 3일 길거리에서 정신을 잃은 채 발견돼 사흘 뒤 숨진 것이었다. 사인은 지금껏 밝혀지지 않았다.   보스턴 카버 스트리트에 있는 포의 출생지를 표시하는 명판.(위키피디아) 죽어서야 인정받은 천재, 산 자의 복수 포가 세상을 떠나자 그리스월드는 기다렸다는 듯 악의적인 부고를 썼다. 포가 과거 자신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에 앙심을 품었던 것이다. 그리스월드는 포의 전집을 편집하면서 포를 미치광이 알코올 중독자 로 묘사했다. 이 왜곡된 이미지는 수십 년간 포의 명예를 훼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포의 천재성을 먼저 알아본 건 프랑스였다. 상징주의 시인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1821~1867)는 내가 쓰고 싶었던 것들이 모두 포의 글 속에 있었다 며 17년간 포의 작품을 번역했다. 보들레르 자신도 술과 마약, 빚에 시달리다 46세에 생을 마감한 불운한 천재였으니 어쩌면 동병상련이었을지 모른다.   1827년 5월, 포는 미군에 입대하여 처음에는 보스턴의 포트 인디펜던스에 배치되었다.(위키피디아) 한국사회가 배워야 할 것, 창작자의 생존권과 올바른 비평 포의 삶을 돌아보면 지금 한국의 현실이 겹쳐 보인다. 포는 미국 최초로 저술만으로 생계를 꾸리려 한 전업 작가였다. 하지만 그 시도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원고료는 터무니없이 적었고, 편집자로 일해도 제대로 된 급여를 받지 못했다. 출판사들은 그의 작품을 실으면서도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다. 오늘날 한국의 창작자들은 어떤가? 소설가, 시인, 화가, 음악가들이 먹고살 수 없다 며 다른 일을 병행하는 현실. 웹소설 작가들이 플랫폼에 착취당하는 구조. 예술인 복지법이 있다지만, 정작 필요한 이들에게는 그림의 떡인 경우가 많다. 포가 살던 19세기나 지금이나, 창작자의 생존권 보장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다. 포는 저작권보호법안을 위해 의회에 탄원하기도 했다. 자신의 작품이 무단으로 복제되고 출판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묻혔다. 지금 한국에서도 불법 복제, 표절, 저작권 침해는 여전하다. 창작자를 보호하는 제도는 있지만, 실효성은 의문이다. 그리스월드의 악의적 부고는 교훈을 준다. 비평은 작품을 향해야지, 사람을 향해서는 안 된다. 한국 문화계에도 건강한 비평문화가 필요하지만, 개인적 원한으로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는 문화 전체를 병들게 한다.   1835년, 26세였던 포는 당시 13세였던 사촌 버지니아 클렘과 결혼 허가를 받았고, 그녀가 사망할 때까지 11년 동안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위키피디아) 문학사적 업적과 한국에 주는 교훈 포는 모르그 가의 살인 (1841)으로 추리소설을 창시했다. 이 소설의 탐정 뒤팽은 아서 코난 도일(1859~1930)의 셜록 홈스, 애거사 크리스티(1890~1976)의 푸아로에게 영감을 주었다. 검은 고양이 , 어셔 가의 몰락  같은 공포소설들은 인간심리의 어두운 면을 파헤쳐 현대 심리 스릴러의 원형이 되었다. 포의 알코올 중독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였다. 극심한 빈곤,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 인정받지 못하는 창작의 고통이 그를 술로 몰아갔다. 오늘날 한국 예술인들의 우울증과 경제적 어려움도 마찬가지다. 예술은 배고프다 는 말을 당연시하고 열정 페이 를 강요하는 사회, 200년 전 미국과 다를 바 없다. 포는 40세에 요절했고, 장례식에는 몇 명만 참석했다. 묘비는 사후 26년이 지나서야 세워졌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영원히 살아 인류를 울린다. 우리는 묻는다. 제2의 에드거 앨런 포가 지금 어딘가에서 굶주리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예술가들을 죽어서야 추모할 것인가, 살아서 존중할 것인가? 진정한 문화강국은 창작자들이 굶주리지 않는 사회에서 시작된다. 한국의 무명작가들은 서류가 복잡하다 , 자격 요건이 까다롭다 며 예술인 복지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포가 200년 전 외쳤던 창작자의 생존권 보장 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1949년 10월 7일, 미국 우체국은 에드거 앨런 포의 사망 100주년을 기념하는 우표를 발행했다.(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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