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大)보행시대 열자… 전국을 보행 네트워크로 연결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1961년 제인 제이콥스가 불을 당겼다. 그녀는 《아메리카 대도시의 삶과 죽음》에서 자동차 중심 도시계획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보행자 중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계획가의 조감도가 아닌, 거리를 직접 걷는 시민의 눈높이. ‘거리의 눈’이 도시의 생명력이라는 통찰은 20세기 도시계획의 상식을 뒤집었다.
필자도 그 통찰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서울광장을 시민에게 돌려준 과정은 그 결실 중 하나다. 자동차가 점령했던 공간을 사람의 발걸음으로 되찾는 일. 그것은 단순한 공간 재배치가 아니라, 도시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근본 질문이었다. 10년에 걸친 시민 운동의 소산이었고, 제이콥스가 로버트 모지스의 고속도로 계획에 맞섰던 것처럼 정치적 행위이기도 했다.
컴팩트시티와 보행 중시는 에너지 절약이라는 물리 법칙과도 맞닿아 있다. 제이콥스가 강조한 ‘짧은 블록’과 ‘혼합 용도’는 활기찬 거리를 넘어 불필요한 이동을 줄여 도시의 에너지 효율을 높인다. 걷고 싶은 도시는 곧 지속가능한 도시다.
보행로 정비가 한국에 특히 중요한 이유
한국은 더욱 그렇다. 산지와 구릉지가 많아 주거 가능지가 제한된 초고밀 사회. 그 때문에 대중교통 사업성이 뛰어나고 편의가 고도화되어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보행 친화 도시를 구현하기 가장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다.
대중교통 노선과 연결된 보행로 정비는 승용차 감소의 가장 효과적인 첩경이다. 그러나 아직도 도로는 자동차를 위해 설계되고 보행로는 ‘여백’ 취급을 받고 있다.
더욱이 어린이 통학로뿐 아니라 노약자가 안심하고 걸을 수 있는 길은 인권의 문제다. 실제로 한국은 교통사고 사망자 중 보행 중 사망 비율이 36.5%(2024년 기준)로 OECD 평균(약 18%)의 약 2배에 달한다. 특히 고령자 보행 사망률은 OECD 회원국 중 압도적 1위 수준이다. 제이콥스가 말한 ‘거리의 눈’이 살아나려면, 사람들이 안심하고 걸을 수 있는 길이 먼저 확보되어야 한다. 걷기 좋은 길은 안전과 사회적 자본이 함께 쌓이는 공간이자, 인권을 담보하는 일이다.
우리의 가능성은 도시를 넘어 국토 전체로 확장된다. 과거 삼남대로 등 선조들이 걸었던 길을 복원하면, 보행 연계가 뛰어난 국토를 만들 수 있다. 제주 올레길, 일본의 역사길처럼 의미를 부여한 길을 곳곳에 조성할 수 있다.
대동여지도의 옛길 정보를 현재 지도에 중첩해 중요도를 분석한 결과, 서울-부산, 서울-목포 등 핵심 역사길을 우선 복원하면 전국이 하나의 거대한 보행 네트워크로 연결된다. (아래 지도 참조)
대동여지도의 옛길 정보를 현재의 지도상에 띄워서 경로의 중요도를 가늠한 뒤, 필자가 제안하는 옛길 혹은 숲길 복원 코스. 현실에 반영하려면 실측을 통한 조정작업이 필요하다. @ 이원영
선조들의 길에는 단순 이동이 아닌, 사람들이 만나고 교환하고 소식을 나누던 흔적이 살아 있다. 주막, 대장간, 정자나무가 어우러진 그 마을길은 이미 ‘혼합 용도’와 ‘짧은 블록’의 원리를 품고 있었다. 이를 되살리는 것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미래 지향적 국토 설계다.
제이콥스의 보행자 중심 패러다임은 이제 도시를 넘어 국토 전체, 나아가 지구촌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멀고 먼 길을 걸을 때, 자동차로는 스치듯 지나가는 풍경이, 두 발로 디디면 뇌에 깊이 새겨진다. 이것이 시속 4km 관광열차의 위력이다.
AI 시대에 보행은 더 강력한 삶의 문법이 된다. 가상세계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실재 세계와의 교감은 더 소중해진다. AI 길 안내 앱, 실시간 위험 구간 알림, 걸음수·건강 데이터 연동은 누구나 안전하고 즐겁게 걸을 수 있게 해준다.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과 청년에게는 국토를 직접 걸으며 호연지기를 기르는 최고의 기회가 된다.
이제부터 보행로가 연결되지 않아 자동차 도로를 어쩔 수 없이 이용해야 했던 구간부터 정비하자. 도로 한쪽에 안전한 보행로와 자전거 겸용 공간을 두는 작업부터 체계적으로 추진하면 된다. 국가 차원에서는 ‘국가 보행 네트워크 기본계획’을 수립해 5개년 내 주요 역사길 복원과 연계 사업을 선도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스위스의 전형적인 시골길. 도로 한 쪽에는 사람이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해준다. 좁지만 자전거도 서행하면서 다니게 할 수 있다. @이원영
보행이 활성화되면 기후위기에 가장 실천적인 기여를 한다. 자동차 이용 감소는 교통(수송) 부문 온실가스 배출(도로수송이 96.5% 차지)을 직접 줄인다. 동시에 보행로 정비와 유지관리는 지역 고용을 창출하고 공동체를 되살린다. 안전해지고, 건강해지고, 실행하기 쉽다. 큰 예산이 들지 않는다. 생각과 의지의 문제다.
예전에 ‘대항해시대’가 있었다면, 지금 기후위기 시대에는 ‘대(大)보행시대’가 어울린다. 대항해시대를 연 것이 나침반과 항해 기술이었다면, 오늘날에는 손안의 GPS 스마트폰이 있다. 지구촌 전체가 이 분위기로 나아간다면 ‘대보행시대’는 충분히 열릴 수 있다.
걷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길은 더 안전해지고, 작은 가게와 쉼터가 생기며, 사람들의 이야기가 쌓이고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된다. 걷고 싶은 국토는 결국 살고 싶은 국토다. 대(大)보행시대를 열자. 그것이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며, AI 시대에 우리 삶을 더 풍요롭고 건강하게 만드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