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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의 시 그날 , 병들었는데 아프지 않은 마비 통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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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성복 시인   그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前方)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 점(占) 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최근 일본 아쿠다가와상 수상작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를 읽었다. 거기에 ‘시도 동기(示導動機, leitmotive)’라는 말이 나온다. 예술이나 문학 작품 등에서 주제 형성을 총괄하며 통일적으로 주도해나가는 중심 모티프를 가리키는 말이다. 1970년대의 시 그날 은 그것이 실린 이성복의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1980)를 넘어, 한국 현대사 전체를 회집하는 ‘시도 동기’라 해도 괜찮은 시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구절 하나로 ‘이성복은 모든 것을 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성복(74) 시인은 2015년 시론집 출간 간담회에서 시요? 불편하고 잠 못들게 하는 것 이라고 밝혔다.  시에는 한 소시민 가정의 일상적 풍경이 전개되고 있다. 아버지와 여동생과 나의 일상은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하다. 그러나 그 평온함은 실상 평온하지 않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 올”라 있었다. 겉으로 멀쩡해보이는 일상의 이면에는 어떤 병리성이 배접(褙接, 종이나 헝겊 또는 얇은 널조각 따위를 여러 개 겹쳐서 붙임)되어 있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한 그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그들도 자신들이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던 애들”이었을 때는 그럴 줄 몰랐을 것이다. 과거에 자신이 오늘날 그렇게 될 줄 몰랐다는 얘기만은 아니다. 오늘을 살면서 자신의 오늘을 모른다는 데 방점이 있다. 평범한 일상이 감각의 마비와 등가적일 정도다. 그럼에도 없는 것이 없었고” 분단체제와 서슬퍼런 군사 정권 하에서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평온한 일상에는 폭력이 내장되어 있다. 일상의 이면에 배접된 병리성만큼이나, 내장된 폭력은 자기를 갉아먹는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섬뜩한 ‘생각의 폭력’이 그것이다. 증상은 엉뚱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그것은 억압을 강화하는 또다른 빌미가 된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겉보기에 세상은 태연했지만,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병들었으면서도 짐짓 ‘태연한 세상’에 함께 올라앉아 있지만 ‘그날의 신음’을 듣는 시인은 적어도 ‘태연’할 수 없어서 아프다. ‘태연하게도’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거나,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자기 파괴적 공격성과 자기 착취 속에, 감각이 마비된 사람들은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고,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것이다. 감각의 마비에는 음험한 폭력이 내장되어 있다.   지난 3월 세상을 등진 이근안 씨는 2012년 12월 14일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한 음식점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그래도 난 애국을 한 것이었다 고 종지묵을 댔다. 2012.12.14 연합뉴스 자료사진   군사정권 시절 고문 기술자로 악명 높았던 이근안이 2026년 3월 사망했다. 이근안을 직접 거명하지는 않지만, 그가 자행했던 유의 무자비한 고문에 대해 나오미 클라인은 『쇼크 독트린(The shock doctrine)』에서, 수전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을 패러디하여, 은유로서의 고문”이라고 명명한다. 이성복이 명명하는 병” 역시 「그날」을 떠받치고 있는 ‘은유로서의 질병’이다. 그렇다면 그 ‘병’을 야기한 ‘은유로서의 고문’에 대해서도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은유로 가득 찬 「그날」이 겨냥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프지 않”은 ‘그날’의 병은 한국 사회 특유의 고문과 폭력이 낳은 병이며, 이를 통한 충격 효과를 그대로 모방한 게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기형적 사회정치 체제를 유지시켜온 쇼크 독트린이다. 쇼크 독트린은 글자 그대로 쇼크 요법에 기반한 체제다. 무엇보다 한국 현대사의 무자비한 고문의 역사가 이를 입증한다. 퇴행하고 두려움이 커진 상태에서 더 이상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거나 보호할 힘이 없”게 된 나머지 심문관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털어놓는다”는 것이다. 전쟁과 분단체제, 그리고 군사 독재를 거치며 상시적인 쇼크 상태를 살아온 우리는 1997년 외환 위기라는 전대미문의 쇼크 상태에서 당시 신자유주의 ‘심문관’ 캉드쉬 IMF 총재가 가하는 경제적 ‘고문’ 속에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줘야 했던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횔덜린이 위험이 있는 곳에/ 그러나 구원도 함께 자라네”라고 노래했다면, 쇼크 독트린을 주도해온 신자유주의의 전사 밀턴 프리드먼은 변화를 강제하고 싶으면 위기를 유발하라!”고 공공연히 외치고 다니기도 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라는 ‘시도 동기’는 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TV 프로그램 에 사자가 들소나 영양을 잡아먹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잡아먹히는 쪽은 고통을 못 느낀다고 한다. 잡아먹히는 순간 감각의 마비가 찾아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국 전쟁 이후 지속되는 분단 상황과 군사 독재가 낳은 ‘감각의 마비’가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이 한 줄에 응축되어 있다. 정치적 폭력, 독재, 재벌, 사회 전 부면에 만연한 비리 등이 덮이거나 그냥 패싱되는 것이다. 모종의 ‘코팅 처리된’ 마비 속에서 객관식으로 서둘러 답을 내고 학교와 점수와 등급으로 아파트로 사람들은 무자각적으로 줄줄이 흘러들어가고 있다. 목하 한국 사회는 지금 12·3 내란을 성숙하고 용기 있는 시민의 힘으로 막아냈지만, 역사의 저변에 강고하게 또아리를 틀고 있는 한국 사회의 수구 엘리트 기득권층의 뒤틀린 욕망과 굳게 깍지 끼고 있는 내란세력의 뿌리는 특히 깊고 넓다. 불법 계엄으로 한국 사회 전체를 충격, 고문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 했던 윤석열의 유일한 애독서가 『선택할 자유』이며, 그 책의 저자가 쇼크 독트린을 선도하는 신자유주의의 전사 밀턴 프리드먼이라는 사실은 두고두고 곱씹어볼 만한 대목이다. 둘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해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같지만, 쇼크가 의미하는 놀라움이나 경이에 대해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입장이 서로 갈린다. 데카르트는 『정념론』(김선영 옮김, 문예출판사)에서 이전에 알지 못했거나 또한 알고 있었던 것과는 다르기 때문에” 경이로워하게” 된다고 ‘경탄한다’. 스피노자는 『에티카』(강영계 옮김, 서광사)에서 악으로서의 경탄”은 인간을 포로”로 만들어 사유할 수 없게 만든다고 비판한다. 플라톤의 『메논』에 등장하는 ‘전기가오리’는 일상을 충격하는 방식으로 철학적 사유를 유발하지만, 쇼크 독트린 체제의 ‘전기 고문실’은 생각을 마비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사악한 통치 기구다. 한국 사회를 관류해온 ‘쇼크’는 전자보다 대체로 후자에 가깝지만,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이성복이 염두에 두는 쇼크는 어느 쪽일까? 둘 다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는 것은,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가 우선 증명해준다.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도 함께 자라듯’, 제목에서 감지되는 ‘잠든 돌’과 ‘깨어남’의 내밀한 변증법이 시집에 웅숭깊은 매력을 더해주고 있다.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켜 의식을 잠들게 하는 것이나, 그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 모두 놀라움이나 경이, 혹은 ‘쇼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상 데카르트나 스피노자에게서도 경이나 놀라움은 상호 부차화되고 교차되는 방식으로 서로의 장단점을 함께 나눠 갖는 측면이 있다. 어떤 강점의 이면은 그 자체로 약점일 수 있고, 그 역도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상찬하는 ‘경이’의 이면에서 우리는 ‘사유의 마비’를 읽어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사유를 마비시키는 스피노자의 ‘악으로서의 경탄’이나 ‘경악’의 이면에서, 가령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카프카의 도끼”나 벤야민의 파괴적 성격”, 혹은 바르트의 푼크툼이나 『프루스트와 기호들』로 대변되는 들뢰즈의 ‘기호’ 등 마비된 감각과 사유를 촉발하는 ‘충격의 계보학’을 제법 길게 작성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2024년 12월 3일 그날 밤 계엄군으로 동원된 군인들과 맞서 싸운 시민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일순간 우리를 얼어붙게 만들었던 2024년 12월 3일 밤 ‘그날’은 어땠을까? 대한민국을 충격에 몰아넣은 ‘그날’ 우리는 오히려 깨어났다. ‘그날’은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의 시인이 우리 사회를 가두고 있는 「그날」의 화두를 역사적 현장에서 진정으로 풀어낸 날이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라는 물음에, ‘그날’, 곧 ‘2024년 12월 3일 밤’이라고 우리는 분명하게 답변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에게 ‘그날’은 ‘전기가오리’였지만, 희롱에 가까운 언어유희로 ‘계몽령’ 운운하며 무자비한 폭력과 갖가지 사악한 고문 도구들로 대한민국 전체를 마비시키려 했던 내란 세력의 ‘그날’은 ‘전기 고문실’에 가깝다. 하지만 그간 기이한 정치적 자장(磁場)에 붙들려 있던 대한민국이 불법 계엄으로 인해 ‘계몽’되고 있음 또한 사실이다. 일제 식민지로부터의 해방 이후 전쟁과 분단체제, 그리고 군사 독재와 검찰 독재를 거치며 우리의 삶을 또다른 방식으로 옥죄고 마비시켜온 정치적 주술이나 가스라이팅으로부터 서서히 깨어나고 있음을 우리는 지금 경험하고 있다. 「그날」은 전혀 다른 ‘그날’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억압된 것의 귀환으로서의 ‘그날’은 지금 정신분석적 전이의 방식으로 「그날」을 치유하고 있다. 2024년 ‘그날’은 「그날」을 되치기한 날로 기록될 것이다. 해방 이후 처음 맛보는 정치적 효능감인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기존의 항쟁에서 맛보던 것과는 다른 느낌이다. 좀더 시간을 두고 판단해야 할 일이긴 하지만, 예상치 못한 지점을 짚어내는 방식으로 새 정권의 정치적 발화가 달라지고 있으며, 달라지고 있는 글로벌 지형과 재편되고 있는 국제 질서 속에서 대한민국은 지금 전혀 다른 정치적 신체가 되어가고 있다. 모종의 한계 상황까지 갔다와본 사람으로서 어떤 상황에서도 ‘죽으라는 법’은 없음을 몸소 체득한 지도자, 우리를 위축시켰던 두려움과 ‘경악’에서 벗어난 정권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예상치 못한 국민적 저항 앞에서 ‘경악’한, 윤석열을 비롯한 내란 세력과 그 동조 세력들이야말로 ‘아픈 자’들이다. 아니, 병들었으면서도 아프지 않은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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