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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돌무더기가 된 서튼 스카스데일 홀, 허영이 남긴 뼈대

돌무더기가 된 서튼 스카스데일 홀, 허영이 남긴 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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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더비셔(Derbyshire)주의 부드러운 구릉 위, 푸른 하늘을 지붕 삼아 당당히 서 있는 거대한 돌 껍데기 하나가 있다. 바로 서튼 스카스데일 홀(Sutton Scarsdale Hall)이다. 멀리서 보면 중세의 성채 같기도 하고, 가까이서 보면 공사가 중단된 흉물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폐허는 사실 영국근대사가 응축된 욕망의 전시장 이다. 지붕도 창문도 없이 텅 빈 창틀 사이로 바람이 드나드는 이 돌무더기에는 천 년을 이어온 인간의 허영과 파산, 상속의 비극, 그리고 극적인 구원의 역사가 층층이 쌓여 있다.   서튼 스카스데일 홀.(위키피디아) 천 년의 땅에 새겨진 욕망의 계보 이 땅의 기록은 무려 서기 1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앵글로색슨 귀족 울프릭 스포트(Wulfric Spott)가 자신의 영지를 버튼-온-트렌트 수도원에 유증하면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1086년 윌리엄 정복왕의 토지 조사서인 둠스데이 북(Domesday Book) 에도 이름을 올린 이 유서 깊은 땅은, 중세 중반 레크(Leke) 가문의 손에 들어오며 본격적인 귀족가문의 역사를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1645년, 프랜시스 레크(Francis Leke)는 1대 스카스데일 백작 작위를 받으며 가문의 영광을 정점에 올렸다. 그러나 영광 뒤에는 시련도 따랐다. 영국내전 당시 국왕 편에 섰던 그는 의회군에 의해 거액의 벌금을 물어야 했고, 가문의 재정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간의 허영은 주머니 사정을 고려하지 않는 법이다. 가문의 부활을 꿈꾸던 4대 백작에 이르러, 이 땅에는 영국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도 비극적인 건물이 들어서게 된다.   서튼 스카스데일 홀에서 김성수 시민기자 채츠워스? 내가 더 잘 짓지! 1724년, 4대 스카스데일 백작 니콜라스 리크(Nicholas Leke, 1682~1736)는 일생일대의 결심을 한다. 당시 더비셔 최고의 저택이자 공작가문의 상징이었던 채츠워스 하우스(Chatsworth House) 를 능가하는 집을 짓기로 한 것이다. 그는 당대 최고의 건축가 프랜시스 스미스(Francis Smith)를 고용해 1724년부터 1729년까지 5년에 걸쳐 대공사를 강행했다. 결과물은 압도적이었다. 더비셔 사암으로 쌓아 올린 9칸 기둥의 웅장한 외관은 고전주의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내부장식은 더 화려했다. 이탈리아의 거장 프란체스코 바살리(Francesco Vassalli)와 아르타리(Artari) 형제가 정교한 회반죽 벽장식을 새겼고, 전설적인 조각가 그린링 기번스(Grinling Gibbons)의 목조예술이 집안 곳곳을 채웠다. 대리석과 더비셔 특산 희귀 보석인 블루 존(Blue John) 으로 치장된 벽난로는 방문객의 넋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승리감은 짧았고 대가는 가혹했다. 공사가 끝났을 때 백작의 금고는 바닥을 드러냈다. 1736년 그가 사망했을 때 남긴 빚은 무려 9만 7,116파운드 15실링 3페니. 당시 물가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액이었다. 빚쟁이들의 기록은 잔인하리만큼 세세했다. 더 비극적인 것은 후계였다. 그는 세 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모두 혼외자였기에 작위와 저택을 물려줄 수 없었다. 백작가문은 그의 죽음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화려한 저택은 주인 없는 성 이 되어 경매시장을 떠돌게 된다.   1919년 서튼 스카스데일 홀의 입구 홀 모습.(위키피디아) 1919년 서튼 스카스데일 홀의 계단과 복도.(위키피디아) 상속의 미로, 산업의 자본이 귀족의 허영을 사다 이후 저택의 주인은 수차례 바뀌었다. 1740년 저택을 산 고드프리 배그널 클라크는 의회에서 단 한 번의 발언도 하지 않은 침묵의 의원 으로 이름을 남겼다. 세금만 내다 간 그의 뒤를 이어, 1824년 마침내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이 나타난다. 바로 리처드 아크라이트 주니어(Richard Arkwright Jr., 1755~1843)다. 그의 아버지 리처드 아크라이트는 수력방적기를 발명해 영국 산업혁명을 이끈 거물이었다. 아들 리처드 역시 천재적인 사업수완으로 방직업과 은행업을 장악하며 영국에서 가장 부유한 평민 이라 불렸다. 산업으로 쌓은 막대한 자본이 몰락한 귀족의 허영을 사들인 셈이다. 그의 아들 로버트 아크라이트(Robert Arkwright, 1783~1859)는 배우 집안 출신의 프랜시스 켐블과 결혼하며 예술적 감성과 재력을 결합했다. 아크라이트 가문 아래에서 서튼 스카스데일 홀은 잠시나마 제2의 전성기를 누리는 듯했다.   리처드 아크라이트 주니어, 1800년경.(위키피디아) 프랜시스 켐블, 1810년 경.(위키피디아) 1919년의 대재앙, 뜯겨나간 영광 그러나 20세기 초, 영국 귀족사회를 덮친 농업 대공황과 제1차 세계대전의 참화는 거대한 저택들을 유지 불가능한 짐 으로 전락시켰다. 1919년, 윌리엄 아크라이트는 결국 저택을 경매에 넘겼다. 낙찰가는 고작 1만 2,600파운드. 이를 사들인 곳은 보존가가 아닌 해슬럼 유한회사 라는 건축자재 업체였다. 이때부터 저택은 도살장 위의 고기처럼 발라내 지기 시작했다. 지붕의 납판이 뜯겨나가고, 육중한 목재들보가 제거되었다. 이탈리아 장인들이 한 땀 한 땀 새긴 회반죽벽과 소나무 패널들은 통째로 뜯겨 미국으로 팔려갔다. 미국의 언론재벌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사들인 방 하나는 1934년 영화 키티(Kitty) 의 세트로 쓰인 뒤, 지금은 캘리포니아 헌팅턴 도서관에 박물관 유물로 전시되어 있다. 200년을 버틴 예술품이 단 몇 달 만에 전 세계로 파편화되어 흩어진 것이다.   1827년, 리처드 아크라이트 주니어가 매입한 직후의 서튼 스카스데일 홀의 모습.(위키피디아) 서튼 스카스데일 홀, 1900년경.(위키피디아) 구원, 철거 사흘 전 한 작가의 결단 지붕 없는 껍데기만 남은 채 30여 년간 방치되던 저택에 1946년 마침내 종말의 시간이 다가왔다. 당국은 안전상의 이유로 완전 철거명령을 내렸다. 중장비가 투입되기 직전, 인근 르니쇼 홀에 살던 작가 오스버트 시트웰 경(Sir Osbert Sitwell, 1892~1969)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역사는 그가 철거 사흘 전 에 사비를 털어 저택을 매입했다고 기록한다. 그는 이 흉물스러운 돌무더기에서 추한 폐허가 아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공동의 역사 를 보았다. 그의 결단 덕분에 서튼 스카스데일 홀은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이후 1970년 그의 유족들은 이 유산을 국가에 넘겼고, 현재는 영국 유산청(English Heritage)이 관리하며 보존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오스버트 시트웰 1939년.(위키피디아) 한국사회에 던지는 폐허의 질문들 더비셔의 이 고즈넉한 폐허는 오늘날 우리 한국사회에 몇 가지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첫째, 전시행정 이라는 이름의 현대판 허영이다. 니콜라스 리크가 채츠워스를 시샘하며 무리하게 성을 쌓았듯, 오늘날 한국의 지자체들은 지역 랜드마크 를 표방하며 채산성 없는 대형 공공청사와 문화시설을 짓는다. 완공 후 관리비를 감당 못 해 흉물이 되거나 방문객 없는 유령 건물이 되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300년 전 백작의 파산은 개인의 비극이었지만, 현대의 전시행정은 시민의 혈세를 낭비한다는 점에서 더 고약하다. 둘째, 문화유산의 공공성 대 사유재산권의 갈등이다. 서튼 스카스데일의 내부가 미국으로 팔려 나갈 때 영국정부는 무력했다. 개인의 재산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재개발구역의 근대 건축물들이 소유주의 이익을 위해 하룻밤 사이에 철거되는 일이 반복된다. 사유재산이라는 방패 뒤에서 사라지는 기억의 공공성 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이 폐허는 그 경계선을 묻고 있다. 셋째, 부의 세습과 신분상승의 욕망이다. 방직공장에서 일군 자본으로 귀족의 저택을 사들이고 사교계에 진입하려 했던 아크라이트 가문의 궤적은, 오늘날 한국 재벌가문의 혼맥과 부의 대물림 과정과 기묘하게 닮아 있다. 부가 권력으로, 권력이 다시 신분으로 고착화되는 과정에서 그들이 남기는 유산은 무엇인가. 우리는 돌담 대신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 넷째, 마지막 한 사람 의 중요성이다. 국가가 손을 놓고 있을 때, 철거 사흘 전 사비를 털어 현장을 지킨 오스버트 시트웰 같은 이들이 한국에도 있었다. 개발 논리에 밀려 사라질 뻔한 골목과 산업유산을 기록하고 지켜낸 활동가와 시민들이다.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을 때 역사를 구원하는 것은 결국 깨어있는 개인의 의지다.   1919년에 서튼 스카스데일 홀을 매각한 윌리엄 아크라이트.(위키피디아) 남은 것들, 폐허가 건네는 위로 오늘날 서튼 스카스데일 홀은 지붕이 없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지붕이 없기에 더 많은 것을 보여준다. 완성된 건물은 화려한 겉면으로 치부를 감추지만, 폐허는 뼈대를 드러냄으로써 진실을 말한다. 뜯겨나간 장식의 흔적과 텅 빈 벽난로 자리는 그 자체로 인간 욕망의 덧없음을 증명하는 웅변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서튼 스카스데일 을 짓고 사는지 모른다. 타인보다 화려하게, 감당할 수 없는 빚을 내서라도 쌓아 올리고 싶은 욕망의 성벽 말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남는 것은 결국 견고한 돌의 기억뿐이다. 오늘도 더비셔의 바람은 텅 빈 창틀을 지나며 묻는다. 당신의 욕망은 어떤 뼈대를 남길 것인가? 지붕이 없어도 꽤 오래, 이 질문은 우리 곁에 머물 것 같다.   서튼 스카스데일 홀의 서쪽 전경.(위키피디아) 서튼 스카스데일 홀의 서쪽 전경에서 김성수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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