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담길 따라 걷는 600년…왕곡마을 시간이 멈춘 듯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강원도 최북단 고성군에는 시간이 멈춘 듯한 마을이 있다. 굽이진 산세와 푸른 송지호, 그리고 오래된 초가와 북방식 한옥이 어우러진 이곳은 수백 년의 세월을 품은 전통마을, 바로 왕곡마을이다.
오가는 이 없는 조용한 마을길이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그림이 되는 왕곡마을의 흔한 풍경. 2026.5.15 정용일 시민기자
설악산에서 금강산 향하는 길에 자리한 왕곡마을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다. 조선 후기 북방 가옥의 원형과 옛 농촌 공동체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한국의 전통 주거문화와 강원 북부 특유의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문화마을이다. 2000년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학술적·문화적 가치 또한 높다.
왕곡마을의 역사는 고려 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 유신 가운데 한 명이었던 양근 함씨 가문의 함부열이 새 왕조에 벼슬하지 않고 강원도 간성 지역으로 낙향했다. 이후 그의 후손인 함영근이 지금의 왕곡마을에 정착하면서 마을의 역사가 시작됐다고 전해진다.
이후 왕곡마을은 임진왜란 등의 혼란을 겪으면서도 명맥을 이어왔고, 조선 후기 들어 본격적인 집성촌 형태를 갖추게 됐다. 특히 현재 남아 있는 전통가옥 상당수는 18~19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백 년의 세월, 전쟁과 산업화의 거센 흐름 속에서도 옛 모습이 비교적 온전히 보존되면서 오늘날 한국 북방 전통가옥 연구의 중요한 현장으로 평가받는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다섯개의 봉우리가 있다고 해서 오봉리다. 2026.5.15 정용일 시민기자
왕곡마을의 가장 큰 특징은 독특한 지형 구조다. 마을은 동해안에서 약 1.5km 안쪽 내륙 분지에 자리하고 있으며, 주변이 다섯 개 산봉우리로 둘러싸여 있다. 오음산과 진방산, 호근산, 제공산 등 낮은 산들이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고, 근처에는 아름다운 석호인 송지호가 자리한다. 이러한 지형 덕분에 외부의 영향을 비교적 적게 받으며 독자적인 마을 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실제로 마을에 들어서면 일반 한옥마을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왕곡마을 가옥들은 남부지방의 화려한 기와 한옥과 달리, 소박하면서도 실용적인 북방식 구조를 띠고 있다. 대표적인 특징은 ‘양통집’ 또는 ‘겹집 구조’다. 안방과 사랑방, 부엌, 마루 등이 하나의 건물 안에 밀집돼 있고, 부엌 옆에는 외양간이 함께 붙어 있다. 겨울이 길고 추운 강원 북부 지방의 기후적 특성을 반영한 구조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집의 공간 구성이다. 앞마당은 개방적이어서 가족 공동 작업이나 이웃과의 교류가 이뤄지는 공간 역할을 했던 반면, 높은 담장 뒤에 위치한 뒷마당은 여성들의 생활 공간으로 사용됐다. 밖에서는 뒷마당이 거의 보이지 않고 지붕만 보이도록 설계돼 있어 당시 생활문화와 유교적 공간 개념을 엿볼 수 있다.
왕곡마을의 매력은 단순히 오래된 집들이 남아 있다는 데만 있지 않다. 마을 전체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돌담 사이로 텃밭이 이어지고, 계절마다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봄이면 산벚꽃과 초록빛 논밭이 마을을 감싸고, 여름에는 짙은 녹음과 개울물 소리가 정취를 더한다. 가을이면 황금빛 들녘과 초가지붕이 어우러져 한 폭의 풍경화를 만들고, 겨울에는 눈 덮인 북방식 초가가 강원 산골 특유의 고즈넉함을 보여준다.
다른 한옥촌들이 원형이나 사각 형태의 대지 위에 초가집 또는 기와집이 모여 있는 형태라면, 이곳 왕곡마을은 마을 곳곳에 마치 나뭇가지처럼 자연스럽게 길이 뻗어 있다. 또한 마을 곳곳이 평지가 아닌 비탈진 땅에 초가집들이 있는 모습이 인위적인 느낌이 전혀 없다는 것이 매력이라면 매력이다. 2026.5.15 정용일 시민기자
특히 이곳은 시간 여행 마을”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옛 정취가 짙다. 현대식 건물과 화려한 상업시설 대신 오래된 초가와 전통 가옥, 조용한 골목과 시골 풍경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전통 한옥 숙박 체험도 가능해 관광객들은 실제로 옛 농촌 생활을 체험할 수도 있다.
왕곡마을은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도 자주 등장한다. 인위적으로 꾸며낸 민속촌이 아니라 실제 주민들이 살아가는 생활공간이라는 점에서 더욱 생생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오래된 굴뚝과 디딜방아, 토담길, 장독대 풍경은 도시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한국 농촌의 원형적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마을 한쪽에는 고성왕곡마을보존회 사무실로 쓰이고 있는 초가집이 있는데, 사무국장과 경비원이 상주하고 있다. 2026.5.15 정용일 시민기자
무엇보다 왕곡마을의 진정한 가치는 ‘느림’에 있다.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의 시간과 달리, 이곳에서는 계절의 흐름과 자연의 숨결이 삶의 기준이 된다. 자동차 소음 대신 바람 소리와 새소리가 들리고, 높은 빌딩 대신 산과 하늘이 시야를 채운다. 방문객들은 이곳에서 단순한 관광을 넘어 잊혀가는 한국의 옛 삶과 정서를 마주하게 된다.
화려함보다는 소박함, 속도보다는 여유를 품은 왕곡마을. 강원도 고성의 작은 산골마을은 오늘도 수백 년의 시간을 품은 채 조용히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정용일 시민기자 zzokkoba200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