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의 한글철학 ㊹] 씨알(民), 모심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1956년 12월 27일 다석 류영모는 YMCA 연경반(硏經班)에서 「대학(大學)」을 풀어 밝혔다. 1928년, YMCA 간사 창주 현동완(滄柱 玄東完, 1899~1963)이 간청하여 연경반 모임을 지도한 지 28년 되던 해였다. 다석은 1963년까지 35년을 이끌었다. 붓다예수는 길에서 말숨을 열었고, 다석은 골에서 말숨을 텄다.
본디 「대학(大學)」은 『예기(禮記)』 제42편에 속한 글이다. 주희(朱熹, 1130~1200)가 주석을 붙여 『대학장구(大學章句)』로 펴낸 뒤 이를 유교 말씀(經典) 삼았다. 글자가 1,700자 남짓이니 겉은 작으나 속은 깊고 넓다.
「대학」에 세 벼리(三綱)가 있다. 명명덕(明明德)이 첫째요, 친민(親民)이 둘째요, 지어지선(止於至善)이 셋째다. 다석은 우리말로 풀었다. 명명덕은 제 밝은 속알로 세상을 밝히는 ‘밝속알’이요, 친민은 밝속알로 밝혀서 모시는 ‘씨알어뵘’이요, 지어지선은 밝속알 밝혀 모신 씨알어뵘으로 ‘된데 머무름’ 자리다. 착하디착한 밝속알 모심이 ‘ᄆᆞᆷ’에 머물러 있는 자리다. 그 자리는 온새미로 참 하나만 섰을 뿐이다. 밝속알이 두루 고루 비추어 ‘씨알어뵘’이 우러나서 끝없이 번진다. 그 가온에 머무른다.
다석은 ‘지지지지(知至至之)’를 풀어 말하길 이르는 데를 알면 거기에 이르도록 노력하는 것을 뜻한다.”라고 했다. 이 말은 『주역(周易)』 건괘(乾卦) 문언전(文言傳)에 나온다. 이때 지(至)는 ‘이른다’가 아니라, 힘써 ‘이룩하다’는 뜻에 가깝다면서 ‘지어지선(止於至善)’ 속 ‘지(止)’와 다르게 생각했다. 지어지선(止於至善)은 끝끝내 다다르려 애쓰는 눈길(目的)이요, 다하고 다해서 마지막에 다다른 궁극이기 때문이다. 끝끝내 다다른 자리에 ‘머무름(止)’이다.
친민(親民)은 어떻게 풀었을까? 친(親)은 신(新)으로 풀어야 한다. 새롭게 사는 것이 하늘과 친하는 것이다. 새롭지 않은 것을 버리지 않으면 친할 수가 없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친민은 천하의 백성을 제 몸과 같이 알아야 한다는 것”이요, 백성을 뜻하는 민(民)은 우리말로 ‘씨알’인데, 이 씨알(民)을 위함이 하느님 위함이다.”라고 힘주었다. 또 백성을 모른다 하면서 한아님만 섬긴다 함도, 한아님은 모른다 하고 백성만 위한다 함도 다 거짓”이라고 덧붙였다. 다석은 친민을 씨알어뵘”이라 했다. 12월 27일 겨울밤, 다석이 우리말로 푼 것은 이것이다.
한 배움의 길은(大學之道), 밝은 속알 밝힘에 있으며(在明明德), 씨알어뵘에 있으며(在親民), 된데 머무름에 있느니라(在止於至善)”
씨알은 껍질에 싸여 있지만 그 속은 우주를 품고 있는 산알 씨앗이다. 짓밟혀도 다시 일어나는 끈질긴 생명력이요, 스스로 깨어나 나라 임자가 되어야 할 거룩한 씨알이다. 거룩한 씨알이 곧 민중이다.
[다석의 한글철학]에 가져다 쓴 노자 늙은이 풀이는 다석 류영모의 것이다. 있는 그대로 가져왔기에 띄어쓰기, 하늘아, 이어쓰기를 그대로 두었다. 또한 이 글에 가져다 쓴 다석어록”은 1993년 홍익재에서 펴낸 『씨ᄋᆞᆯ의 메아리 다석어록: 죽음에 생명을 절망에 희망을』이 온통이다. 여기서 가져왔다.
열쇳말: 씨알 - 껍질과 알맹이 - 짓밟힘 - 스스로 깨어남 - 나라 님자
그림1) 신천 함석헌이 강연하는 모습이다. 함석헌은 씨알의 설움-함석헌 다시 읽기 529쪽에서 민중이 뭐냐? 씨알이 뭐냐? 곧 나다. 나대로 있는 사람이다. 모든 옷을 벗은 사람, 곧 알사람이다. 알은 실(實), 참, real이다. 임금도, 대통령도, 장관도, 학자도, 목사도 … 죄수도 다 알은 아니다. 실재(實在)는 아니다. … 정말 있는 것은, 알은 한 알뿐이다. 그것이 알 혹은 얼이다. 그 한 알이 이 끝에서는 나로 알려져 있고, 저 끝에선 하나님, 하늘, 브라만으로 알려져 있다. … 알사람, 곧 난 대로 있는 나는 한 사람만 있어도 전체다. 그것이 民이다.”라고 했다.
#1. 씨알: 우주
맨사람
다석 류영모는 한자 말 ‘백성(百姓)’이나 ‘민(民)’을 우리말로 바꾸어 풀었다. 씨알머리가 없다.”, 씨알도 안 먹힌다.”라는 말이 있다. 싹수가 없고 줏대도 없는 놈, 말이 안 통해 꽉 막힌 놈을 가리킨다. 나쁜 뜻이다. 그런데 씨알이 굵다.”라는 말은 알찬 뜻이다. ‘씨알’만 뚝 떼 보면 ‘싹수, 줏대, 알참’이다. 이 말들에 산알 뜻이 깃들어 있다. 다석은 백성을 ‘온씨알’, 민을 ‘씨알’로 풀었다. 이 뜻을 이은 함석헌은 씨알이 그저 단순한 민중이 아니고, 스스로 깨어있는 순수한 맨사람”이라고 받았다. 다석이 밝힌 뜻을 크게 알아차렸다. 그렇다. 씨알은 ‘맨사람’이다. 껍질을 깬 맨사람이요, 갇옷(囚人)을 벗은 맨사람이요, ‘앗숨’을 튼 맨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생명 언어다. 있는 그대로 꼴 지은 ‘있꼴(存在)’을 그대로 바라보는 불숨(革命)이다. 그동안 ‘민(民)’은 정치권력이 다스리는 통치 대상이거나,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받아 움직이는 무리로 여겼다. 이제 ‘씨알’은 하나하나가 산알이요, 본디 ‘제꼴(原形)’을 간직한 채 저절로 있는 낱동이요, 온통이다. ‘없이 계시는 님’이라 했듯이, ‘온통으로 계시는 낱동’이겠다. 그러니 씨알은 권력이 부리는 소모품이 아니요, 땅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몬(物)도 아니다. 하늘 숨을 머금고 이 땅에 심어진 거룩한 꼴이며, 그 ‘본꼴’로 한아님을 속에 품은 얼 임자다.
숨밭 김경재(1940~2025)는 온갖 나라 살림을 맡아 감당하고, 전쟁 나면 전쟁터에서 나라 지키고, 세금 내고, 사회를 이루어가는 실질적 생명체에 대한 순수한 우리말 이름이 없다는 것을 다석 류영모는 어느 날 새삼스럽게 발견했다.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 한문 글로서 ‘민(民)’이라는 호칭이 있지만, 언제나 국민(國民), 군관민(軍官民), 서민(庶民), 상민(常民), 백성(百姓)이라 불리었지, 자기 자신의 독자적인 이름, 말, 어휘가 없었다. 그만큼 있으나 마나 한 존재자들이요, 집이 없으므로 ‘존재의 위협’을 받는 하찮은 존재자들이었다.”라고 했다.
[2016년 2월 17일 늦은 저녁, 경북대구동학공부방에서 강연한 자료에서 가져왔다. 주제는 씨알운동과 동학-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였고, 자료는 ‘숨밭 김경재의 신학아키브 누리집(www.soombat.org)에 있다. 2026. 4. 23. 최종 확인]
앗숨
씨알 얼개는 겉을 단단하게 감싼 껍질과 그 속에 살아 숨 쉬는 알맹이로 이뤄져 있다. 이 얼개는 인간이 가진 겉과 속이다. 인간을 벗어야 사람 된다. 겉을 둘러싼 껍질은 겉나인 ‘제나(自我:Ego)’이고, 그 속 알맹이는 속나로 ‘얼(靈)’이다. ‘속알(德)’이다. 겉을 깨트려야 속이 드러나듯, 제나를 깨야 ‘속나’다. 속나가 속사람이요, 맨사람이다. 속사람, 맨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 다석은 모든 것을 시종(始終)으로 보려고 하지만 종시(終始)라야 능득(能得)을 한다. 그래서 한아님 섬김에는 겉나로 끝내고 속나로 비롯하는 것이다. 사천종시(事天終始)이다. 우리의 앎이 지어지선(止於至善)의 자리에서 가지는 지지(知止)이지만 이것은 또 하나의 시작이다.”라고 했다. 겉나는 ‘몸’이요, 속나는 ‘얼’이다. 씨알이 참으로 깨나기 위해서는 딱딱한 겉껍질을 스스로 깨야 한다. 껍질 속에 머물면 싹트지 못한다. 싹트지 못한 씨알은 썩어버린다. 껍질이 깨지고 죽어야 씨알이 ‘앗숨’을 터 솟구친다.
신천 함석헌(信天 咸錫憲, 1901~1989)이 펴낸 『씨ᄋᆞᆯ의 소리』 뒤표지에 「우리가 내세우는 것」이란 선언문이 있다. 『씨ᄋᆞᆯ의 소리』는 1970년에 창간했고, 「우리가 내세우는 것」은 1976년 1․2월호(통권50호)부터 실었다. 왜 뒤늦게 내세우는 글을 싣게 되었을까? 1970년 김지하 ‘오적(五賊)’ 필화사건, 전태일 분신, 1971년 교련철폐투쟁․대학자주화선언운동, 광주대단지사건, 1972년 유신 선포, 1973년 개헌청원운동․백만인서명운동, 1974년 민청학련사건, 2차 인혁당사건, 1975년 긴급조치 선포. 함석헌은 늘 길에서 맞섰고, 광장에서 외쳤다. 걷고 외치면서 맞섰으나 유신 독재는 바뀌지 않았다. 이에 씨알사상 벼리를 내세운다. 온글(全文)에 함석헌이 밝힌 씨알사상 벼리(綱領)가 나타난다. 벼리는 여덟이다. 지금도 본받아 배울 벼리다.
• 씨알의 소리는 순수하게 씨알 자신의 힘으로 하는 자기 교육의 기구입니다.
• 씨알은 하나의 세계를 믿고 그 실현을 위해 세계의 모든 씨알과 손을 잡기를 힘씁니다.
• 씨알의 소리는 어떤 종교ㆍ종파에도 속해 있지 않습니다.
• 씨알의 소리는 어떤 정치세력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 씨알은 어떤 형태의 권력 숭배도 반대합니다.
• 씨알은 스스로가 역사의 주체인 것을 믿고, 그 자람과 활동을 방해하는 모든 악과 싸우는 것을 제 사명으로 압니다.
• 씨알의 소리는 같이 살기 운동을 펴 나가려고 힘씁니다.
• 씨알은 비폭력을 그 사상과 행동의 원래로 삼습니다.
그림2) 함석헌은 1989년 2월 4일에 돌아갔다. 한국일보 1989년 2월 5일자 부고기사다(4면). 그이가 산 삶을 고갱이만 골라서 쓴 기사다.
하늘 대장장이
씨알이 가진 본바탈(本性)은 ‘짓밟혀도 다시 일어나는 끈질긴 생명력’이다. 싹 튼 씨알 목숨(運命)은 바르지 않고 너그럽지도 않다. 늘 꽃길이 아니다. 먼저 씨알은 땅속 어두운 곳에 묻혀야 하고, 싹을 튼 뒤에는 거친 사람들 발길에 무참히 짓밟힌다. 시련이다. 이 참혹한 짓밟힘이야말로 씨알을 잠에서 깨우는 ‘하늘 대장장이’ 망치질이다. 짓밟히는 고통을 통해 견고한 껍질에 균열이 생기고, 그 틈으로 하늘 기운인 ‘산숨(生氣)’과 ‘빛숨’이 스며든다. 고난은 씨알을 멸망시키는 형벌이 아니다. 오히려 깊이 잠자는 얼을 흔들어 깨워 ‘소소솟’ 부활로 이끄는 신령한 도가니다. 짓밟힌다고 죽을 씨알이 아니다. 오히려 더 깊이 뿌리를 내리고 더 높이 줄기를 뻗어 올리는 기쁨이다. 다석은 이를 기가 샘 솟는 ‘기뿜’이라고 했다. 싹을 텄어도 늘 거듭나지 않으면 ‘ᄋᆞᆯ’은 어림도 없다.
다석은 불평이 없으면 동(動)하지 않습니다. 동하니까 소리가 납니다. 이 우주가 동한 것, 우리가 노래하고 말하고 하는 것은 불평이 있기 때문이지요. 불평도 힘 있는 불평을 하면 평화롭게 돼요. … 4·19혁명도 독재여 놓아라 하는 노래입니다. 세계의 무슨 일이든 이렇게 해야 합니다. 이런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이에 대한 노래를 할 준비가 돼야 합니다. 이런 완전한 준비가 된 것이 자유 민주를 체득한 자입니다.”라 말했고, 또 4·19혁명 때 나타난 것은 미워할 것을 바로 미워한 것입니다. 그렇게 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한 것입니다. 미워할 것을 바로 미워하면 괴로움이 적을 것입니다.”라고 외쳤다. 씨알이 하느님이다. 씨알을 ‘모신 하느님(侍天主)’이요, 씨알이 하느님(人乃天)이라 하지 않았나!
홀씨
겉보기에 씨알 하나는 작고 보잘것없다. 그렇지만 씨알 하나는 우주 온통인 ‘한아’로 이어져 있다. 그것은 한 줄기다. 비록 몸 눈으로 보기엔 손톱보다 작은 씨앗일지 모르지만, 그 신비로운 ‘알짬’ 속에 온 우주가 다 들어있다. 씨알은 결코 외롭게 조각난 쪼가리가 아니다. 홀로 있는 하나와, 쪼가리 한 조각이 가진 외로움은 다른 것이다. 씨알은 늘 홀로 있다. 홀로는 오롯하다. ‘홀’이야말로 온통으로 계시는 낱동이다. 오롯이 홀로 서야 서로를 이을 수 있다. 외로움은 깨진 ‘쪼가리’다. 한 사람은 나홀로 홀씨다. 함석헌은 ‘맘’이라는 읊이(詩)를 썼다. 마음 꽃/ 골짜기에 피는 난(蘭)/ 썩어진 흙을 먹고 자라/ 맑은 향을 토해.// 맘은 씨ᄋᆞᆯ/ 꽃이 떨어져 여무는 여무진 ᄋᆞᆯ/ 모든 자람의 끝이면서/ 또 온갖 형상의 어머니.” 홀씨가 썩은 흙을 먹고 자라서 맑은 꽃내(香)를 토하는 꽃이 된다. 그 꽃이 떨어진 자리에 여물고 여문 ‘ᄋᆞᆯ’이 열매다. 열매에 ‘ᄋᆞᆯ’이 깃든다. 영글고 영근 열매는 씨가 굵다. 이 ‘씨ᄋᆞᆯ’이 우주다. 빈탕한데다. 큰 빈탕한데는 길이다. 그 자리가 한아님이다. 씨알 하나가 깨어나면 온 우주가 그 속에서 춤춘다. 신성이 춤추는 자리다.
예수를 정말 믿고 염불(念佛)을 정말 하는 사람은 씨알(民) 님을 머리에 인 자다. 거죽은 거짓이다. 참이 없다. 참은 속에 있다. 참은 비워야 있다. 참은 하나에 있다. 자기가 참이거니 하는 것처럼 거짓은 없고, 자기가 선하거나 하는 것처럼 추한 것은 없다.”(다석어록)
그림3) 1970년 4월에 펴낸 씨ᄋᆞᆯ의 소리 창간호다. 함석헌은 창간사에서 씨ᄋᆞᆯ은 민중을 뜻하며, 민중이 알아야 할 것을 숨기지 않고 보여 주겠다”라고 밝혔다. 1970년 5월, 창간 후 한 달 만에 문화공보부로부터 등록 취소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대법원 소송을 통해 승소하여 1971년 9월 복간하였다. 1980년 7월 등록취소, 1988년 12월 복간, 1989년 발행인 변경, 1991년 3월 이후 장기 휴간. 현재 격월간으로 발간 중이다. 사진은 한석헌 기념관에 전시 중인 창간호다.
#2. 껍질과 알맹이: 죽음과 삶
참마음
「우리가 내세우는 것」이라는 글 끝에 이런 말이 있다. 씨알은 선(善)을 혼자서 하려 하지 않습니다. 씨알은 너나가 있으면서도 너나가 없습니다. 네 마음 따로 내 마음 따로가 아닌 것이 참마음입니다. 우리는 전체 안에 있고, 전체는 우리 하나하나 속에 다 있습니다.” 그렇다. 따로따로 아닌 것이 참마음(眞心)이다. 우리 하나하나 속에 다 있어야 참마음이다. 다석도 너나 ․ 없 : 비롯”이라 했다. ‘너나 없에 비롯한다’는 뜻이다. 너와 나를 따로따로 내세우면 씨알은 죽는다. 씨알이 싹을 터야 할 순간에도 껍질 안에만 머물려고 하면 그곳은 ‘갇집(監獄)’이다. 다석은 이 딱딱한 껍질을 ‘제꼴(自己)’이라 착각하며 껍질 가꾸기에 몰두하는 걸 혼냈다. ‘저밖에 모르는 외고집쟁이’ 껍질은 썩어 없어질 멸망이다. ‘껍질과 알맹이’를 알아차리는 일은 참나(眞我)를 묻는 첫 문이다. 씨알 바탈은 겉껍질에 있지 않다. 그 속에 고요히 숨 쉬는 알맹이에 있다. 그 자리가 ‘ᄆᆞᆷ’ 자리다. 참마음 자리.
산알 힘
조심스레 껍질을 벗겨내면 그 속에 희고 부드러운 알맹이가 있다. 다석은 이것을 ‘알짬(精)’이라 했고, 노자 늙은이를 풀 때는 ‘속알(德)’이라 했다. 그리고 산알 알맹이인 ‘얼(靈)’로도 불렀다. 껍질이 땅에 속한 것이라면, 알맹이는 하늘에 속한 것이리라. 껍질은 땅에 속하니 썩어 문드러지고, 알맹이는 하늘에 속하니 씨앗을 터트려 자란다. ‘씨ᄋᆞᆯ’은 길(道)이요, 참(眞)이요, 산알(生)이다. 이 씨ᄋᆞᆯ로 말미암지 않고는 한아님께로 올 자가 없으리라. 그러니 씨ᄋᆞᆯ로 터 자랄 씨앗은 얼마나 신령한가. 씨앗은 비어 있는 듯하나 참된 것으로 가득 차 있어 나를 살리고 남을 살리는 산알 힘이다. 이 씨앗이 싹을 틔우면 거대한 나무가 되고 온 우주를 비추는 빛이 된다. 껍질이라는 겉치레를 벗어야 하리라. 속알 깊숙한 곳에 움튼 ‘앗숨’을 높높이 숨 터야 하리라. 산알 힘으로 애써야 하리라.
다석이 풀어낸 한글철학을 옳게 받아 낸 함석헌은 ‘씨ᄋᆞᆯ’이 가진 글꼴 뜻을 이렇게 풀어 말했다. 씨알이란 말은 민(民, people)의 뜻인데, 우리 자신을 모든 역사적 죄악에서 해방시키고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격을 스스로 닦아 내기 위해 일부러 만든 말입니다. ‘ㅇ’ 은 극대(極大) 혹은 초월적(超越的)인 하늘을 표시하는 것이고, ‘ ․ ’는 극소 혹은 내재적(內在的)인 하늘 곧 자아(自我)를 표시하는 것이며, ‘ㄹ’은 활동하는 생명의 표시입니다.” ‘ᄋᆞᆯ’을 푼 뜻은 다석이 푼 뜻 그대로다.
하늘길
씨알이 싹트는 나날은 ‘죽어서 사는’ 목숨이 보여주는 신비다. 씨알이 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겉을 싸고 있던 껍질이 반드시 썩어 문드러져야 한다. 껍질이 제꼴(自己)을 고집하며 버티고 있으면 알맹이는 결코 빛을 볼 수 없다. ‘제나가 죽어야 한다’는 꾸짖음은 거짓꼴을 포기할 때 비로소 참 목숨이 솟아난다는 뜻이다. 다석은 나(自我)가 죽어야 참나(眞我)가 산다. 완전히 내가 없어져야 참나다.”고 했고, 낳아서 죽는 것이 몸이요, 죽었다 사는 것이 얼이다. 얼은 자아(自我)가 죽어서 사는 삶이다. 육(肉)에 죽고 얼에 사는 것이 얼이다.”라고 했으며, 바뀌는 것은 겉나요, 바뀌지 않는 것은 속나다. 변화하는 겉나(몸)에서 변화하지 않는 속나(얼)로 솟나면 무상(無常)한 세상을 한결같이 여상(如常)하게 살 수 있다.”라고 했다. 껍질인 ‘저것(겉나)’을 과감히 놓아버릴 때, 비로소 ‘이것(속나)’이 잡히는 것. 죽어야 사는 이 섭리야말로 씨알이 하늘길(늘길)로 나아가는 문이다.
좋이
다석은 열매보다는 꽃을, 속알보다는 겉치레를 숭상하는 세상 꼴을 ‘좋이’라는 말로 경계했다. 사람들이 꽃을 보면서 ‘좋이 좋이한다’는 것이다. 저 좋은 좋다는 말은 악마에 복종하는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실컷’, ‘좋으면 좋다’ 따위 말은 내던지고 갔으면 좋겠다”라고 말한 까닭이다. 꽃은 껍질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화려한 꾐(誘惑)이지만, 결국 찰나에 스치는 꽃내일 뿐이다. 진정한 산 아이 기개는 그 화려한 꽃잎을 스스로 떨구고, 투박하더라도 산알 품은 열매를 따르는 데 있다. 다석은 꽃은 고운대 질 줄을 몰라 탈이다. 꽃이 지고 열매가 맺히는 것이 좋다. 꽃 지고 열매 맺어 마치여 가을을 이룬다.”라고 했다. 속알이 머금어질 때 비로소 사람 구실을 하게 된다. 알맹이가 꽉 찬 씨알은 겉은 비록 초라할지언정 그 속에는 하늘 무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참사람(眞人)은 제 속에 긋(點)이 있다. 죽어도 죽지 않는 영원과 연결된 긋을 지니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생각을 가지고, 정신을 가지고 있다. 속알을 가지고 영혼을 가지고 있다.”라고 한 것이다.
그림4) 1960년 4월, 부정선거와 이승만 독재에 저항하는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제1공화국을 끝낸 4.19혁명 기록사진이다. 경찰이 학생들을 진압하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밝히고 있다.
#3. 짓밟힘: 영글다
억누름
씨알은 본디 화려한 꽃병에 꽂히는 ‘있꼴(有形)’로 보아서는 안 된다. 낮고 어두운 땅바닥에 떨어지는 꼴로 ‘제꼴’이다. 씨알이 사는 삶은 때때로 ‘짓밟힘’이다. 세상이 쥔 힘에 휘둘리고, 따돌리고, 밀려난다. 그런 거친 삶이 주는 무게는 끊임없이 씨알을 내리누른다. 이 짓밟힘은 그저 아무 저항 없이 받아 내는 고통일까? 씨알은 땅속 어둠에 묻히고 짓밟히는 시련을 통해서 비로소 ‘제꼴’로 있어 사는 까닭을 깨닫는다. 짓밟히지 않은 씨알은 단단한 껍질에 갇힌 ‘죽은 알’에 불과하지만, 짓밟히는 고통을 겪는 씨알은 그 억누름을 이겨내고 생명을 밀어 올리는 ‘산알’이 된다. 짓밟힘은 씨알이 지상에서 겪는 가장 아픈 통과의례이자, 하늘로 향하는 첫 문이다. 다석은 사람이란 참기 어려운 이 세상에 싹튼 인토생(忍土生)이다. 이 세상은 난삽한 땅이다. 사바 세상에 산다는 것은 살점을 도려내는 듯 아프고 쓰라린 세월이다.”라고 했다.
긋
우리가 겪는 시련과 짓밟힘 뒤에는 거대한 ‘대장장이’ 한아님이 있다. 대장장이가 쇠붙이를 단단한 도구로 만들기 위해 뜨거운 불길에 넣고 망치로 두드려대듯, 한아님은 씨알을 영글게 하기 위해 짓밟힘이라는 망치질을 멈추지 않는다. 씨알은 제 맘대로 튀지 말고 대장장이 망치질을 견뎌야 하리라. 우리가 삶에서 겪는 때때로 억울한 일, 때때로 고통스러운 실패, 때때로 사회가 주는 억누름은 재앙이 아니다. 속알을 단단하게 다지는 일이다. 이 망치질을 견뎌낸 씨알은 더 일찍 일어나리라. 다석은 가난과 고초를 겪은 끝에 정신이 깨난다.”고 했고, 작을 소(小)자는 땅에서 싹이 터 나오는 것을 그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싹은 작은 것 같아도 영원한 것과 이어진 한 끄트머리다. 이 끝은 영원을 찾아 오를 한 긋의 생명을 가졌다.”라고 했다. ‘긋’이란 글씨가 참 깊다. 땅 밑 씨알의 싹이 하늘 높이 있는 태양이 그리워서 그…… 하고 터 나오는 것을 그린 것이 긋이다.”라잖은가.
틈새
거슬러 말하면, 씨알 목숨은 짓밟히는 그 순간에 폭발한다. 터 나온다. 단단하기만 하던 껍질은 세상 억누름과 짓밟힘을 견디다 못해 마침내 틈새가 생긴다. 이 균열 틈새가 바로 저절로 제 한아님 숨빛이 들어오는 길이다. 다석은 참빗은 생명의 빛이요, 성령(숨)의 빛이다. 곧 숨빛이다.”라고 했다. 껍질이 깨진 그 틈으로 ‘산숨’이 나들고, ‘빛숨’이 나든다. 숨빛이다. 짓밟힘이 없었다면 씨알은 껍질 속에 갇혀 하늘 숨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고난을 통해 껍질에 금이 갈 때 우리는 속나로 치솟는다. 솟구친다. 그러니 짓밟힘은 잠자던 얼 바탈(靈性)을 흔들어 깨우는 신령한 자극이라고 해야 하리라.
브들므릇
짓밟히는 씨알이 끝내 이기는 비결은 ‘부드러움’에 있다. 다석은 브드럼이 굳솀을 이김. 므른게 셴걸 이김.”(36월)이라는 노자 늙은이 가르침을 ‘브들므릇(柔弱)’이라고 풀었다. ‘므브프’는 입술소리다. ‘무부푸’보다 더 알맞다. 센 것을 짓밟으면 꺾이게 되지만, 부드러운 씨알은 짓밟힐수록 더 깊이 뿌리를 내린다.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군홧발이 씨알을 짓누를지라도, 씨알은 그 발길 아래서 고요히 숨을 고르며 때를 기다린다. 다석은 4․19혁명을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세상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안 되는 이 세상이지만 혹 되는 듯하면 참 기뻐요. 하룻밤 자고 갈지라도 뭐가 좀 되는 듯하면 나도 퍽 복을 느낍니다. 흙으로 된 세상 이 땅 위에서는 아무것도 바로 되는 게 없어요. 그러나 8․15 때는 나도 참 복이 있다고 느꼈어요. 그런데 또 4․19가 툭 터졌어요. 내가 무슨 복이 있어 통쾌한 꼴을 두 번이나 보게 되나 하고 퍽 기뻤습니다. 민중이 민주주의의 시민이 된 것을 감격스러이 생각해야만 참 민주주의가 되지요.”라고.
솟구침
씨알의 짓밟힘은 장엄한 부활 전주곡이다. 짓밟히고 뭉개진 듯 보였던 씨알이 어느 날 새벽, 차가운 지표면을 뚫고 초록빛 싹을 틔울 때, 온 우주는 그 경이로움에 전율한다. 고난 앞에서 좌절하지 말고, 그 짓밟힘을 생명의 영양분으로 삼으라 한다. 우리가 오늘 ‘짓밟힘’을 묵상하는 까닭은 삶에 닥친 시련을 하늘 축복으로 다시 풀어 밝히기 위함이다. 짓밟힐수록 더 야무지게 영그는 씨알처럼, 인생이라는 망치질에서 한아님 사랑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짓밟힘은 끝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가장 위대한 솟구침을 위한 도약대다.
그림5) 4․19혁명 당시 시위대가 계엄군 탱크에 올라서 환호하고 있다. ⓒ4월혁명회. 다석은 4·19혁명 때 나타난 것은 미워할 것을 바로 미워한 것입니다. 그렇게 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한 것입니다. 미워할 것을 바로 미워하면 괴로움이 적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씨알이 곧 하느님이다.
#4. 스스로 깨어남: 기지개
얼찬 ᄋᆞᆯ
씨알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있꼴’이다. 대다수 사람이 제 참꼴을 모른 채 먹고 산다. ‘하고픔’에 갇혀 사는 꼴이랄까. ‘스스로 깨어남’은 이 긴 잠에서 깨어나 스스로를 묻는 ‘있꼴 세움’ 사건이다. 남이 깨워주는 것이 아니라, 제 속에서 요동치는 산알 속 바탈에 따라 스스로 껍질에 틈새 내는 일이다. 이는 거짓 없는 참나를 깨달은 얼찬 ᄋᆞᆯ이 되는 과정이다. 씨알이 스스로 깨어나야 참이다. 이제 기지개를 켜고 깨어나야 하리라.
밑둥
깨어남은 제 있꼴 가온 ‘ᄆᆞᆷ’을 바로 세우는 치열한 ‘뜻알(意識)’이다. 다석은 이를 ‘가온찍기’라는 뜻말로 풀어 말했다. 하늘 땅 사이, 그 범벅 한복판에 ‘나’라는 ‘님’을 콕 찍는 짓거리(行爲). 세상 풍파에 휩쓸리지 않고 제 속에 든 속알로 정신을 바로 세울 때 씨알은 저절로 깨어난다. 이쪽저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속알 속 가온을 붙잡는 치열한 깨어있음이 바로 씨알이 지켜가는 밑둥이다. 스스로, 아니 저절로 깨어난 씨알은 더 이상 바깥 앎이나 바깥 생각에 휘둘리지 않는다. 오직 제 맘속에 세운 하늘 줏대를 따라 홀로 선 홀씨로 당당하다.
빛숨
씨알이 깨어난다는 것은 제 속에 우주 온통이 들어 있음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깨어난 씨알은 이제 저 스스로 ‘한아’에 연결된 ‘있꼴’로 산다. 비록 몸은 작고 초라한 꼴이지만, 속알 눈을 뜨고 보면 그 속에는 드넓은 ‘빈탕한데’ 신비로 가득하다. 이 깨달음이 솟을 때 씨알은 죽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세상 억누름에서도 벗어난다. 있는 그대로 저를 말미암는다. 자유다. 이렇듯 때를 뛰넘고, 곳을 뛰넘어 ‘얼나’로 깨어난 씨알은 없어지지 않는다. 꺼지지 않는 ‘빛숨’이기에.
솟남
깨어남은 단 한 번 벌어지는 일로 끝나지 않는다. 다석은 현(賢)을 ‘닦아남’으로 풀었다. ‘닦아난다’는 움직씨(動詞)다. 씨알이 깨어나는 일은 날마다 나날로 이어진다. 쉬지 않는다. 그렇지만 깨어났다고 어제에 머물면 다시 껍질이 붙는다. 나날로 깨어나지 않으면 껍질은 다시 두꺼워진다. 스스로 깨어난 씨알은 끊임없이 깨고 깨어나야 날마다 새 숨을 일으킨다. 새 숨이 솟는다. 아니, 스스로 새 숨을 솟구치게 해야 하리라. 방법은? ‘닦아남’에 매이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노자 늙은이를 빗대어 부른 ‘소소솟’이다. 억지로 하는 ‘딴짓’을 멈추고 하늘 ‘숨돎(氣運)’에 저절로 일어나는 부활이다. 부활은 스스로 깨어난 씨알만이 누리는 지극한 기쁨이다.
공동체
스스로 깨어난 이는 나 홀로 ‘벗음(解脫)’에 머물지 않고 세상을 품는 다스림으로 나아간다. 너나들이 모두 깨어나 나라 임자가 되어야 하므로. 깨어난 씨알 하나하나가 모여 큰 얼로 온통 ‘한아’를 이룰 때, 비로소 이 땅에 다툼 없는 평화가 이뤄진다. 오늘 ‘스스로 깨어남’을 묵묵히 떠올리는 까닭은 우리 ‘있꼴’ 밑바닥에 깔린 ‘무섬’을 되돌리기 위함이다. 하늘 뜻을 두려워하는 마음들이 모여서 참 임자가 될 때, 씨알 시대는 비로소 활짝 열리게 되리라.
그림6) 1987년 7월 9일, 서울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 장례식 행렬이다. 박종철, 이한열 열사는 6월 민주항쟁의 상징이다. 이들은 이 땅 이 나라의 참 주인이다. 나라 임자다. 올해는 1987년으로부터 40년이 되는 해다. 내년은 40주년이다.
#5. 나라 임자: 참 주인
안녕
나라 임자는 왕이나 위정자가 아니다. 저들이 가질 수 있는 몬(物)도 아니다. 나라는 산알 품은 씨알이 모여 사는 거룩한 터다. ‘나라 임자’는 씨알이 권력 눈치를 보는 종이 아니라, 나라 목숨을 어깨에 멘 당당한 주인임을 선언하는 말이다. 스스로 깨어난 씨알은 이제 공동체 안녕을 걱정하는 임자이자, ‘임꼴(主體)’로 거듭난다. 다석은 씨알들이 스스로 ‘나라 임자’임을 자각할 때만이, 거짓과 폭력이 난무하는 역사가 바로 설 수 있다고 믿었다.
흙낟알 님자
임자는 도맡아 하는 사람이다. 노자 늙은이는 ‘흙낟알 님자(社稷主)’(78월)의 뜻말로 임자가 도맡아 하는 길올(道理)을 밝혔다. 글을 살피면 브드런거의 굳셴거 이김과 므른거의 셴거 이김을, 셰상에 모를이 없으나, 잘 ᄒᆞ는이 없다. 이래서 씻어난이 이르되, 나라의 더러운 때를 받음, 이 일러, 흙낟알 님자라. 하고,”라 하였다. 이렇게 볼 때 참으로 ‘나라 임자’는 온갖 더러운 때와 궂은일, 그리고 온씨알(百姓) 눈물을 기꺼이 제 몸으로 받아안는 사람이다. 가장 낮은 곳에서 오물을 뒤집어쓸 각오가 된 사람만이 임자 될 자격이 있다. 씨알이 ‘나라 임자’가 된다는 것은, 그러므로 물처럼 낮은 곳으로 흘러가 세상 아픔을 씻어내는 ‘썩잘(上善)’로 사는 일이다.
씨알나라
‘나라 임자’ 씨알이 역사를 다스리는 법은 ‘속곧섬기(忠)’에 있다. 속이 곧은 모양새로 섬기는 것이다. 나라가 어지러워 길을 잃을 때, ‘나라 임자’ 씨알은 하늘 뜻에 비추어 저를 굽히지 않는 ‘깬맘(良心)’으로 불을 밝힌다. 비록 짓밟힐지라도 속알이 꽉 찬 씨알은 ‘아니올시다’로 맞서고, ‘그렇고 그렇지 않다’로 되돌려 준다. 뜻이 아닌 건 좇지 않는다. ‘씨알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 지름길은 오직 씨알 모심이요, 오직 씨알 섬김에 있다. 다석은 정치란 간단합니다. 씨알 섬길 생각만 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꺾이지 않는 ‘깬맘’들이 모여서 나라를 이루는 주춧돌이 될 때, 그 나라는 바깥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씨알 나라’가 된다.
평화
참되고 올바른 ‘나라 임자’는 나라 땅을 넓히는 일이나 센 군사를 갖고 싶어 하지 않는다. 노자 늙은이는 작은나라 적은씨알(小國寡民)”이라 했다. 열 사람 온 사람 얼러 쓸 그릇을 두되 쓸 일이 없게 해야 하고, 씨알이 주검을 무겁게 하여 멀리 옮기지 않게 하고, 배와 수레를 두나 타고 다닐 일이 없고, 갑옷과 칼을 두나 벌릴 데가 없고, 씨알이 다시 주먹셈을 쓸만하게 하고, 그러면서 먹이가 달고 입성이 곱고 자리가 편하고 살김(俗)을 즐겨해야 한다. 이웃 나라를 서로 바라보며 개 닭 소리가 마주 들리지만, 씨알이 늙어서 죽도록 왔다 갔다를 아니 한다. 이것이 노자 늙은이가 들려주는 평화다.
거룩한 뜰
‘나라 임자’로 씨알은 땅 나라를 뛰넘어 한아님 나라를 바란다. 그곳은 저기가 아니라 여기다. 여기에 솟는 나라다. 씨알은 날마다 새롭게 솟구치는 ‘숨돎’으로 역사 현장에서 부활하는 ‘앗숨’이다. 낡은 껍질에 갇혀 편하게 사는 이는 임자가 될 수 없다. 날마다 저를 일으켜 얼 깬 ‘산숨’을 내뿜는 씨알만이 참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 우리가 마주하는 ‘나라 임자’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제 속 우주를 뵈고 한아님 뜻을 아는 씨알이 모여 손을 잡아야 하리라. 그래야 거룩한 뜰이 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