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션토피아] ㉕낙숫물이 바위를 뚫는 걸 보았잖아요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지피지기 백전불태.
한 마리만 더 있으면 완전체일 텐데 말이죠.”
엇, 저도 그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쿠아리움을 탈출했던 물살이가 한 마리 더 있었죠?”
그 놈이 싹퉁 바가지 없어도 나름의 역할은 했죠.”
반말을 찍찍 해도 어쩐 일인지 밉지 않았구요.”
누가 내 욕을 찍찍 하나.”
장수거북이 딛고 있던 모래밭이 흐물거리나 싶더니 땅굴을 뚫고 별 모양의 물살이가 튀어 올랐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터라 경악과 반가움이 뒤섞여 나왔다.
아이코, 심장아.”
암만 봐도 양반은 못 되는구만.”
참으로 신통방통한 불가살이군요.”
다들 멍청하긴. 설마 그 꼴로 떠나려고 했어?”
꼴이... 왜요?”
내가 장수거북이요, 하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거냐고? 비톨드 필레츠키처럼 변장을 해야 할 거 아냐!”
너 어디서부터 우리 얘길 엿듣고 있었던 거야?”
폼폼크랩은 어제 헤어진 사이마냥 자연스레 말을 놓았다.
좋은 지적입니다. 실은 저도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어요.”
나노 플라스틱 해변에 가서 등딱지에다 칠갑을 하라구. 플라스틱 쓰레기로 보이면 감시망을 피할 수 있지 않겠어?”
좋은 아이디어에요! 그런데 나중에 장수거북님 몸에 아예 박혀서 플라스틱이 안 빠지면 어떡해요?”
전 상관없습니다. 이미 몸 안에도 플라스틱으로 가득 찼는걸요.”
당사자가 좋다는데 다들 혓바닥 집어넣어. 자자, 갈 길이 바쁘니 서두르자구. 내가 나노 해변 지름길을 알아.”
불가살이는 인간계를 탈출하던 그 날처럼 장수거북의 등껍질에 올랐다. 폼폼크랩도 불가살이 위로 올라탔다.
모두 건강 챙겨가며 일하십시오.”
은빛연어는 탈출 삼총사가 비밀통로를 빠져나간 뒤에도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했다.
해변 가에 도착한 장수거북은 온 몸에 플라스틱이 박힐 수 있도록 좌우로 마구 뒹굴었다. 그래도 플라스틱이 박히지 않으면 물풀에서 나오는 끈적한 진액을 이용했다.
굉장히 아플 것 같은데 신음도 안 내시네요.”
등껍질은 원래 고통을 못 느낍니다. 팔다리만 좀 아플 뿐.”
어느덧 장수거북의 몸은 작은 플라스틱 의자를 연상시킬 정도로 겹겹이 무장되었다. 눈구멍만 제외하면 완벽한 플라스틱 덩어리였다.
그럼 난 임무 완료했으니 돌아갈게.”
엥? 계속 함께하는 게 아녔어?”
여기까지 온 것도 감지덕지라 여겨.”
불가살이님은 어디에 계시든 현명하게 헤쳐나가리라 믿습니다. 안전히 돌아가셔서 은빛연어님 좀 도와주십시오.”
내 크기가 석잔데 누굴 도와.”
불가살이는 마지막까지도 툴툴댔다. 그래서 이별이 오히려 슬프지 않았다. 내일이라도 볼 것처럼 그는 인사도 대충 하곤 모래밭으로 숨어버렸다.
작지만 참으로 옹골찬 물살입니다.”
그러게요. 또 볼 날이 있겠지요.”
폼폼크랩은 플라스틱으로 변신한 장수거북을 훑어보다 즉석 제안을 했다.
등껍질에 장수거북님임을 증명하는 표식을 새겨두면 어떨까요?”
좋아요. 괜찮은 문구라도 있을까요?”
‘지피지기 백전불태’ 어때요?”
백전백승이 아니라요?”
백전백승은 틀린 말이래요. 어떻게 백 번 싸워 백 번 이길 수 있겠어요. 이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위태롭지 않아야 한대요. 위태롭지 않으면 지금 물러나도 다음을 도모할 수 있단 뜻이에요.”
마음에 드는데요? 강하기만 하면 부러지지만 유연하면 구부러질 뿐이라는 제 철학과도 일맥상통하군요.”
역시 통하는 데가 있어요. 그럼 집게발로 중앙에 새겨드릴게요.”
장수거북은 ‘지피지기 백전불태’가 훈장처럼 새겨지는 동안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알다시피 이 해역에서 가장 오래 사는 물살이가 바로 저예요. 삼십 년 정도 살았으니 앞으론 백 여 년 더 살 수 있겠죠. 그동안 얼마나 못 볼꼴을 더 볼지는 모르겠지만 위태롭지만 않다면 정의라는 시간은 제 편일 거라 믿습니다.”
그럼요. 과거의 아쿠아리움 때와 비교하면 우리 참 많은 게 달라진 것 같아요. 그보다 더한 지옥은 없는 줄 알았는데. 하하.”
여기에 비하면 거긴 소꿉장난이었지요.”
세상 어디에도 유토피아는 없는 걸까요?”
본래 유토피아란 존재하지 않는 곳이란 뜻이래요... 하지만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 걸 우린 보았잖아요?”
[난파궁]
‘회춘한 것처럼 십 년은 젊어 보인단 말이지.’
개복치 의원은 틈만 나면 진료소에서 대왕의 영상을 재생시켰다. 자신 몰래 무슨 약재라도 먹었나 싶을 정도로 대왕의 생김새는 눈에 띄게 양호해져 있었다. 실제로 외모를 칭찬하는 댓글이 많았는데 포토샵 효과나 카메라 마사지 덕일 거란 추측도 있었다.
‘논조랄까, 혹은 어투랄까. 그런 것도 약간 달라진 것 같고 말이야.’
개복치 의원은 자신처럼 생각하는 물살이가 있나 싶어 댓글을 일일이 살펴보았지만 그런 내용은 없었다. 그는 댓글을 믿을 수 없단 걸 알면서도 혹시나 싶어 또 확인했다. 최근에 올라온 영상 속 대왕의 시계는 혼자서만 거꾸로 가고 있었다.
‘대체 난파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다음 대선주자는 자신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아 합당했던 그로선 비상시국이란 언급도 영 꺼림칙했다. 현재 이 해역은 전혀 ‘비상’스럽지 않았다. 민물에 사는 간첩도, 불법 상거래하는 물살이들도 보이지 않았다. 해역은 언제나처럼 무탈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다만 무리를 지어 다니지 못하는 탓에 작은 물살이들이나 치어들이 사고를 당하거나 잡아먹히는 일은 종종 발생했다. 그러나 그것은 으레 그러하듯 기사화되지 않았다.
개복치 의원은 시도 때도 없이 난파선을 찾았으나 대왕은 항상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빈자리엔 늘 백합조개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대왕을 못 본지 꽤 되었단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할 말이 있으면 자신에게 남기란 말을 잊지 않았다.
어느 날 개복치 의원은 기어코 대왕을 보고 말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는 난파선 옆에 추락한 난파궁 앞에서 꼼짝 않고 기다렸다. 해역이 어두워지자 이렇게 내일을 맞이할 수 없단 생각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은 개복치 의원은 대가리로 난파궁의 뚜껑을 쾅쾅 쳤다. 서너 번 연속하여 힘을 가하자 틈새가 벌어졌다. 박치기의 힘이 세었던 것인지, 생각보다 견고하지 않았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난파궁은 난파선보다 작았지만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짙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시큼하고 꿉꿉한 냄새가 풍겨왔다. 향기로운 냄새가 아니었음에도 개복치 의원은 그 악취를 깊숙이 들여 마셨다. 냄새가 역해질수록 어쩐 일인지 더 끌렸다. 냄새의 최대치를 맡아보고 싶은 그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태곳적 고향 냄새 같기도 했고 가끔씩 진료소에서 맡아본 냄새 같기도 했다.
난파궁 상부 중앙엔 인간 대장이 앉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널찍한 의자가 있었다. 대왕오징어는 바로 거기에 안락한 자세로 몸을 기대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꼈을 텐데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마치 자신을 방해하지 마라고 온 몸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안녕하십니까. 워낙 뵙기 힘들어 이렇게...”
대왕은 여전히 미동조차 없었다. 잠이 들었나 싶어 면상 가까이 다가갔다. 농구공만한 눈알을 가진 대왕의 눈이 깜박이지 않고 있었다. 순간 훅 끼쳐오는 시취에 개복치 의원은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다시 다가갔을 때에야 큰 눈을 부릅뜬 채 죽어있단 걸 알아차렸다. 그는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난파궁.
‘대체 언제 죽은 거지? 내가 끌렸던 냄새가 바로 시체 썩은 내였단 말인가? 난 왜 이 냄새에 끌렸던 거지? 아니, 그보다도 죽었는데 어떻게 영상이 계속 올라올 수 있었던 거지? 미리 찍어두었던 건가? 이런 날을 대비해서? 아니야, 그렇게까지 치밀했으려고. 회춘한 것 같은 착각은 또 뭐란 말인가?’
그 때 저 멀리서 대왕오징어의 음성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자신의 귀를 의심한 개복치 의원은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살며시 다가갔다. 이번엔 백합조개의 음성도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이건 또 무슨 조화인가. 난파궁의 하부는 네모난 철문으로 막혀 있었는데 그 안이 소리의 근원지였다. 개복치 의원은 심호흡을 하며 대가리로 철문을 서서히 밀었다. 문은 아까보다 더 쉽게 열렸다. 살짝 열린 사이로 백합조개의 뒷모습이 보였다.
‘저게... 가능하단 말인가?’
개복치 의원의 눈앞엔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
장수거북과 폼폼크랩은 사흘도 채 되지 않아 거지꼴이 되었다.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떠났지만 안정적으로 몸을 숨길 수 있는 장소와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먹이가 보장되지 않는 이상 계속 가는 건 무리였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더니.”
진실에 가닿기도 전에 굶어죽게 생겼어요.”
장수거북은 플라스틱을 두른 상태였지만 공개수배를 당한 몸인 만큼 해역의 경계선 부근으로만 다녔다. 그곳은 물길이 들쑥날쑥했기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이나 길을 헤맸다. 물살이들이 다니지 않는 곳이다 보니 먹이 역시 구하기 어려웠다. 폼폼크랩 혼자 사냥에 나서보기도 했지만 장수거북의 위장까지 채우기엔 역부족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망망대해에서 C를 어떻게 찾을 것인가. 무슨 종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크기나 색깔은 또 어떤지 아는 게 한 개도 없었다.
잠시만 저기서 기다려요.”
폼폼크랩이 거북의 등딱지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맞은편에서 작은 물살이 떼들이 줄지어 오고 있었다. 폼폼크랩은 무심한 척 다가가 물었다.
안녕하세요. 말씀 좀 묻겠어요. 혹시 C라고 들어보셨나요?”
그게 뭐에요? 먹는 건가요?”
잠시 후 다른 종의 물살이들이 지나가자 폼폼크랩은 다시 같은 질문을 했다. 그러나 이들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자리를 떴다. 개중엔 수상한 표정으로 건너편에서 쉬고 있는 장수거북을 흘끔거리기도 했다. 이번엔 자신과 비슷한 크기의 크랩들이 옆으로 기어오고 있었다. 폼폼크랩은 다소 용기를 냈다.
안녕하세요. 혹시 C라고 들어보셨나요?”
C요? 얼마 전에 들었는데요.”
헛, 어디서요?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알을 잔뜩 배고 있어 숨 쉬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보이는 어미 크랩 앞으로 폼폼크랩이 바싹 다가갔다.
지금 있는 이 자리쯤에서 개복치 의원이 C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걸 들었어요. 마치 C와 막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중얼거리는 것처럼 보였어요.”
엄마. 그러면 혹시 우리가 본 게 C였을까요? 그 날 개복치 의원이 왔던 방향으로 헤엄쳐 가니까 커다랗고 무시무시하게 생긴 놈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잖아요.”
여러 새끼 크랩 중 하나가 그 날의 기억을 보탰다.
혹시 외형을 자세히 표현해줄 수 있겠어요?”
진회색을 띠고 있었어요. 뾰족한 각이 져 있었고... 그런데 저희도 어둠 속에서 스치듯 본 거라...”
얼핏 보기만 했는데도 차가운 기운이 훅 뿜어져 나왔어요.”
움직임이 매우 굼떴어요.”
다른 새끼 크랩들도 한 마디씩 덧붙였다.
귀중한 정보 주셔서 감사해요. 정말 큰 도움이 되었어요.”
저기 그런데... 혹시 폼폼크랩님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