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감 떨칠 수 없는 ‘여자 아베’ 시대의 한일 관계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태규 전 한겨레 논설실장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새 총리가 10월 24일, 중·참의원 합동회의에서 새 정권의 대내외 정책을 밝히는 시정연설을 했습니다. 국수주의 성향과 이념적 보수성이 아베 신조 전 총리를 빼어 닮았다고 해서, ‘여자 아베’라고 불리는 인물입니다.
그는 이 연설의 외교·안보 분야에서 한국을 ‘중요한 이웃’이라고 칭하며, 정상 간의 대화를 통해 관계 강화를 꾀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한 문장으로 된 짧은 언급이지만, 예상외의 절제된 표현입니다. 그의 스승인 아베 전 총리는 한국의 존재를 내놓고 무시했습니다. 그는 2018년 정기국회 시정연설에서는 수식어 없이 그냥 ‘한국’이라고 불렀고, 2019년에는 북한을 거론하면서 한국을 입에 올리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마지막 정기국회였던 2020년에는 원래 기본 가치와 전략적 이익을 공유했던 가장 중요한 이웃”이라고 격상한 듯한 표현을 썼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라는 걸 강조한 반어법이었습니다.
일본의 신임 총리 사나에 다카이치가 중참의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다. 2025.10.25 연합뉴스
아베 때보다 한국 중시, 기시다·이시바 때보다는 약간 후퇴
아베가 퇴진한 뒤 들어선 스가 요시히데 총리 정권부터 ‘중요한 이웃’이 한국을 규정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용어가 한일 관계의 기상도를 가리키는 일본 나름의 기준이 된 셈이죠.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2023년, 윤석열 정권의 친일 정책에 호응해 국제관계의 다양한 대응에 협력해야 할” 중요한 이웃으로 격상했습니다.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한국을 별도의 용어로 규정하지는 않았지만, 호주·주요 7개국(G7)과 함께 ‘동지국(同志國)’으로 분류했습니다.
다카이치 총리의 한국 관련 발언은 아베 때보다 한국을 중시한 것입니다. 또 (우리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중간에 그만두는 등 어정쩡하게 하니까 상대(한국과 중국)가 기어오르는 것”이라는 한국 멸시 태도에 비추어볼 때, 장족의 변화입니다. 물론 기시다·이시바 정권 때보다는 약간 후퇴한 것이지만요.
다카이치 총리의 한국에 대한 태도 변화에는 두세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첫째, 국제정세의 급변입니다. 그가 시정연설에서 우리가 익숙하게 누려온 자유롭고 개방된 안정적인 국제질서는, 힘의 균형의 역사적 변화와 지정학적 경쟁의 격화에 따라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한 대로입니다. 미국과 중국이 전면적인 패권 다툼을 벌이고 있고, 그 와중에서 미국이 동맹국인 두 나라에 경제적·군사적으로 무차별 압박을 가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동맹 관계이면서 국제 자유통상 질서 속에서 발전한 공통의 경험을 지닌 두 나라로서는 ‘동병상련의 연대’를 꾀할 여지가 어느 때보다 커졌습니다. 과거사와 같은 양국 사이의 고전적인 갈등을 꺼내 아옹다옹할 여유가 없을 정도로 급박한 상황에 몰려 있다는 상황 인식이 바탕에 깔린 것이죠.
국제정세 격변, 한국의 국력 상승이 다카이치 자세 변화 불러
둘째, 정치 지도자의 일반적인 속성입니다. 대체로 어느 나라 지도자건, 도전자의 위치에 있을 때는 적극적인 지지층을 잡아두려고 대외적으로 강경한 메시지를 내다가도 정권을 잡은 뒤에는 국익과 상대방을 고려해 현실적이고 신중한 자세를 취하는 게 보통입니다. 이재명 대통령도 당선 전에는 독도 문제와 역사 인식 문제와 관련해 강경 발언을 하곤 했지만, 집권 뒤에는 절제되고 조율된 발언으로 돌아선 바 있습니다. 셋째, 한국의 국력이 상대적으로 커진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입니다. 경제력으로만 봐도 한국이 2023년부터 1인당 명목 국민총생산(GDP)에서 일본을 쭉 앞서고 있을 정도로, 일본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됐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권과 관세 협상에서도 일본이 일찍 타결한 것과 달리, 한국은 국익에 해가 되는 협상을 할 수 없다면서 끈질기게 버티고 있습니다. 경제력과 군사력, 시민의 민주 역량이 뒷받침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밀고 당기기입니다.
다카이치 총리가 취임 뒤 예상외로 한국에 유화적으로 나왔다고 절대 안심할 일이 아닙니다. 그는 총리로 선출된 21일 기자회견에서 그의 취임으로 한일 관계가 경색될 것이라는 전망과 관련해, 나는 한국 김을 좋아하고, 한국 화장품도 쓰고, 한국 드라마도 즐겨 본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난, 현혹적인 논법에 불과합니다. 한국 사람이 스시를 좋아한다고 해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찬동하지 않듯이, 일본 총리가 한국의 김, 화장품, 드라마를 좋아한다고 독도 영유권 주장을 거둬들일 리 없습니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경제안보담당상이 일본 패전일인 15일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도쿄 지요다구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 뒤 웃으며 걸어 나오고 있다. 2023.8.15 연합뉴스 자료사진
내재적·외재적으로 반한·혐한으로 치달을 우려 커
오히려 이웃 나라 지도자가 자신의 색깔을 감추고 호도하면서, 반한·혐한 정책을 천연덕스럽게 구사하는 걸 더욱 경계해야 합니다. 다카이치 총리는 내재적·외재적으로 반한·혐한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매우 농후한 인물입니다.
내재적인 성향은 이미 그가 한 많은 발언과 행동을 통해 수없이 드러난 바 있습니다. 각료 재직 중에 야스쿠니 신사를 빠짐없이 참배하면서 한 언동이나, 이번 총재 선거 때 근거 제시도 없이 ‘나라공원에 돌아다니는 사슴을 발로 차는 외국 사람이 많다’라는 선동성 배외주의 발언을 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래도 내재적인 성향은 일정 조건 아래서 억제될 수 있습니다. 지금 보이는 그의 유화적 대한 자세가 바로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외재적 요인은 아베 총리 때보다 더욱 위험하고 불안합니다. 우선, 그의 권력 기반은 아베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취약합니다. 아베 정권 때는 자유주의 성향의 공명당과 철통같은 연립정부를 유지하면서 내정을 안정화했습니다. 그를 바탕으로 공격적인 대외정책을 구사했습니다.
다카이치 정권은 공명당의 연립정부 이탈로 자민당보다 더욱 오른쪽에 있는 일본유신회와 손을 잡았습니다. 그 결과, 정책은 더욱 오른쪽으로 기울고 권력 기반은 더욱 취약해졌습니다. 두 정당은 이제까지 선거에서 서로 보완재가 아니라 경쟁재의 관계였기 때문에 앞으로 치러질 선거에서 상생적인 협력을 기대하기도 어렵습니다. 자민당의 역학 관계도 아베 때는 ‘아베 1강’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베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돌아갔지만, 다카이치 정권은 막후 실세인 아소 다로 부총재가 이끄는 아소파에 업혀 가는 신세입니다. 아소도 극우 성향의 정치인이라는 걸 생각하면, 다카이치 정권 안에서 여차할 때 정권의 극우 폭주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세력이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적어도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총리가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아펙) 정상회의에서 처음 대면할 것으로 예상되는 30일까지는 한일 갈등이 불거지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지지 기반이 허약한 다카이치 총리가 점차 궁지에 몰리면 극우 성향의 지지층 입맛에 맞는 배외주의·극우 정책을 꺼내 들 가능성이 큽니다. 그때 한일 관계는 큰 시험대에 오를 것입니다.
대중국 정책과 독도 영유권 문제에서 첫 파열음 낼 가능성
저는 한일 사이의 첫 파열음이 양자 관계 외에서는 중국 정책에서, 양자 관계에서는 독도 문제에서 나타날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봅니다. 다카이치 총리는 일본 정치인 중 중국-대만 문제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대만을 지지해 온 정치인입니다. 그래서인지 중국 정부는 여태껏 다카이치 총리 취임 축하 메시지를 내놓지 않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11년 만에 한국을 국빈 방문하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11월 1일 정상회의에서 관계 복원을 추구하는 이재명 대통령으로선 중일 사이의 미묘한 기류를 주시하면서 대처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다카이치 총리는 독도 영유권 문제에서 가장 도발적인 주장을 하는 일본 정치인입니다. 자민당 총재 선거 기간 중에도 시마네현이 조례로 만든 ‘다케시마의 날’(2월 22일) 기념식에 일본 정부가 각료를 당당하게 보내야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한일 관계를 고려해 기념일이 제정된 2013년 이후 13년 연속으로 차관급 인사를 파견해 왔습니다. 그가 내년 초 공언한 대로 실행한다면, 한일 관계는 바로 큰 폭풍 속으로 빠져들 게 분명합니다.
이재명 정권은 ‘아베를 흉내 내지만 절대 아베가 될 수 없는’ 다카이치 정권의 속성을 잘 파악해 대처해야 합니다. 다카이치 정권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은 미리 선을 그어 예방에 나서야 합니다. 그래야 롤러코스터를 타지 않고 한일 관계를 우리 국익에 맞게 주도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