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간 로치데일 방직공들, 협동조합 원칙을 세우다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1844년 12월 21일 영국 북서부 맨체스터 로치데일의 두꺼비 골목(Toad Lane) 31번지. 한 해 중 가장 밤이 긴 날 문을 연 이 초라한 가게는 인류역사를 바꿀 실험의 시작이었다. 진열대 위에 놓인 상품은 단 네 가지뿐이었다. 버터, 설탕, 밀가루, 귀리. 그러나 이것들은 보통의 식료품이 아니었다. 톱밥이 섞이지 않은 밀가루, 물을 타지 않은 우유를 판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혁명이었다.
1865년에 촬영된 로치데일 개척자 중 생존한 13명의 모습. (위키피디아)
톱밥 자본주의의 시대
19세기 중반 영국 북부 공업도시들의 풍경은 참담했다. 산업혁명이라는 그럴듯한 이름 아래, 방직공장 주인들은 이윤을 늘리려고 밀가루에 톱밥을 섞고, 우유에는 물을 탔다. 하루 13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은 번 돈으로 가짜 식료품을 사 먹으며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황금기라고? 누구에게나 황금기였던 것은 아니다.
이 비참한 현실을 바꾸기로 결심한 이들이 바로 로치데일 선구자들이었다. 이들은 방직공장에서 일하던 28명의 직공들로, 극심한 노동조건과 낮은 임금, 그리고 터무니없이 비싼 생필품 가격에 시달리고 있었다. 우습게도 이 28명이라는 숫자도 나중에 알고 보니 신화였다. 협동조합 회의록 어디에도 28명이라는 언급은 없었지만, 이야기는 이미 전설이 되어버렸다. 역사란 때로 정확한 숫자보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선호하는 법이다.
오리지널 두꺼비 골목 상점. (위키피디아)
로버트 오언의 유산
로치데일 선구자들의 이야기는 웨일스 출신 방직공장 주인이자 사회 개혁가였던 로버트 오언(1771~1858)의 사상에서 영감을 받았다. 오언은 스코틀랜드 뉴 래너크의 방직 공장에서 놀라운 실험을 했다. 노동자들의 근무조건을 개선하고, 교육을 제공하고, 아이들이 공장에서 일하는 시간을 줄였다. 당시 상식으로는 미친 짓이었다. 노동자를 잘 대우하면 생산성이 떨어진다 는 게 자본가들의 굳은 믿음이었다.
하지만 오언의 공장은 번성했고, 유럽 각국의 정치인과 개혁가들이 견학을 올 정도였다. 러시아의 차르 니콜라이 1세까지 이 공장을 방문했다. 오언은 심지어 1824년 미국 인디애나주에 뉴하모니라는 공동체를 세워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투자했다. 결과는? 2년 만에 경제적으로 완전히 실패했다. 오언은 자신의 재산 80%를 잃었다.
이상주의자의 비극이랄까. 하지만 그의 사상은 죽지 않았다. 로치데일 선구자들 중 찰스 하워스(1814~1868)는 오언주 지부의 지역 지도자였고, 제임스 데일리는 오언주의 지부 서기 중 한 명으로 새로운 협동조합의 첫 서기가 되었다.
윌리엄 헨리 브룩이 그린 로버트 오언의 초상화. (위키피디아)
찰스 하워스, 협동조합 원칙의 설계자
찰스 하워스(1814~1868)는 1814년 2월 9일 로치데일에서 태어나 1868년 6월 25일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방직공장의 날실 감는 일꾼(warper)이었던 그는 10대 때부터 오언주의 사회주의자로 정치화 됐다.
하워스의 가장 큰 업적은 바로 배당금(dividend) 제도의 고안이다. 협동조합 회원들의 구매액에 비례해서 이익을 돌려주는 이 원칙은 하워스가 개발한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전 세계 소비자 협동조합들이 따르는 이 원칙이 탄생한 순간이다.
1944년 베네수엘라 정부는 로치데일 선구자들 창립 100주년을 기념해 찰스 하워스의 초상이 들어간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영국도 아닌 베네수엘라가? 그만큼 협동조합 운동이 전 세계로 퍼졌다는 증거다.
하지만 이 위대한 개혁가의 말년은 비참했다. 아홉 명의 자녀를 둔 가장이었던 그는 평생 남들의 복지를 자신의 복지보다 우선시했다. 그런 그는 1860년대 중반 방직 일을 그만둔 후 가난 속에서 살다가 천식으로 사망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타주의자가 맞이하는 전형적인 결말이랄까.
찰스 하워스 1865년. (위키피디아)
공정한 사회의 원칙들
로치데일 선구자들이 세운 원칙은 오늘날까지 협동조합의 기본이 되고 있다. 1844년에 처음 만들어진 로치데일 원칙은 1937년 국제협동조합연맹에서 공식 채택되었고, 1966년과 1995년에 개정되었다.
그 핵심원칙들은 이렇다:
자발적인 회원가입: 누구나 차별 없이 참여할 수 있다.
운영(1인 1표): 돈 많이 낸 사람이 더 큰 목소리를 내는 게 아니다.
비례한 이익배분: 주식 지분이 아니라 실제 이용에 따라.
제한적 이자: 돈이 돈을 버는 구조를 제한한다.
종교적 중립: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다.
외상금지: 빚의 악순환을 막는다.
교육: 조합원과 대중의 교육을 중요시한다.
21세기에서 보면 당연한 이 원칙들이 1844년에는 얼마나 급진적이었는지 상상이나 되는가? 특히 협동조합은 여성이 재산을 소유할 수 있게 한 최초의 조직이다. 남편의 허락 없이 여성이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 이익을 배분받을 수 있다니! 빅토리아 시대 신사 숙녀들이 기절할 노릇이었다.
로치데일 선구자들 영화 포스터. (위키피디아)
영국을 넘어 세계로
결과는 어땠을까? 첫해 말에 이들은 회원 80명과 182파운드의 자본을 확보했다. 정확히 1년 후에는 74가구가 회원으로 가입했고, 181파운드의 자본을 모았으며, 710파운드의 매출에 22파운드의 순이익을 냈다. 당시 평균 주급이 1파운드였으니 작은 성공이었지만 의미는 컸다.
1900년까지 영국 협동조합 운동은 1439개의 협동조합으로 성장해 사실상 영국 전역을 아우르게 되었다. 오늘날 95개국에 10억 명의 협동조합원이 있다. 톱밥 섞인 밀가루에 분노한 28명(아니,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의 방직공들이 시작한 운동이 전 세계로 퍼진 것이다.
한국에도 생협과 신협, 협동조합들이 있다. 은행이 대출을 거부한 서민들에게 손을 내밀고, 대형 마트가 들어설 수 없는 마을에서 장을 보게 하고, 농민들이 정당한 가격을 받을 수 있게 돕는다. 로치데일의 정신은 21세기 한국에서도 살아 숨 쉬고 있다.
로치데일 선구자들에 관한 책. (필자 소장)
톱밥 없는 세상을 꿈꾸며
로치데일 협동조합은 독자적으로 운영되다가 1991년 유나이티드 협동조합으로 통합되었고, 2007년에는 전국 규모의 협동조합 그룹으로 흡수되었다. 두꺼비 골목 31번지의 첫 가게는 1867년에 이사했지만, 협동조합 운동은 나중에 이 건물을 다시 사들여 1931년 박물관으로 개관했다. 지금도 방문할 수 있다.
로치데일 선구자들의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소수의 탐욕이 다수의 고통을 만들 때, 다수가 연대하면 공정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 톱밥 섞인 밀가루를 팔던 자본가들은 역사의 각주가 되었지만, 정직한 밀가루를 팔기로 결심한 방직공들은 전설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먹는 음식에도, 쓰는 물건에도, 이용하는 서비스에도 보이지 않는 톱밥이 섞여 있지 않은지 질문해야 한다. 그리고 28명이 할 수 있었다면 우리도 할 수 있다. 정확히는 28명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게 중요한가. 중요한 것은 시작했고,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180년이 지난 지금도 로치데일의 정신은 유효하다. 1인 1표, 공정한 배분, 민주적 운영. 거창해 보이지만 결국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우리가 함께하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
톱밥 자본주의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오늘, 로치데일 선구자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그것은 현재진행형의 투쟁이고, 미래를 향한 희망이다. 두꺼비 골목에서 시작된 작은 불꽃이 세계를 밝힌 것처럼, 우리의 작은 실천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자, 이제 장바구니를 들고 가까운 생협으로 가볼까. 톱밥 없는 밀가루를 사러.
로치데일 선구자들 당시의 간판. (village.one)
* 참고: 로치데일 선구자 박물관(The Rochdale Pioneers Museum)은 영국 로치데일의 두꺼비 골목 31번지에 위치하며, 2019년부터 협동조합 유산 신탁(Co-operative Heritage Trust CIO)이 운영하고 있다.
로치데일 선구자 박물관. (visitrochda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