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의 한글철학 ⑱] 큰 슬기 졔 건넴 ᄆᆞᆷ줄, 반야심경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나는 무엇인가 나라는 것을 찾으려면 나 속에 들어가야 한다. 가까운 이웃 친구 친척 거기서 나를 찾을 수 없다. 오직 내 안에서 생각해서 나를 찾을 도리밖에 없다. ‘나라는 것은 마침내 있다’고 하고 싶다. ‘나는 있다’는 것이 버릇이 되었는데 확답은 못한다. 오직 한 분밖에 안계신다. 절대를 향하여 형이상하(形而上下)로 나아가려고 애쓰는 나가 있는 것이다.” - 『다석어록』에서
다석 류영모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우리말로 옮겼다. 순우리말로 풀었다. 한문으로 된 260자를 뜻글로 풀었다. 이어적기를 쓰되, 입말로는 맞춤법에 어긋나지 않도록 했다. 글씨 하나하나가 다 뜻을 가졌다. 놀라운 일이다.
다석은 성불(成佛)하기를 바라면 그 길을 단단히 붙잡아야 한다. 이것이 진리파지다. 성불하는 이치가 있으면 그것을 기어이 깨닫고야 말겠다고 염원하는 것이 염불이다. 염불한다는 것은 부처의 이름만 부르는 것은 아니다. 만일 깨닫는 이치가 있으면 꼭 붙잡고 그 이치를 자리에게 까는 것이 염불이며 신앙이다.”라고 했다. ‘반야심경’은 그에 걸맞는 염불이다. 욈이다.
다석은 또 석가가 6년 고행을 한 것은 나를 의심해서다. 나를 의심하다가 이 나라는 것이 참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영원 절대의 참나를 깨닫게 된다. 그게 성불하는 것이다.”라고도 했다. 끊임없이 ‘나’를 의심하는 일이 필요하리라.
그림1)석굴암이다. 본존불 뒤로 부처의 열 제자의 모습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법화경’의 각 품에서 기록한 순서대로 새겼다. 사진출처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이다.
그이가 『태극도설』, 『노자』, 『중용』, 『반야심경』, 『천부경』등을 우리말로 옮긴 것은 ‘하나’를 찾기 위해서였다. 다석은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서 지나간 무지(無知)를 바로 보고 잊은 전체를 찾아야 한다. 하나를 찾아야 한다. 하나는 온전한다. 모든 것이 하나를 얻자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하나를 얻는가. 큰나(大我) 속에 이것이 있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곧 대아중(大我中)에 드는 것이다. 큰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했다.
다석이 말하는 큰나(大我)는 우주 ‘밑둥’(本體)의 참나를 뜻한다. 또한 그것은 우주의 오롯한 하나이다. 예수붓다는 ‘하나’를 믿은 ‘ㅣ’다. 함께=없께”라고 했듯이 온 우주가 하나로 돌아가지만 늘 바뀌고 뒤바뀌면서 돌아가니 ‘없’(無=虛=空)의 무늬만 남는다. 그 자취에 ‘있’(存在)의 껍질이 있을 뿐이다.
그이는 나는 영원한 생명줄이 우리 앞에 드리워 있다. 이 목숨줄은 이 몸이 죽어도 안 끊어진다. 이것은 나의 절대신앙이다. 이 생명줄은 영원히 안 끊어진다. 그게 참이다. 이 생명줄이 성명(性命)이다. 불성(佛性)이다. 하늘땅이 갈라진다 하여도 끄덕 않는다. 나는 염불(念佛)을 하는 건지 크리스천인지 모른다. 신앙인지 철학인지 모른다. 나 아닌 남이 해준다는 건 믿지 말라.”라고 했다. 자, 이제부터 ‘반야심경’을 생명줄로 삼고 염불해 보자.
그림2) 다석이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우리말로 바꾸었다. 다해서 600권이 되는『반야경(般若經)』(혹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라 한다)을 당나라 현장 법사가 260자(字)로 추린 것이다. 『반야경(般若經)』의 앞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婆羅密經)’인데, 줄여서 ‘금강경’(金剛經)이라고 한다. 『반야경(般若經)』의 뒤가 ‘반야심경’이다.
온 세상의 법(法)이 참으로 참되어 참된 ‘참꼴’(眞實相)을 알아차리는 빛눈은 아주 슬겁고 큰 슬기 ‘밝’에 있다. ‘큰 슬기 밝’이 곧 지혜(智慧)다. 귀 밝고 눈 맑아야 슬기롭다.
바른 올이 한꼴로 돌아가야 법이 제대로다. 그리 돌아가는 제대로를 ‘길올’(道理)이라 한다. 길이 올바른 까닭이다. 그 ‘길올’을 한통으로 꿰뚫어 알아차리는 알맞이 힘이 반야[般若: 프라즈냐(prajñā), 빤냐(paññā)]다.
큰 슬기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뚫어 아는 ‘첫비롯’(根源)의 산알 빛이다. 맨첨에 비롯하는 산알 빛의 슬기는 이쪽저쪽 따위가 없다. 저이(彼此) 없는 가온데를 똑바로 뚫어 아는 앎이요, 그 어떤 막힘도 없이 끊어 밝히는 숨벼락이다. 숨벼락 빛숨이요, 빛눈이요, 빛알이다. 빛무리, 햇무리(幻日)가 찬란하다. 빈탕에 비롯하는 벼락 슬기에 반야가 솟는다.
‘참꼴’을 꿰뚫는 참의 숨벼락이 터졌으니 이제 있는 그대로의 ‘참나’(眞我)이리라. ‘좀나’(小我)를 벗으니 안팎도 없고 겉속도 없는 ‘큰나’(大我)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그이의 마음(心)은 ‘맘’이 아니라 ‘ᄆᆞᆷ’이다. 다석은 늘 ‘맘’과 ‘ᄆᆞᆷ’을 가려서 써야 한다고 했다.
앞글 ‘다석의 한글철학⑥’에 가져다 썼듯이 다석은 맘과 ᄆᆞᆷ을 가려서 쓰고 싶다. 맘이란 아직 상대적인 세상에 욕심을 붙여서 조금 약게 영생하는 데 들어가려는 것이다. ᄆᆞᆷ이란 모든 욕심을 다 떼어 버리고 자신을 세워 나가겠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몸’이라는 글씨를 보라. 땅(ㅡ)이 가운데 박혀있다. 몸뚱이를 가지고 태어난 몸은 이미 땅이다. 그런데 그런 산 몸뚱이에 또 땅을 박아 넣은 글꼴이 ‘몸’이다. ‘맘’은 몸에 갇힌 마음이요 ‘ᄒᆞ고ᄌᆞᆸ’(欲)이 마구 돌아가는 ‘제나’(私私: ego)의 마음이다. ‘ᄆᆞᆷ’은 몸에서 땅(ㅡ)을 쏙 빼버린 글꼴이다. 몸에 갇힌 ‘땅’이 빠지니, ‘뜻태우’의 하늘 몸이다.
맘은 항상 궁신(窮神)하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 신을 알려는 것이 궁신이다. 신이 딴 것이 아니다. 우리들이 바로 신이다. 궁극에는 내가 신이 되겠다는 것이 아닌가. 신의 자리에 간다는 말이다. 정신이란 곧 궁신하겠다는 것이다.”
다석 류영모
‘ᄆᆞᆷ’은 스스로 들임 받아 저절로 모신 하늘 몸이요(땅 몸에 하늘 숨이 열렸다), 수운이 시천주(侍天主)로 말씀 세우신 땅하늘(地天)이요[하늘땅(天地)을 뒤집어 땅하늘(地天)으로 돌리는 것이 ‘다시개벽’이다. 천지비(天地否)를 지천태(地天泰)로 바꾸어야 한다.], 웋이 한꼴로 돌아가는 가온찌기다.
‘함께=없께’라고 했듯이 가온찌기 가온데 돌아가는 ‘⚫’은 가온꼭지(核心)로 하늘 ‘숨’(氣)이다. 하늘 하나 ᄒᆞ실이다. 그 자리는 ‘없극’(無極)이요, ‘큰극’(太極)이다!
그림3) 팔만대장경의 반야바라밀다심경 인쇄본이다. 13세기에 제작되었고, 글씨는 총 260자이다.
‘ㅣ’가 ‘ㅣ’를 스스로 내고 저절로 낳고 이어서 제절로 되고 제대로 이루는 ‘있다시 온’(如來)이다. 있는 그대로 늘 저절로 솟아나는 ‘ㅣ’가 ‘ᄆᆞᆷ’에 있다. 다석은 그이를 가온 뚫림(中)으로 보았다. ‘ㅣ’가 여래의 씨앗 곧 여래장(如來藏)이다.
‘경’(經)은 날실이다. 하늘땅에 땅하늘이 맞붙어 돌아가는 실낱의 줄이 ‘경’이다. 줄줄줄 잇닿아 있으니 그 줄이 땅에 하늘 말씀을 심는다. 땅의 씨줄이 말씀을 휘감아 숨빛을 틔운다. ‘ᄆᆞᆷ줄’은 가온 뚫림에 고디 선 숨벼락이다. 참숨이 트이고 참나가 깨이고 참꼴이 나는 숨벼락!
그래서 ‘ᄆᆞᆷ줄’을 ‘심경’(心經)이라 한다.
‘큰 슬기 ᄆᆞᆷ줄’은 그러므로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뜻하는 속 깊은 우리 말이다. 그런데 ‘졔’와 ‘건넴’은 왜 넣었을까?
예 : 여, 여기 : 이 세상 : 이승 : 차안(此岸) : 카르마의 세계
졔 : 저, 저기 : 저 세상 : 저승 : 피안(彼岸) : 니르바나의 세계
‘예’가 있으니 ‘졔’가 있을 따름이다. 다석이 ‘졔’라고 쓴 것은 그런 뜻이다. ‘건넴’은 옮기는 것이요, 말 붙이는 것이요, 건너는 것이다. ‘큰 슬기 밝’은 ‘예’를 여의고 ‘졔’로 건너는 ‘ᄆᆞᆷ줄’이다. 아니, ‘예’에 ‘졔’를 깨우는 벼락 번개다.
‘이’에 ‘저’를 깨우는 빛숨의 숨벼락이 큰 슬기 밝의 ᄆᆞᆷ줄이다! ‘이저’를 한꼴로 빛 세우라!
‘졔’는 몸뚱이 죽어서만 가는 세계가 아니다. 살아서 깨워야 산알 빛이 난다. ‘뜻태우’로 빛난다. 스스로 빛나는 ‘ㅣ’다. 그러면 이제부터 있는 그대로의 ‘ᄆᆞᆷ’을 가진 ‘ㅣ’로 살리라. 숨빛이 돌아가는 자리에 늘 ‘있다시 온’(如來)이 뵈리라. 그냥 뵈어 보이리라.
그냥 뵈어 보이는 ‘있다시 온’을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 한다. 다석은 그이를 ‘잇다시보이보살’이라 했다.
다석의 말이다.
말씀밖에 믿을 게 없다. 말씀이란 게(彼岸, 니르바나)서 오는 말씀이다. 태초의 말씀이다. 태초의 말씀 그것이 아들이다. 부처의 생명이 태초의 말씀이다. 니르바나는 고요히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印)치듯 교훈하신다. 존재의 소리가 들려온다. 니르바나의 말씀은 막을 길은 없다. 기도할 때나, 잠잘 때나, 끔 속에서 말씀하신다. 존재의 소리를 들어라. 그것이 인생을 멸망에서 구원하신다. 니르바나의 말씀은 공상(空想)이 아니다. 진실이다. 구체적이다. 얼이 통한다. 내가 생각을 했는데 나도 모르는 것을 보면 내 생각은 니르바나로부터 오는 것 같다. 나오기는 나에게서 나오는데 오기는 니르바나에서 온다. 나오는 것은 생각이고 오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다. 내가 낳았는데 나를 안 닮았다. 팀진치가 없다. 니르바나를 닮았다. 달걀 무정란은 썩는다. 씨는 니르바나에서 온다. 말씀은 니르바나에서 온다. 니르바나에서 온 것을 여래(如來)라고 한다.”
그림4) 다석이 ‘반야심경’의 첫 글월을 우리말로 푼 것이다. 본디 글은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 오온개공 도일체고액(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 五蘊皆空 度一切苦厄”이다.
먼저 ‘잇다시 보이보살’은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를 우리말로 바꾼 것이다. 아니 ‘잇다시 보이보살’을 그리 바꾼 것일 수도 있다. ‘잇다시’는 무슨 말일까?
이어 이어 잇는 잇을 ‘있’(有:存:在)이라 한다. ‘있’은 이어 잇는 잇으로 ‘잇잇’을 이름이다. 있을 ‘유’(有)는 달 가짐이요, 있을 ‘존’(存)은 아이 가짐이요, 있을 ‘재’(在)는 씨앗 가짐이다. 달이 해를 가져도(日蝕) 한순간이요, 아이를 가지고 보살펴도 한순간이요, 씨앗이 나서 자라도 한순간이다. ‘있’은 그저 한순간일 뿐이다.
이어 잇는 잇이니 ‘잇다’이고, 그 ‘잇’이 이어 이어 이어지니 ‘잇다시’라고 썼다. 아주 순수한 존재의 씨앗이 이어 이어 이어지고 있다. 저절로 이어지고 계시는 이다. 그래서 스스로 있는 ‘ㅣ’의 뜻을 담아 ‘자재’(自在)라고 하였다. 그러니 ‘ㅣ’는 끊이지 않고 오시는 ‘있’의 순수한 ‘있바탈’(存在性)이라고 해야 하리라.
‘보이’라는 말은 뵈어 보여서 보는 봄을 뜻한다. 내가 보려고 보는 봄이 아니다. 보려는 의지를 가지고 보는 봄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나타나 보여서 보는 봄이요, 드러나 보여서 보는 봄이요, 어쩔 수 없이 보는 봄이다. 내가 보려고 보는 봄은 견(見)이요, 저절로 보여서 보는 봄은 관(觀)이다. 드러나고 나타나는 뵘이다.
‘관(觀)하라!’는 말은 제 안에 ‘있다시 온’으로 모신 ‘ㅣ’에 눈뜨라는 말이다. ‘잇다시’는 그렇게 저절로 드러나고 나타나서 오시는 ‘ㅣ’다. 그래서 ‘보이’라고 썼다. 눈부신 ‘ㅣ’에 눈떴는가? 찬란하게 빛나는 ‘ㅣ’와 마주하시라.
‘보살’(菩薩)은 보리살타(菩提薩埵), 보디삿따(Bodhisatta)의 줄임말이다. 보리(Bodhi)는 ‘깨달음’이요, 살타(Sattva)는 ‘이/있’(存在)의 뜻이다. 보살은 ‘깨달음을 쫓아가는 이’, ‘깨달음을 이루려는 마음을 지닌 이’로 풀 수 있다.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는 산스크리트어 ‘프라즈냐파라미타(Prajñāpāramitā)’를 한자로 음차한 말이다. 이쪽저쪽에 사로잡히지 않는, 그러니까 저이(彼此)가 끊어진 ‘오롯한 슬기 밝(완전한 지혜)’, ‘오롯한 슬기 밝 이룸(지혜의 완성)’을 뜻한다. 바라밀은 흠없는 끝이요, 그 끝을 이룸이다.
‘깁히’(深)는 ‘깊이’를 다르게 쓴 것이다. ‘깊’의 끝소리 ‘ㅍ’는 옆으로 퍼지는 소리요, ‘깁’의 끝소리 ‘ㅂ’은 위아래로 솟는 소리다. ‘깁히’라 했으니 끝소리 ‘ㅂ’과 첫소리 ‘ㅎ’은 ‘ㅍ’소리를 낸다. ㅂ+ㅎ=ㅍ. 다석은 ‘깊이’의 소리값을 헤치지 않으면서 더 깊고 깊은 뜻은 나타내기 위해 ‘깁히’라고 썼다.
‘갓슬적에’(行-時)의 맞춤법은 ‘갔을 적에’이다. 여기서는 어떤 장소에 ‘갔을 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오롯한 슬기 밝’에 ‘깁히’ 들어갔던 때를 말한다. ‘갓슬’은 ‘갔을’을 이어적기로 쓴 것이다. 왜 그랬을까?
우리말 ‘스다’는 ‘서다’의 뜻이고, ‘서슬’은 칼날의 끝이요, ‘슬기’의 옛말은 ‘슬긔’로 지(知/智)와 지혜(智慧/知慧)를 뜻한다. ‘갓슬’은 ‘서슬’이나 ‘슬기’보다는 ‘스다’의 뜻에 가까워 보인다. 지금 말로 풀면, ‘깊이 가서 섰을 적에’로 보이는 까닭이다. 그 뒤를 계속 이어보자.
그림5)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이다. 보물 제1426호이다. 관음보살 또는 관세음보살이 곧 관자재보살이다. 물달(水月)은 맑고 고요한 마음을 뜻한다. 깊은 고요에 든 관음보살을 찾은 선재동자가 보살에게 진리를 구하는 장면이다.
‘다섯러미’는 오온(五蘊)의 풀이다. 나서 죽고 뒤바뀌는 것들로 색(色:빛)·수(受:받)·상(想:끎)·행(行:가)·식(識:알)을 말한다. 색온(色蘊)·수온(受蘊)·상온(想蘊)·행온(行蘊)·식온(識蘊)이라고도 부른다. 합용병서 ‘ㅅㄱ’은 된소리가 되었으므로 ‘ㄲ’로 쓴다. ‘다섯꾸러미’로 쓰면 알맞다. 다섯꾸러미는 ‘몸뚱이’로 ‘제나’를 이름이다. 한마디로 ‘제나’는 이 다섯꾸러미로 되어 있는 것이다.
‘다 뷤을 비춰 보고’은 조견-개공(照見-皆空)의 풀이다. 앞서 말했듯이 견(見)는 내가 보고 싶어서 보는 것이다. 이 글에서 살펴 볼 것은 ‘뷤’(空)이다.
‘뷤’은 비다, 븨다, 뷔다의 이름씨 꼴(名詞形)이다. 이 말들은 비다, 비게 되다, 보이다, 베다의 뜻을 가진다. 다석은 이 모든 뜻을 하나로 모아서 뭉쳤다. 공(空)은 단지 텅 비어 있는 게 아니다. 모든 잘몬(萬物)은 시나브로 야물어 가기 때문에 뒤바뀌지 않는 실체 따위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어떤 것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찰나의 매순간에 빛나는 한올이 있다. ‘있바탈’(存在性)로 나서 자라는 한 씨앗이 있다. 한 생을 살아가는 그 짧은 찰나에 스스로의 무늬를 만드는 ‘있’(存在)이 있다. 삶은 나이테와 같아서 제 스스로의 무늬로 ‘뷤’을 이룬다. 이 빛나는 ‘뷤’을 나이테라는 겉껍질이 싸고 있다. 굽어 곧은 ‘뷤’이 곧 ‘ㅣ’의 있다시 온이다.
‘건넛다’는 ‘도’(度/渡)의 풀이다.
‘온갖 쓴걸림’은 ‘일체고액’(一切苦厄)의 풀이다. ‘온갖’은 일체(一切)의 풀이요, ‘쓴’은 고(苦)의 풀이요, 걸림(厄)의 풀이다. 고(苦)는 쓰디 쓴 맛이고, 액(厄)은 멍에라는 걸림이다. 그리니 ‘쓴걸림’을 고액(苦厄)이라 하는 것이다.
다석은 이런 말을 했다. 지름길로 가는 것은 협잡꾼이다. 살기는 너른 데서 서기는 바른 데서 가는 길은 환히 넓은 길로 뜻대로 되면 씨알과 함께 가고 뜻대로 안 되면 나 혼자서 가련다. 맹자의 이 말은 훌륭한 바이블이다. 성경 말씀 안될 게 없다.”라고.
그림6)다석이 ‘반야심경’의 두 번째 글월을 우리말로 푼 것이다. 본디 글은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이다.
‘눈맑안이아’는 ‘사리자’(舍利子)를 우리말로 바꾼 것이다. 사리자는 ‘사리의 아들’이란 말이며, 사리자는 부처의 제자 가운데 가장 지혜로웠다. 사리불의 어머니 사리(舍利)는 매의 눈을 가졌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사리(舍利)는 부처의 사리골(舍利骨)을 뜻하기도 한다. 다석은 ‘큰 슬기 밝’(般若)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눈맑은 이’라고 풀었다.
빛이 뷤과 다르지 안코,
/ 색불이색色不異空
뷤이 빛과 다르지 안다.
/ 공불이색空不異色
그림7)사리불(舍利弗)이다. 석굴암에 새겨진 첫 번째 제자이다. 산스크리트어로 사리푸트라(Śāriputra) 또는 팔리어로 사리풋다(Sāriputta)라 불린다. 사리불은 석가의 열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지혜제일’이라고 불렸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사리자가 바로 사리푸트라(사리불)이다.
‘빛’은 색(色)이요, ‘뷤’은 공(空)이다. ‘빛’과 ‘뷤’ 모두 ‘비’(虛)에서 비롯한다. 색(色)이 드러나는 것은 ‘빛’ 때문이다. 색은 ‘몸’(身)이나 ‘몬’(物)이 아니다. 본디 빛이다. 빛이 있어 몸과 몬이 드러난다.
빛이 바로 이 뷤,
/ 색즉시공色卽是空
뷤이 바로 이 빛.
/ 공즉시색空卽是色
받․끎․가․알이 한 다시 이 가트다.
/ 수상행식 역부여시受想行識 亦復如是
다섯꾸러미 오온은 ‘빛․받․끎․가․알’이다. 다섯꾸러미가 한 줄기로 이어져 온생명을 이룬다. 다섯의 하나는 빛(몸)이요, 다섯의 넷은 마음이다. 빛으로 드러난 몸이 있고, 마음으로 ‘받․끎․가․알’이 있는 것. 벌거벗은 몸은 우주 땅구슬(地球)이 짓고 일으키는 변화무쌍의 바람 속에서 오롯하다. 온몸의 살로 느껴야 화들짝 깨인다.
몸의 그물코인 마음은 바깥으로부터 받아 느껴 일으키는 하고픔(受), 받은 느낌이 꿈꿍(夢想) 꿍꿍(想像)으로 피어서 눈뜸으로 두루 번지는 끌림(想), 하는 짓짓이 꼴짓으로 나아가면서 드러내 이루는 움직임(行), 깨어서 몸․마음․세상이 한 그물로 이어져 있음을 알아챔(識)이다. 몸과 마음이 뫔으로 갈마들어 깃들어야 산숨(生命)의 사람이 살아진다. 나고 사는 사람의 삶은 늘 오온일 수밖에 없다. 몸맘이 뫔으로 짜이고 서로 이어져야 올바르기 때문이다. 오온은 결코 따로따로 돌아가지 않는다.
또한 오온은 쉬지 않고 그치지 않고 멈추지 않는다. 늘 지금 여기를 사는 늘(常)의 변화무쌍이기에 자기 동일성도 갖지 않는다. 잠깐, 그리고 잠깐, 아주 잠깐, 그 사이 사이에 온갖 것들이 나고 되고 살고 죽고 나지 않는가. 하지 않으면서도 다되고 이룬다. 스스로 저절로 있는 그대로의 늘이다. 그치고 멈추면 여기서 저기로 넘어선다. 넘어선 자리에 때빔(時空)이 환하다.
다석은 이렇게 말했다. 앉아 있는 부처의 모습은 참에 가까운 상이다. 인도에서는 앉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참선이 그것인데 앉아서 아주 완전에 들어가려는 것이다. 석가는 6년 수행 마지막에는 자신이 깨닮음을 얻기 전에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밤낮없이 앉은 채 마귀잡념과 싸워 마침내 「금강경」을 내어 놓을 수 있도록 아주 좋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앉는 일에 골몰하는 이는 성불할 수 있을 것이다. 자주 깨어나겠다는 일이 부처가 될 사람의 일이다. 성경의 가르침도 깨야한다는 것이다.”
그림8)다석이 ‘반야심경’의 세 번째 글월을 우리말로 푼 것이다. 본디 글은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이다.
‘눈맑안이아’는 ‘사리자’(舍利子)의 풀이다.
다석의 옛글 쓰기를 그대로 쓸 수 없는 글들이 있으니 그것들은 지금 말로 고쳐서 보겠다. 나머지는 그대로 두었다. 합용병서 ‘ㅅㄱ’는 된소리 ‘ㄲ’로 바꾸었다.
이 모든올 뷤보기는 나토 안코, 꺼지도 안코.
/ 시제법공상불생불멸是諸法空相不生不滅
때끼도 안코, 깨끗도 안코.
/ 불구부정不垢不淨
늘도 안코, 줄도 안는다.
/ 부증불감不增不減
‘모든올’은 제법(諸法)의 풀이다. ‘올’은 ‘법’(法)이다. ‘올바르다’의 그 ‘올’이다. ‘나토 안코’는 ‘낳도 않고’이고, ‘꺼지도 안코’는 ‘꺼지도 않고’이다. 이어적기로 풀었다. ‘않’보다는 ‘안’이 ‘불’(不)의 뜻에 더 가깝다.
다석은 나는 절대공(絶對空)을 사모한다. 죽으면 어떻게 되나 허공이 된다.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이라야 참이 될 수 있다. 두려운 것은 허공이다. 허공이 참이다. 이 허공이 나르바나다. 허공없이 진실이고 실존이고 어디 있는가. 우주가 허공없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허공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단일 허공, 절대 허공에 색계(色界)가 눈에 티검지 같이 섞여 있다. 우리가 쉽게 있다는 존재를 허공으로 알아서는 안된다. 허공은 우리의 오관(五官)으로 감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허공은 무한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토 안코 = 낳지도 않고
꺼지도 안코 = 꺼지지도 않고
때끼도 안코 = 때끼지도 않고
깨끗도 안코 = 깨끗하지도 않고
늘도 안코 = 늘지도 않고
줄도 안는다 = 줄지도 않는다
이런 뜻이지만, 다석은 ‘낳’, ‘꺼짐’, ‘때낌’, ‘깨끗’, ‘늘’, ‘줄’의 우리말에 ‘~도 안코’로 운율을 맞추었다. 한문이 운율을 맞추어 쓰듯이 한글도 그리써야 보고 읽는 맛이 있다. 위에서 푼 글들도 글자 수와 운율을 맞추었다.
그림9) 다석이 ‘반야심경’의 네 번째 글월을 우리말로 옮겼다. 본디 글은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이다.
지금 쓰는 말로 고쳐서 옆으로 붙이면 이렇다. 이번에는 맞춤법으로 바꾸어 보겠다.
이러므로 뷘속엔 빛 없고 받 ․ 끎 ․ 가 ․ 알도 없고.
/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눈 ․ 귀 ․ 코 ․ 혀 ․ 몸 ․ 뜻도 없고.
/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빛 ․ 소리 ․ 냄새 ․ 맛 ․ 맨지 ․ 올도 없고.
/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
눈계도 없고, 뜻알계까지도 없고.
/ 무안계 내지무의식계無眼界 乃至無意識界
어둠도 없고, 또한 어둠 다함도 없고, 늙어죽음도 없고,
/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이 글에서 특별히 되새겨 볼 부분은,
눈-빛
귀-소리
코-냄새
혀-맛
몸-맨지
뜻-올
로 연결한 말들이다. ‘몸-맨지’, ‘뜻-올’로 이은 것은 아주 탁월한 선택이다. 또한 ‘무의식계’(無意識界)를 ‘뜻알계’로 썼다. 의식이란 ‘뜻알’인 셈이다. 뜻을 알아차리는 것. 뜻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늘 깨어있어야 할 터이다. 늘 깨어있어야 그것들에 사로잡히지 않고 ‘없’(無)에 이를 수 있다.
다석은 몸의 나란 심부름꾼으로 부려먹으라고 준 육근(六根)을 가진 한 몸뚱이로 된 기계다. 육근의 몸은 심부름꾼이지 나가 아니다. 여기에 내가 팔려선 안된다.”라고 하면서 불이(不二)면 즉무(卽無)이다. 둘이 아니면 곧 없다는 말이다. 상대(相對)가 없으면 절대(絶對)다. 절대는 무(無)다. 상대적 유(有)도 상대적 무(無)도 아닌 것이 불이(不二)다. 불이(不二)는 무이(無二)라 해도 좋다. 불이(不二)면 무이(無二)다. 우리가 참으로 ‘불이즉무’하면 상대세계에서의 종 노릇을 벗어날 수 있다.”라고 했다.
그림10) 다석이 ‘반야심경’의 다섯 번째 글월을 우리말로 옮겼다. 본디 글은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이다.
쓰고 쓴 맛이 ‘고’(苦)이다. 모이고 모으는 모듬이 ‘집’(集)이다. 없애고 꺼서 꺼지는 것이 ‘멸’(滅)이다. 온통으로 뚫어 밝히는 길이 ‘도’(道)이다. 그래서 ‘쓴․몯․끄․길’(苦集滅道)이라 하였다. 도대체 ‘뷘’(空)에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 텅 비어 빈 빈탕의 자리에는 앎(智)도 없고 얻을(得) 것도 없다.
다석은 어머니 배에서 나온 자아(自我)가 참나가 아니다. 속알이 참 나다. 겉몸은 흙 한 줌이요, 재 한 줌이다. 그러나 속알은 하늘나라를 세울 수 있다. 그것은 한없이 크고 한없이 강한 나다. 지강지대(至剛至大)한 나다. 놓으면 우주에 꽉차고 잡으면 가슴에 들어서는 나다. 이것이 호연지기(浩然之氣)의 나다. 이 나는 성령의 얼나다. 이 참나가 자라는 것이 정말 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림11) 다석이 ‘반야심경’의 여섯 번째 글월을 우리말로 옮겼다. 본디 글은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以無所得故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罣礙 無罣礙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이다.
맞춤법으로 바꾸어 보겠다.
얻음이 없음으로써 보리살타가 반야바라밀다로 말미암아,
ᄆᆞᆷ의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무서움 있을게 없어서
거꾸로 박힌 꿈꿍에서 멀리 떠났다.
다석은 말한다. 우리는 미혹(迷惑) 몽환광(夢幻狂)의 상태에 빠지면 안된다. 저만 잘 먹고 살겠다는 사람들 권세 잡고 떵떵거리고 싶어하는 사람들 이들의 이기적인 행동은 죄악이다. 진리 아닌 데서 나온 생활이다. 크게 조심해야 한다. 이 세상이란 이게 분명히 꿈이지만 꿈인 줄 알지만 아무리 깨려고 해도 꿈 속에는 못깬다. 우리의 이 끔은 죽어야 깬다. 그런데 꿈인 줄 알고 꾸면 참 좋다. 종교 신앙이란 좋은 꿈을 꾸는 거다. 좋은 사상은 좋은 꿈이다. 이미 꿈인 줄 알고 꾸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웃을 수 있다.”라고.
그림12) 다석이 ‘반야심경’의 일곱 번째 글월을 우리말로 옮겼다. 본디 글은 구경열반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 고득야뇩다라삼먁삼보리 고지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究竟涅槃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 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故知 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이다.
맞춤법으로 바꾸어 보겠다.
마지막 열반 셋계 모든 부처가
/ 구경열반 삼세제불究竟涅槃 三世諸佛
반야바라밀다로 말미암아
/ 의반야바라밀다依般若波羅蜜多
아누다라삼약삼보리를 얻었으므로
/ 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고지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故知
반야바라밀다가 이 크게 신통한 욈,
/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이 크게 밝은 욈,
/ 시대명주是大明呪
이 위 없는 욈,
/ 시무상주是無上呪
이 담없는 댐 욈으로
/ 시무등등주是無等等呪
온갖 씀을 젖힐 수 있음이
/ 능제일체고能除一切苦
참이고 거짓 아님을 앎으로.
/ 진실불허眞實不虛
마음에 새겨 둘 말들은 ‘욈’(呪)이다. 바라는 대로 되어 달라고 비는 욈이 곧 주문(呪文)이다. ‘반야심경’은 외는 욈이다.
대신(大神)은 크고 큰 신통함이니, 반야바라밀다가 그리 욈이요.
대명(大明)은 발끈 솟은 밝음이니, 반야바라밀다가 그리 욈이요,
무상(無上)은 더할 수 없는 위이니, 반야바라밀다가 그리 욈이요,
무등등(無等等)은 담없는 댐이니, 반야바라밀다가 그리 욈이다.
담없는 댐이란, 견주어 비할 바 없이 크고 높다는 뜻이다. ‘담’은 담벼락이요, ‘댐’은 ‘견주어 빗대다’라는 뜻이다. ‘담’이 없는데 무엇으로 빗댈 수 있다는 말인가!
다석은 예수나 미륵불을 기다리지 말라. 그것은 헛일이다. 불성은 영원히 오시는 분이다. 구경(究竟)은 생명 전체를 이루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이 오줌 똥으로 가득찬 이 더러운 땅 예토(穢土)를 넘어서야 정토(淨土)에 들어간다. 정토가 천국이요 니르바나이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다. 깸이 천국이다. 그래서 여래(如來)가 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가 온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느르바나에는 늙음이 없다. 병이 없다. 죽음이 없다. 고통이 없다. 영원한 진리와 사랑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림13) 다석이 우리말로 풀어 옮긴 ‘반야심경’이다.
마지막 글월은 이렇다.
반야바라밀다 욈을 말하노니 곧 욈을 말하면,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디사바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디사바하.’의 뜻은 이렇다.
‘가자 가자 넘어가자. 다 넘어가서 깨달음을 이루자.’
다석은 이렇게 말했다. 진리의식이란 나를 넘어서는 초의식이다. 의식의 세계보다 무의식의 세계가 더 강한 자기이다. 무의식에 초의식이 되면 그때에 참나가 된다. 내가 하늘이라는 것도 초의식이 되어야 내가 된다는 말이다. 나를 초월하는 것이 참나가 되는 것이다. 자기를 초월하는 것이 정말 니르바나에 드는 것이다. 자기를 초월하였다는 것은 정말은 나가 죽었다는 말이다. 자기를 이기는 사람, 자기를 초월한 사람은 몸의 삼독에 끌려다니는 일은 없다. 사상의 근본이 끌려다니는 수레에 벗어날 수 있다. 자기가 그 진리정신을 알면 끌려 다니지는 않는다. 끌려다니지 않으면 니르바나에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완전히 둥글어진다. 그래서 절대인 피안이라고 하여서 저쪽 언덕에 간다고 말한다. 저쪽 언덕에 가서 닿는다는 말이다. 이쪽 언덕(此岸)을 버리고 죽었다는 것이 된다. 상대세계를 버리고 저쪽 언덕(彼岸)에 갔다는 말이다.”
그림14) 서울대가 소장하고 있는 『반야바라밀다심경양소(언해)』이다. 보물 제771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진 출처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다.
- 참고문헌 -
『多夕日誌-多夕柳永模日誌』, 홍익재, 1990
류영모 글, 다석학회 엮음, 『다석일지』, 동연, 2024
박영호 지음, 『다석전기(류영모와 그의 시대)』, 교양인, 2012
박영호 지음, 『다석 류영모의 불교사상』, 문화일보,1995
류영모 말씀, 박영호 엮음, 『씨의 메아리 다석어록: 죽음에 생명을 절망에 희망을』, 홍익재, 1993
다석학회 엮음, 『다석강의』, 현암사,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