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아홉에 세상을 바꾼 정원 산책, 톰 무어 경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나이를 먹으면서 이제 다 됐다 고 눕는 사람과, 아직 멀었다 며 보행 보조기를 밀고 일어나는 사람. 영국의 토머스 무어(별명은 캡틴 톰 무어, 1920~2021) 경은 확실히 후자였다. 그것도 아주 단단한 후자였다.
캡틴 톰 무어 기금 마련 걷기 행사(위키피디아)
아흔아홉에 시작한 일
2020년 4월 6일. 전 세계가 코로나 감염병으로 숨을 죽이고 있을 때, 영국 베드퍼드셔의 작은 마을 마스턴 모레테인에서 노인 한 명이 보행 보조기를 짚고 마당에 나섰다. 나이는 아흔아홉. 이름은 토머스 무어. 목표는 단순했다. 자기 마당에 있는 25미터짜리 길을 백 번 걸어서, 영국 국가보건서비스(이하 국가의료원 ) 자선단체에 천 파운드, 약 160만 원을 기부하겠다는 것이었다.
천 파운드. 열정은 갸륵하되 규모가 소박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목표액이 채워졌다. 그리고는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영국 공영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에 전화 한 통으로 소개되고, 소셜 미디어에 짧은 영상 하나가 퍼지자 세상이 반응했다. 훈장을 달고, 군복 재킷을 입고, 보행기를 밀며 묵묵히 걸어가는 노인의 뒷모습이 사람들의 가슴을 흔들었다. 결국 백 번째 바퀴를 완주한 그의 생일, 2020년 4월 30일, 그가 꼭 백 살이 되던 날에 모인 기부금은 무려 약 3200만 파운드, 약 530억 원을 넘어섰다. 개인 자선 보행으로 역대 최고 모금액이었다.
무어가 영국 육군 소위로 복무하던 시절 (1941년경, 위키피디아)
이 할아버지는 누구인가
무어는 1920년 4월 30일 영국 요크셔에서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때 인도와 버마(현 미얀마) 전선에서 싸웠고, 전후에는 기갑부대 교관으로 복무했다. 군 복무를 마친 뒤에는 건설자재 회사를 운영하는 사업가로, 또 오토바이 경주를 즐기는 생활인으로 살았다. 군인, 사업가, 취미로 오토바이 레이서. 이미 한 사람 분량으로는 충분히 넘치는 인생이다.
그런데 그가 역사에 이름을 남긴 건 아흔아홉 살이 되어서였다.
보통사람의 이력서에 아흔아홉 살 항목이 있다면 그건 대개 병원 신세 거나 요양원 입주 일 것이다. 무어의 이력서에는 세계 모금 기록 달성 이 적혔다.
그는 기부운동이 퍼지는 동안 수많은 방송에 출연하며 한결 같이 말했다. 내일은 분명히 좋아질 것입니다. 이 말은 그의 자서전 제목 내일은 좋은 날이 될 거야 (2020)가 되었고, 코로나 감염병 시대에 지친 사람들에게 위안의 문장이 되었다.
무어(앞 가운데)는 제2차 세계대전 후 기갑 전투 차량 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했다. (위키피디아)
백 살의 가수, 기네스 세계기록 두 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기부운동이 한창이던 2020년 4월, 영국 가수 마이클 볼(1962~ )이 무어의 마지막 바퀴 완주 순간을 축하하며 생중계로 노래를 불렀다. 그 곡은 당신은 혼자 걷지 않을 거야 , 한국에서도 축구 팬들에게 친숙한 바로 그 노래였다. 이 공연이 음원으로 나오자 영국 음악 차트 1위에 올랐다. 무어는 그렇게 역대 최고령 영국 음악 차트 1위 기록 보유자가 되었다. 이전 최고령 기록 보유자는 톰 존스(1940~)였는데, 같은 톰 에게 왕좌를 빼앗긴 셈이다.
기네스 세계기록을 두 개나 보유하게 된 백 살 노인. 누군가는 아직 꿈을 꾸고 있는데, 무어는 그걸 현실로 만들고 있었다.
2020년 7월 17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1926~2022)은 무어를 윈저 궁으로 초청해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무어는 무릎을 꿇으면 다시 못 일어날 것 같다 고 유머를 날렸다. 여왕은 백 살은 정말 대단한 나이 라고 화답했다. 이 두 노인의 대화는 영국언론이 몇 달을 우려먹는 명장면이 되었다.
2020년 4월 26일부터 5월 1일까지 사용된 영국 왕립 우편(Royal Mail)의 톰 무어 대위 기념 소인 모형.(위키피디아)
그리고 마지막
2021년 2월 2일, 토머스 무어 경은 코로나 감염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그토록 돕고자 했던 의료진의 희생을 부른 바로 그 병이었다. 그의 나이 백 살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결코 혼자 걷지 않는 사람으로 기억했다.
이것이 그저 미담인가? 여기서 잠깐 생각해보자.
무어의 이야기를 단순한 감동 미담 으로 소비하는 것은 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의 행동 뒤에는 꽤 묵직한 질문이 숨어 있다.
첫째, 왜 백 살 노인이 정원을 걸어야 했는가. 영국의 국가의료원은 코로나 감염병 직전부터 이미 몇 년째 예산 삭감과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무어가 모금을 시작한 건 선한 의지 때문이지만, 그 배경에는 공공의료가 민간자선에 기댈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가 있었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을 시민 한 명이 두 발로 채운 것이다. 뭉클하면서도 씁쓸한 장면이다.
둘째, 사회는 노인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무어의 행동이 기적 처럼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사회가 노인에게 그다지 기대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가 만약 쉰 살이었다면 똑같은 행동을 해도 이렇게까지 화제가 됐을까. 사람들은 노인의 선한 행동에 놀랐다. 그 놀람 자체가, 우리가 노인에게 얼마나 낮은 기대를 걸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장애인 나단 와이번이 발로 그린 무어의 초상화, 2020년 4월.(위키피디아)
한국에는 어떤 울림인가
이제 한반도로 눈을 돌려보자.
2025년 기준, 한국은 이미 노인 인구 비율이 전체의 20%를 넘어선 초고령 사회 로 진입했다. 사람들이 오래 산다. 그런데 오래 사는 것과 행복하게 사는 것은 다른 문제다.
한국의 노인 빈곤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최상위권이다. 무어가 활약한 영국도 복지 후퇴 문제가 없지 않지만, 그래도 노인이 자기 집 마당에서 보행기를 밀며 국민적 영웅이 될 수 있는 사회다. 한국에서 같은 나이의 노인이 보행기를 밀며 거리로 나온다면, 사람들은 감동하기 전에 왜 저 분은 요양원에 계시지 않을까 부터 생각할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는 지금 여러 의미에서 길을 걸을 수 없는 노인들 을 양산하고 있다. 몸이 불편해서 만이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설 자리가 좁다. 노인 일자리는 주로 공원 환경미화나 경비 업무에 집중되어 있고, 사회는 노인의 경험과 지혜를 자원으로 보는 데 인색하다.
무어는 세상에 증명했다. 아흔아홉 살에도 사람은 자기 방식으로 세상에 기여할 수 있다고. 그리고 그 기여가 얼마나 거대한 파문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또 한 가지. 한국에서 요즘 자주 들리는 말이 있다. 정치가 너무 분열되어 있다. 우리가 뭘 할 수 있겠냐. 무어의 이야기는 이 자조에 조용히 반박한다. 그는 정치를 바꾸지 않았고, 제도를 개혁하지 않았다. 그저 걸었다. 그리고 세상이 따라왔다. 거대한 변화는 반드시 거대한 자리에서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 보행기 하나로도 역사는 움직인다는 것.
2020년대의 한국 시민사회에도 비슷한 씨앗들이 있다. 코로나 감염병 시기 자발적으로 방역 물자를 나눠주던 골목 상인들, 홀로 시위를 이어가던 노모들, 천 원 기부로 동네 도서관을 지켜낸 주민들. 이들은 모두 저마다의 마당을 걷고 있었다. 다만 우리가 충분히 주목하지 않았을 뿐이다.
영국 철도회사는 기차의 이름을 아예 캡틴 톰 무어 로 지었다.(위키피디아)
내일은 좋은 날이 될 거야
토머스 무어 경은 결국 그 병에 졌다. 하지만 그는 지기 전에 이겼다. 530억 원이라는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을 남겼다. 나이가 몇이든, 몸이 어떻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는 것. 그리고 함께라면 내일은 반드시 좋아진다 는 것.
세상이 어지럽고 뉴스가 어두울 때, 백 살 노인이 보행기를 밀며 마당을 걷는 장면을 떠올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천 파운드를 목표로 시작해 530억 원을 모은 그 산책이, 실은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말이었다.
멈추지 마라. 내일은 좋은 날이 될 것이다.
톰 무어 경을 기리는 벽화 앞에서 김성수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