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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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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근원은 ‘아기 안은 엄마’ 2006년 4월 2일 한국방송의 ‘한수진의 선데이 클릭’에 출연했을 때였다. 얼마나 긴장했고 진땀을 흘렸으면 까무잡잡한 이마가 조명에 반짝일 정도였다. 그런 그가 잠깐 생기 돌던 순간이 있었다. 한수진이 이렇게 물었을 때였다. 누구에게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으셨죠?” 어눌하기 짝이 없던 김민기의 입에서 그 순간만큼은 대답이 총알같이 튀어나왔다. 어머니….” 계면쩍은지 잠시 말꼬리를 흐리고는 이렇게 되물었다. 누구나 그렇지 않은가요?” 한수진이 오히려 당황했다. 진짜 그런가? 세상의 자식들이 어머니를 사랑하고 고마워하기는 하지만, 사표로 삼는 경우가 있을까 아니 많을까? 김민기의 반문에 한수진이 얼버무렸다. 이어지는 대화를 보면 한수진이 당시 질문할 때 예상 답변은 ‘김지하 시인’이었던 것 같다. 김민기와 김지하의 사이를 잘 아는 사람들 역시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기색을 김민기도 읽었나 보다. 한마디 보탰다. 사실 지하 형은 저에게 우리말의 생동감을 각인해 줬다는 점에서 제가 영향을 받았죠. 생각이나 이런 건 좀 다르죠.” 김민기에게 어머니는 특별한 존재였다. 사랑과 존경을 넘어서는 분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어머니는 자기 삶의 뿌리이자 추구하는 가치의 근원이었다고. ‘어머니’는 영감의 원천이었으며, 가치 그 자체였다.   어린 김민기와 어머니. 사진 오마이뉴스 1987년 7월호 월간 의 김민기 특집 기사엔 이런 내용이 나온다. 그가 1979년 2월 처음 이리로 내려가 문간방에 세 들어 살던 석암리 21번지 집주인 이완우 씨의 기억이다. 한번은 둘이 앉아 술 한잔하는데 그 양반이 갑자기, 그야말로 닭똥 같은 눈물을 죽죽 흘리는 거예요. 세상에 눈물도 그런 눈물은 첨 봤죠. 어머니가 불쌍하다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는 데모꾼도 아닌데 왜 저렇게들 난리를 치는지 (그래서 어머니를 힘들게 만드는지) 답답하다는 거예요.”(조철현, ‘긴 밤 15년’ 김민기 인터뷰) 이 씨의 기억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때 (김민기의) 어머니는 일흔이 넘었는데, 막내가 혹시 밥도 못 해 먹고 힘든 일 하다가 쓰러지지나 않을까, 걱정돼서 찾아오시곤 했죠. 그런 어머니가 서울로 돌아가실 때면, 어머니를 태운 버스가 삼포 밭모퉁이로 사라져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망연히 지켜보다가, 넋놓고 울기 시작하는 거예요. 어찌나 슬퍼하던지 밤새 울더라고요.” 김민기는 10남매 가운데 막내였다. 이 많은 형제 가운데 어려서부터 줄곧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고, 어머니 슬하를 지킨 것은 막내 민기였다. 그가 태어나기 전 아버지는 이승에 없었으니, 어린 민기가 믿고 의지할 건 세상에 어머니 한 분뿐이었다. 유년의 기억이 거의 모두 어머니와 관련된 것으로 채워진 것은 그 때문이었다. 어머니 치마의 말기를 움켜쥐고 혹시나 놓칠세라 종종걸음으로 뒤따르는 아이가 있다면, 그 모습은 영락없는 유년의 김민기였다. 그렇게 엄마를 따라 이리(지금의 익산) 역전에 나갔을 때였다. ...방학이면 서울에 있는 형, 누나들이 내려왔지. 한 번은 어머니랑 (이리, 지금의 익산) 역으로 마중 나갔는데, 역에서 그 무시무시한 문둥이(한센병 환자)들이 우릴 보고 막 다가오는 거야. 굉장히 무서웠어. 난 엄마 뒤에 숨었지. 그런데 그분들이 엄마 앞에 와서는 허리를 굽실하며 인사를 하는 거야. 알고 보니 어머니가 받아줬던 아기들이었어. 어머니는 그 무시무시한 이들을 마치 아이 쓰다듬듯이 등을 두들겨 주고.” …부모들도 아마 감염자였을 거야. 그런 분들한테 어머니가 아이 받았다고 어떻게 돈을 받았겠어?”   어머니와 형과 누나가 지켜보는 가눈데 그림을 그리는 김민기. 사진 위키트리 한센인들만이 아니었다. 전후 역전에는 손 대신 갈고리를 차고, 다리 대신 목발을 한 이들도 많았다. 전쟁터에서 팔다리를 잃었거나 폭격에 팔다리를 잃은 이들이었다. 이들은 인근 상인들은 물론 행인들에게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그들 중 일부는 행패를 부리다가도 어머니 앞에서 양처럼 순해졌다. 엄마 뒤에 숨은 아이에게, 어떤 점포에서 뜯어낸 것인지 몰라도 사탕이나 과자를 주는 이들도 있었다. 김민기의 기억 속에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어머니는 함경도 원산 태생으로, 일제 병탄기 연희전문 간호학 1기생으로 입학했다. 당시로서는 드문 여성 엘리트였다. 졸업 학년 때 기숙사 내의 조선인 차별에 항의하는 시위를 주동했다가 퇴학당했고, 공부를 마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조산원 자격증을 딴 맹렬 여성이기도 했다. 조산사는 간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사람이 조산학, 신생아 간호학 등을 추가로 이수해야 딸 수 있는 자격증이었다. 당시는 의사가 귀했던 시절이었던지라 신생아는 대부분 조산사나 산파가 받았다. 어머니는 귀국해 삼남의 여러 지방을 다니며 조산사로 일하다가 전라북도 이리의 삼산의원에 취직하면서 그곳에 정착했다. 당시 병원에는 조수로 일하며 의사 자격증 취득을 준비하던 청년이 있었다. 청년은 곧 의사 면허를 취득했고, 어머니와 결혼했다. 아버지는 병원 일에 만족하지 않고, 다른 사업에도 관심이 많았다. 사이다 공장 등을 설립, 운영해 가산도 제법 일궜다. 그게 화근이었을까? 6·25 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이 진주하면서 아버지는 ‘반동’으로 몰렸다. 사업장도 여럿인 데다 기독교인이었다. 인민군은 한국전쟁 기간 중 전북 이리에서만 기독교인 31명을 처형했다. 특히 연합군이 인천에 상륙하자 서둘러 퇴각하면서 많이 저질렀다(2024년 진실화해위원회 진상조사 결과 보고서). 유엔군 진주 후 적 진영에 가담해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사람들”로 분류된 이들이었다고 한다. 김민기는 1951년 3월 31일 10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으니, 6개월 전쯤의 일이었다. 이후 10남매를 건사하고 기른 것은 오로지 어머니 몫이었다. 어머니는 조산사를 계속하며, 사이다 공장, 간장 공장 일 등 닥치는 대로 해야 했다. 훗날 어머니는 ‘받은 아기가 얼마나 되느냐’라는 막내의 물음에 한 삼천은 될 거”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당시로선 매우 드문, 진취적 여성이었다. 그 많은 가족을 건사하면서도 한국여전도회 회장직까지 맡기도 했다. 내성적인 김민기와는 사뭇 달랐다. 어머니는 엄격했다. 홀로 대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으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경우에 어긋나는 일은 가만두지 않았다. 그러나 조산사 일을 하면서 만나는 일그러지고 찌그러진 이들에게는 늘 자상했다. 한센병 산모의 아이건, 돌림병 환자의 아이건, 어머니는 모두 자식처럼 대했다. 대가는 주는 대로 받았고, 형편이 닿지 않는 산모에게는 오히려 미역값이라도 놓고 나왔다. ‘아기 안은 엄마’에게서 온  영감 아마도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란 탓이었을 게다. 학전 창립 20주년이 되던 2011년이었다. 그는 월간지 과의 인터뷰에서 평소와 달리 자신의 소신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김민기의 전설’ 속으로 들어가려는 이들이라면 꼭 염두에 두어야 할 키워드 같은 이야기였다. 뭐가 제일 가치 있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내가 생각하기에 아기를 가진,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라고 봐요. 그건 누구도 건드리면 안 돼요. 그 가치를 인정하는 것 말고는 출발할 수 있는 지점이란 없을 것 같아요. 거기에서 모든 게 출발하지요.”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 세상에서 가장 성스럽고도 아름다운 초상이다. 그림에 몰입했던 시절 그가 천착했던 무언가 ‘근원’이란 바로 그것이었다. ‘모자상’ 하면 기독교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를 소재로 한 ‘성 모자상’을 떠올린다. 그러나 모자상은 신화시대부터 역사시대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가장 사랑하는 그림과 조각의 소재였다. 이집트 신화 속 아이시스(어머니)와 호러스(자식) 모자상은 이집트인에게 가장 익숙한 조각이고 그림이었다. 가톨릭 교권이 지배하던 중세의 유럽에선 두말할 필요가 없었고, 르네상스 시대의 세 천재 미켈란젤로, 다빈치, 라파엘로도 당시 ‘가장 잘 팔리는’ 이 소재의 그림과 조각을 경쟁적으로 제작했다. 기독교에 회의했던 근대의 작가들에게도 모자상은 성스러운 주제였다. 빈센트 반 고흐에게 모자상 특히 아이는 ‘무한한 어떤 영감’을 주는 것이었다. 그는 우체부 룰랭의 부인과 아기 마르셀 연작을 남겼다. 고흐의 이 그림을 특히 애호했던 피카소도 모자상을 남겼다. 한국에서도 민복진 등 평생 모자상을 돌에 새긴 이가 적지 않다. 박정희는 쿠데타 이후, 화폐 도안에 명사의 초상화를 넣는 관례를 깨고 뜬금없이 모자상 그림을 100환짜리 지폐에 그려 넣었다. 그러나 이 지폐는 곧 있을 화폐개혁을 위한 눈가림이었다. ‘모자상 지폐’는 불과 25일 뒤 사라졌다. 모자상을 악용한 전무후무한 사례라 할 것이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비통한 장면에도 모자상은 나온다. 미켈란젤로의 조각 ‘피에타’에선, 아들의 주검을 안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는 얼마나 비통했는지 예수의 옆구리를 받친 그의 왼손 손가락이 주검의 옆구리를 깊이 파고 들어가 있다. 이후 피에타상은 절대로 미켈란젤로를 능가할 수 없다고 했지만, 어머니이자 할머니인 독일의 케테 콜비츠는 전쟁터에서 아들과 손주를 차례로 잃은 뒤 조각한 를 통해, 어머니의 슬픔이 얼마나 처절한지 남자인 미켈란젤로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피눈물을 담았다. 엄마, 어린이극장의 모태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는 김민기의 말대로 세상의 시작이고, 모든 선함과 진실함과 아름다움의 시작이었다. 김민기의 이야기는 이어진다. 내가 어린이극을 해 봐야겠다는 것도 거기에서 출발하지요. 또 내가 만든 것들도 사실은 그 이야기죠. 이것으로 장사를 하겠다는 건 천부당만부당이죠. 우리나라 아이들처럼, 말도 안 되는 천박한 자본주의 논리에 내던져진 아이들은 세상에 없어요. 그걸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거 아니겠어요?” 돈 되는 것은 마다하고, 돈 잡아먹는 어린이 청소년 연극에 집착하는 이유가 뭐냐는 물음에 대한 답이었다. 사실 누구라도 그에게 묻고 싶은 물음이었다. 그는 연일 만원 열차로 달리던 의 운행을 2008년 돌연 중단했다. 순전히 어린이 청소년 연극, 뮤지컬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김민기의 꿈이 담긴 아르코꿈밭극장 개관식 모습. 2024년 7월17일 연합뉴스 사실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았을 뿐이지, 김민기는 30대 중반 이후 ‘아이’에 꽂혀 지냈다. 1984년 를 시작으로 ‘학전 어린이 무대’에 이르기까지, 를 제외하고 그가 짓고 제작한 것들은 모두 어린이 청소년극이었다. 세상을 떠날 때도 그가 가장 걱정했던 것은 어린이극의 맥이 끊기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이런 그의 간절한 마음을 잇기 위해 학전소극장 자리에 어린이 청소년극 전문 극장 아르코꿈밭극장을 개관했다. 그의 초기작 즉 20대 초반에 지은 노래 중에도 동요이거나 동요풍의 노래가 많았다. 심지어 그의 대표곡 ‘아침이슬’조차 ‘동요풍’으로 분류하는 이도 있다. 2022년 12월 노찾사 출신의 가수 조경옥은 그의 동요만 모아 학전 소극장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였다. ‘백구’나 ‘인형’은 물론 ‘작은 연못’ ‘날개만 있다면’ ‘학교 가는 길’ ‘강변에서’ ‘나비’ ‘바다’ 등 18곡을 담았다. 모두 김민기가 선곡한 것들이었으니, 동요 여부를 놓고 시비가 생길 리 없다. 2021년엔 그를 사랑하는 이들이 앨범 를 발매하기도 했다. 김민기가 한 작업의 시작엔 늘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가 조산사 시절 받아 안은 그 아기들이 있었다. 김민기의 노래 그리고 그의 전설은 이 ‘모자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어머니 김하련은 1996년 우리 나이로 아흔에 영면했다. 김민기의 이 연일 만원 열차로 달리고, 그의 가난한 살림에 반짝 햇살이 비쳐, 평생 막내를 걱정하던 어머니가 한숨을 놓을 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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