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로 조국을 지킨 사람, 쇼팽이 한국에 건넨 말 [사람들] 손가락으로 총을 든 사나이
1830년 11월, 바르샤바 거리에 총성이 울렸다. 러시아제국의 지배에 맞선 폴란드 청년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이른바 11월 봉기 다. 그런데 폴란드의 가장 위대한 음악가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Frédéric François Chopin, 1810~1849)은 그 순간 바르샤바에 없었다. 연주여행 차 유럽을 떠돌던 스무 살 청년은 총을 들 수도, 바리케이드에 설 수도 없었다. 그는 대신 피아노 건반 위에서 울었다.
봉기가 러시아군대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다는 소식을 듣고 쇼팽이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쓴 일기에 적은 문장은 지금도 읽는 이의 가슴을 후빈다.
아, 신이시여! 당신은 존재하십니까? 그렇다면 왜 이 일이 벌어집니까?
신을 향한 절규였으나, 그것은 사실 권력을 향한 고발이었다.
쇼팽은 끝내 고국 땅을 다시 밟지 못했다. 파리에 정착한 그는 죽을 때까지 18년을 망명객으로 살았다. 그러나 그의 피아노곡들, 즉 마주르카와 폴로네즈, 야상곡과 연습곡들은 러시아 황제의 검열관도 압수할 수 없는 방식으로 폴란드의 혼을 유럽 전역에 퍼뜨렸다. 총 없이도 싸울 수 있다는 것, 쇼팽은 그것을 피아노 한 대로 증명했다.
1849년의 프레데릭 쇼팽(위키피디아)
이름도 두 개인 사나이, 정체성의 경계에서
쇼팽은 태어날 때부터 두 개의 세계를 품고 살았다. 1810년 3월 1일, 바르샤바 근교 작은 마을 젤라조바 볼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니콜라 쇼팽은 프랑스인이었고 어머니 유스티나 크쥐자노프스카는 폴란드인이었다. 프랑스식 이름 프레데리크 와 폴란드식 이름 프리데리크 를 동시에 가진 아이는, 훗날 파리에서는 프랑스인처럼, 폴란드 망명자들 사이에서는 폴란드인처럼 살았다.
이 이중성이 오히려 그의 음악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그는 폴란드 민속춤곡인 마주르카를 파리 귀족들의 응접실에 가져갔고, 폴로네즈의 웅장한 리듬을 빈과 런던의 청중 앞에 내놓았다. 두 문화 사이에 끼어 어정쩡하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문화를 하나의 건반 위에서 화해시킨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도 이런 경계인들이 있다. 750만 재외 한인, 국내에 체류하는 250만 외국인, 그리고 두 문화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수많은 이주민 자녀들. 쇼팽은 이 경계가 약점이 아니라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준 사람이다.
젤라조바 볼라(Żelazowa Wola)에 있는 쇼팽의 생가(위키피디아)
파리 사교계의 가장 비싼 가정교사
쇼팽이 파리에서 어떻게 먹고살았는지를 알면, 예술가의 생존 전략에 대한 관념이 흔들린다. 그는 평생 공개연주회를 고작 서른 번남짓 밖에 하지 않았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무대공포증이 심한 은둔형 연주자쯤 될 것이다. 그러나 쇼팽은 파리 귀족자제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것으로 안정적인 수입을 올렸다. 레슨 한 번에 지금 돈으로 수십만 원을 받았으니 그는 사실상 파리 사교계에서 가장 비싼 가정교사였다.
겉으로는 체제 순응처럼 보인다. 억압자들의 자녀에게 돈을 받고 음악을 가르치다니! 그러나 쇼팽은 그 돈으로 폴란드 망명자들을 물심양면 도왔고, 파리 살롱에서 폴란드의 존재를 끊임없이 환기시켰다. 부자들의 지갑에서 꺼낸 돈이 결국 저항의 씨앗이 된 셈이다. 불의한 시대에 예술가가 생존하는 방법이란 이처럼 꽤 현실적일 수 있다.
쇼팽의 아버지, 니콜라 쇼팽, 미에로셰프스키 작, 1829년(위키피디아)
조르주 상드와의 9년, 예술가에게 안식처란 무엇인가
쇼팽의 삶에서 빠트릴 수 없는 이름이 있다. 소설가 조르주 상드(George Sand, 1804~1876, 본명 아만틴 뒤팡)다. 1836년, 친구의 살롱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의 첫 인상은 최악이었다. 쇼팽은 남장을 하고 시가를 피우며 나타난 상드를 보고 저 분이 정말 여성입니까? 물었고, 상드는 쇼팽을 창백하고 여성스럽다 고 평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결국 9년을 함께 살았다.
조르주 상드는 쇼팽보다 여섯 살 위였고, 세상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인 공화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였고, 여성의 독립과 권리를 거침없이 주장했다. 쇼팽의 창작이 가장 풍성하게 꽃핀 것이 바로 이 시기다. 폴란드를 잃은 망명자에게 상드는 조국 대신 창작의 안식처가 돼 주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1847년 상드의 아들딸과의 갈등으로 결별했다. 쇼팽은 이후 몸과 마음이 함께 무너졌다. 1848년 파리 혁명의 혼란 속에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오가며 지쳐 돌아온 그는 이듬해 10월 17일 파리에서 폐결핵으로 숨을 거뒀다. 39년 짧은 삶이었다. 그의 몸은 파리 페르라셰즈 묘지에 묻혔지만, 심장만은 그의 유언에 따라 바르샤바로 옮겨져 성십자가 교회 기둥 속에 안장됐다.
1864년의 조르주 상드(위키피디아)
프란츠 리스트의 질투, 혹은 우정
쇼팽 이야기를 하면서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를 빠트리면 반쪽짜리 이야기가 된다. 헝가리 출신 리스트는 당대 최고의 피아노 연주자로, 그 인기는 오늘날 아이돌 가수에 맞먹었다. 여성 팬들이 그의 장갑과 명함을 서로 차지하려 다퉜다는 기록까지 남아 있을 정도다.
쇼팽과 리스트는 파리에서 친구로 만났다. 리스트는 쇼팽의 음악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홍보했다. 반면 쇼팽은 리스트가 자신의 곡을 너무 화려하게 연주한다며 내심 불만이었다. 그가 내 야상곡들을 연주할 때, 나는 내 곡인지 알아보지 못할 것 같다 는 말을 남겼다는 것이 정설이다. 위대한 우정에도 예술적 견해 차이는 있는 법이다.
그런데 리스트가 한 일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은, 쇼팽보다 37년을 더 살면서 쇼팽의 음악을 알리는 데 평생을 바친 것이다. 죽은 뒤에 기억해 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 이것이 어쩌면 명성보다 더 중요한 유산일지 모른다.
프란츠 리스트 초상화(위키피디아)
피아노 건반이 국경을 넘는 방법, 쇼팽이 한국에 묻는 것들
1849년 10월, 죽어가는 쇼팽에게 누군가 물었다면 어떨까.
끝내 폴란드를 되찾지 못했는데, 당신의 삶은 실패입니까?
그는 아마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나는 폴란드가 지도에서 사라진 시대에, 음악으로 폴란드가 살아있음을 증명했습니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이 계엄을 선포하고, 민주주의의 기반이 흔들렸을 때, 한국의 많은 예술가·작가·음악가·만화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저항의 목소리를 냈다. 계엄선포 몇 시간 만에 국회 앞으로 달려간 시민들처럼, 이들도 자신의 자리에서 저항했다. 쇼팽이 피아노로 조국의 혼을 지켰듯, 예술은 언제나 권력이 두려워하는 형태의 저항이다.
그러나 쇼팽에게 배울 것이 저항만은 아니다. 그는 망명 상태에서도 스스로를 잃지 않았다. 파리 귀족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폴란드 색채를 지우지 않았다. 오히려 이방인이기 때문에 더욱 폴란드적이었다. 흔들리는 세상에서 정체성의 중심을 잡는 것, 이것이 쇼팽이 남긴 가장 조용하고 가장 강인한 교훈이다.
폴란드가 러시아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의해 지도에서 사라졌던 시간은 123년이었다. 그 동안 폴란드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쇼팽의 마주르카와 폴로네즈가 세계인들에게 폴란드를 기억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역사가들도 있다. 음악이 영토를 대신한 것이다.
오늘 한국의 민주주의는 어디에 있는가. 2025년 탄핵 이후에도, 그리고 지금도, 민주적 기반이 언제 다시 흔들릴지 모른다는 불안은 남아 있다. 쇼팽은 말한다, 나라를 지키는 것은 군대만이 아니다. 언론이고, 예술이고,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기억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계엄령으로도 압수할 수 없다.
쇼팽이 죽은 뒤, 그의 심장은 바르샤바로 돌아갔다. 사람은 떠났어도 정신은 돌아온 것이다. 우리의 민주주의도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빼앗겼다 싶을 때도 반드시 돌아오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의 심장이다.
쇼팽이 1829년 리투아니아 대공 라디비우스를 위해 연주하고 있다. 시미라츠키의 그림, 1887년(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